[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절친 전두환과 노태우, 권력으로 갈라서다.인간은 태어나는 순간 이미 죽음을 향한 열차를 탄다. 그 열차의 종착점은 한 번도 변하지 않는다. 설사 종착에 대한 운명을 피하려고 중간중간에 내려본들 아무 소용도 없다. 인간이 운명의 열차를 타고 가다가 어느 날 종착점이 가까워졌을 때 뒤돌아보며 여러 행복했던 일, 그렇지 않았던 일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 때 ‘피식’ 하면서 웃을 수 있는 일을 떠올릴 수도 있다. 바로 ‘벗’이다. 반갑
[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김일성 사망 해프닝 소주판매 사상 최고기록‘김일성 피격 사망’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첫 보도(호외)는 1986년 11월16일 오후였다. 한국을 비롯한 미국과 일본의 첩보망이 북한의 동태를 예의 주시하는 상황에서 터져나온 충격적인 보도내용은 이러했다.“북한의 김일성이 사망한 것 같다. 사망시기는 14일 또는 16일께로 그의 죽음은 북한내부의 권력암투에 따른 피살일 가능성이 크다.”이같은 보도를 접한 시민들은 ‘야, 김일성이 죽었대!’ ‘이거 통일
[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나이팅게일을 필리핀 공군기지로 발진시켜라”이 합참의장이 병원으로 후송되는 도중 아웅산 참사 소식은 전파를 타고 전 세계에 퍼져나갔다. 사고 직후 이 합창의장을 비롯, 다른 부상자들이 병원으로 겨우 옮겨졌으나 의료시설이 마땅치 않아 응급치료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바로 이 시각 미국의 워싱턴에서 존 베시 미합참의장은 모종의 조치를 취하고 있었다. 물론 한국의 합참의장이 부상을 당했다는 보고를 받은 뒤였다. 베시 합참의장은 지휘계통으로 ‘나이
[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고위 공직자 17명의 목숨을 앗아간 아웅산묘소사람이 살아가면서 생사의 고비는 몇 번이나 넘길까. 저마다 다르겠지만 우려곡절을 겪으며 여러 번 사선을 넘는 경우가 있고 그렇지 못해 졸지에 목숨을 잃는 불운한 사람도 있다. 그래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다시 태어난 사람을 ‘피닉스’(불사조)라고 한다. 이기백 전 합참의장도 피닉스로 통한다. 아웅산묘소 폭탄테러때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서 그렇다. 그를 통해 당시 아웅산묘소의 참사현장을 생생하게
[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5공화국 개국공신들 대통령 친인척문제 단호하게 처리해야일이 이쯤되자 유 부장으로서도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보기관의 최고 책임자로서 적절한 시기에 이러한 사태를 미리 막지 못한 죄책감이 강하게 엄습해왔던 것이다. 며칠을 고심하던 유 부장은 전 대통령에게 진언하기로 하고 청와대로 가기에 앞서 우선 안기부내 고위 당국자들과의 회의를 통해 자신의 심경을 피력했다.이와 관련 당시 안기부의 한 관계자는 “권력비호설이 증폭되는 상황에서
[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죽의 장막’ 중국의 벽마저 허물어라소련과의 비밀접촉에서 ‘학술교류 합의’라는 소기의 목적을 거두자 유 부장은 내친 김에 또 다른 극비채널을 가동시키기에 이르렀다. 이른바 ‘죽의 장막’인 중국의 벽마저 허문다는 작전이었다. 크렘린궁의 적극적인 자세로 더 한층 자신을 얻은 유 부장이 때를 놓지지 않으려고 곧바로 중국을 겨냥했던 것이다. 그러나 유 부장의 마음은 여간 편하지가 않았다. 중국의 상황은 소련과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이었다. 중국 역시 한국
[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소련의 동북아문제 최고 권위자와 학술교류 협의함씨가 15시간여의 비행 끝에 모스크바 세레미츠예보 공항에 도착하자 약속대로 김영진 교수가 마중을 나왔다. 김 교수는 함씨와 같은 경기고 출신으로 워싱턴에서 팬암항공기를 이용, 3시간 전에 이미 모스크바에 도착해 있었다. 김 교수의 모스크바행은 평소 소련문제 연구를 해왔다는 점에서 발탁됐다. 게다가 그는 함씨와도 잘 아는 사이였다. 이튿날 둘은 예정된 계획에 따라 동양학연구소의 카피차(82년 외무차관을
[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함병춘 ‘철의 장막’ 모스크바에 극비 밀파되다1981년 10월 중순 남산의 국가안전기획부 부장실. 유 부장은 아까부터 창밖을 바라보며 뭔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평소와는 달리 그의 표정은 이따금씩 한숨을 내쉬는 등 어딘지 모르게 불안해 보였다. 이 때 노크소리가 들렸고 유 부장은 낯익은 방문자를 맞이했다. 바로 주미대사를 지내다 연세대학교 교수로 복귀한 함병춘씨였다.유 부장은 함씨와 마주 앉아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나라를 위해
[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불곰사업은 어떻게 시작됐나이런 일이 있은 후 노태우 대통령은 1990년 6월4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가진 고르바초프 대통령과의 역사적인 회담을 통해 한소 수교는 물론 한반도의 탈냉전화의 길을 열게 됐다. 아울러 고르바초프는 1991년 4월 제주도를 방문해 신라호텔에서 노태우 대통령과 핵심현안을 중심으로 다시 한번 회담을 가지면서 한반도에 훈훈한 기운을 불어넣었다.(이때 필자는 취재기자로 제주도에 가서 현장을 지켜봤다. 키위를 좋아하
[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미 CIA와 밀월관계 구축, 북방외교 시동걸어유 부장은 재임시절을 떠올리며 필자와 인터뷰 당시 올림픽 유치비화를 처음으로 공개한 뒤 북방외교와 관련된 내용도 소개했다. 이는 그의 재임 중 2대 역점사업의 하나로 이른바 ‘5공식 북방외교’를 말한다. 즉 후일 장세동 안기부장의 북한방문 토대도 여기서 비롯됐으며 안기부와 미CIA의 밀월관계를 구축해 소련과의 관계개선에 물꼬를 트는 계기도 됐다.그러니까 1981년 5월 유 부장은 미국 방문
[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올림픽 유치를 위한 비장의 승부수해방 이후 최대의 경사로 일컬어지는 88서울올림픽의 유치계획은 원래 1979년 6월부터 검토되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당시 주한미군철수문제 등과 관련, 카터 미대통령과 서먹한 관계였던 것으로 알려진 박정희 대통령이 대미관계는 물론 특히 정치,경제, 안보 등의 대북관계에 있어서도 결정적 우위를 차지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올림픽 유치계획을 처음으로 거론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계획이 구체화되기도 전에 부마사태가 발생하
[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안기부가 주도한 1988년 서울올림픽 유치 극비작전결국 이렇게 해서 유 장군은 1980년 8월 18일 전역과 함께 제 11대 중정부장에 취임, 전두환 전임부장서리와 인수인계를 하게 되었다. 중정부장에 취임하자마자 그는 대대적인 조직개편에 들어갔는데 정보기관이 국가원수를 시해했다는 이미지를 씻기 위해 우선 명칭부터 바꿨다. 그리고 새로 국가안전기획부법을 국회에 상정했으며 이에 따라서 1981년 1월 1일 중앙정보부는 안전기획부로 거듭나
[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선상 만취 김복동의 위기일발, 이기백 장군이 구해이기백 장군은 5공화국 당시 실세로 군림했던 육사 11기 출신들과 돈독하게 지냈다. 주요 보직과 승진 등은 거칠 것이 없을 정도였다. 끈끈한 동기애로 술자리도 자주 가졌다. 이와 관련된 흥미 있는 일화가 있다.1964년 여름이었다. 전방 등에서 근무하던 육사 11기 동기생들, 그러니까 전두환, 김복동, 이상훈, 이기백 소령 등이 진해에 있는 육군대학에 입교했다. 이들의 만남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각
[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언론회유를 위한 K-공작계획 우리나라 현대사 가운데 가장 숨가빴던 시기는 1979년과 1980년, 그러니까 2년 동안이라고 할 수 있다. 1979년 제3공화국 18년 통치의 종지부를 찍은 10.26사건에 이은 12.12사건, 그리고 신군부에 의해 주도된 5.17과 5.18 등 실로 굵직굵직한 일들이 연이어 벌어졌다. 그럴 때마다 세상 어떻게 돌아가는지, 도대체 진실은 무엇인지 잘 모르는 국민들은 까막눈이 된 채 막강실권을 잡은 신군부의 발표해 의해
[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국보위 출범은 5공화국 탄생의 전주곡당시 최규하 대통령은 80년 5월11일부터 중동순방길에 나섰으나 학원소요 사태 등 국내의 심각한 사회불안으로 귀국 예정 일자를 하루 앞당겨 16일 밤 김포공항에 도착, 청와대로 향했다. 최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신현확 국무총리로부터 그동안 국내에서 있었던 학생소요 등 당면문제에 대해 보고를 받고 대책을 논의했다.이보다 며칠 앞서 보안사령부 정보처(처장 권정달 대령)에서는 계속되는 소요사태와 무장공비
[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군이 데모진압에 나선다면 어떻게 되겠느냐”12.12사건이 발생한 지 5개월이 넘은 1980년 5월16일 국방부에서 군단장급 이상 전군 주요 지휘관회의가 긴급소집됐다. 원래 회의장소는 국방부장관실이었으나 육참총장은 미리 총장실에 모이도록 했다. 주요 지휘관들은 총장으로부터 “오늘의 안건은 데모진압에 군을 투입할 것이냐 하는 문제”라는 얘기를 들었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장군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쑤군댔다. 강력하게 밀어붙이자는 의견
[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미 8군 동원 신군부 제압하려 했다.이 장군은 12.12를 회상하면서 위컴 주한미사령관이 미8군을 동원해 신군부를 제압하려 했었다는 사실을 공개했다.12월15일 오전 미 군사고문단장이 이 장군을 급히 찾았다. 이 장군과는 평소 잘 아는 사이였다. 장소는 미 8군 영내에 있는 고문단장실이었다. 이 장군이 약속장소에 도착해보니 위컴 사령관이 혼자 앉아 있었다. 그는 주위의 눈을 피하느라 고문단장 이름을 사용했노라고 귀띔했다. 위컴 사령관
[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12.12거사는 4일전 경복궁 30단 예비모임에서 시작됐다.1979년 12월8일 오전 국방부 청사에서는 차관주재회의가 열렸다. 국방부 간부들이 갖는 통상적인 회의였다. 회의가 끝나자 유학성 군수차관보가 방산차관보인 이범준 장군에게 오늘 저녁자리를 하자고 했다. 그러나 이 장군은 선약이 있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그러자 유 장군은 “그 약속을 무조건 취소하고 나랑 저녁하러 갑시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 장군은 취소할 수 없다고 했다.
[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현대사의 물줄기를 역류시킨 또 하나의 사건10.26의 밤은 그렇게 지나갔다. 그런데 문제는 엉뚱한데서 불거져 나왔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장병들 사이에 ‘유신헌법은 악법이다’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았다. 박 대통령이 살아 있을 때만 해도 군지휘관들은 장병들에게 정신교육시간 때마다 ‘유신헌법만이 살 길’이라고 주입해 왔기 때문에 이같은 반발은 자휘관들을 매우 난처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이 장군은 각 예하부대를 직접 방문해 비록 시대와 정권이 바뀌
[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박 대통령 서거 소용돌이 치는 군부1979년 2월 청와대는 대대적인 군인사 개편을 단행한다. 이 때 육본 참모차장이었던 이건영 장군은 3군사령관에 임명됐다. 정승화 장군이 참모총장, 김학원 장군이 1군사령관에 새로 부임했다. 3군사령관은 예나 지금이나 수도권 전역을 관할하는 핵심직책으로 야전지휘관으로서는 선망의 대상이 되는 자리였다. 따라서 이 장군도 군생활의 마지막 정력을 쏟는다는 자세로 임했다. 그러나 12.12로 정승화 총장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