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 칼럼=김민범의 다정다감(多情多感)] 여름이면 기대하는 것들이 있다. 눅진거리는 일상에서 벗어나 여행을 떠나는 일, 새까맣게 그을려 어수룩한 모습을 사진으로 찍는 일, 휴가지에서 일어나는 멍청하지만 아름답다고 기억할 이야기들을 기대한다. 2015년 8월 7일부터 10일까지 열렸던 제17회 정동진독립영화제를 방문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소문으로만 듣던 영화제를 2015년 자원 활동가로 참여하게 되었다. 자원 활동가는 영화제 시작 이틀 전에 모여 영화제 준비를 시작했다. 강릉으로 가는 버스는 사람들의 달뜬 목소리와 커다란 짐으로 가득 차, 낯선 곳으로 가는 설렘을 더했다. 전날 밤잠을 설친 탓에 얼핏 잠이 들고 나면, 계속 다른 풍경이 나타나 일상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알렸다. 계속된 꾸벅임에 고개가 뻐근해질 때쯤, 강릉에 도착했다. 강릉에서 하루는 사람들과 친해지는 일로, 하루는 영화제에서 사용할 짐을 옮기는 일로 보냈다.

영화제 내내 아침이면 폭염주의 문자에 잠을 깼고, 전날의 피로와 숙취를 달래는 일로 하루를 시작했다. 강릉에서 이틀을 보내고 영화제가 시작하는 8월 7일 금요일에 정동진으로 떠났다. 방학인 정동 초등학교는 조용하고 텅 비어있었다. 수많은 의자와 스크린이 설치되어 있기를 기대했지만, 초등학교는 본연의 모습을 지키고 있었다. 스크린 설치부터 부스설치, 홍보까지 모두 자체적으로 해결했다.

한 여름 더위에 조금만 움직여도 땀범벅이 되었지만, 누구도 지친 기색 없이 자신이 맡은 일을 했다. 모든 준비가 끝나고, 영화제를 대표하는 에어 스크린이 올라갈 때는 이제 시작이라는 기대감이 들었다. 7시부터 이주승, 김꽃비 배우의 사회로 개막식이 진행되었고, 독립영화인 밴드 ‘깜장고무신2’의 공연도 있었다. 야외에서 상영되는 영화제 특성상 첫 영화는 8시에 시작되었다. 영화 상영이 끝나면 매일 뒤풀이 파티가 있었고, 파티는 아침 해가 뜨고 나서야 끝이 났다.

일찍 잠이 들었던 사람들이 점심 준비를 했고, 식사를 마치면 정동진 해수욕장에 가서 단체로 물놀이를 했다. 해수욕을 마치고, 둘째 날 영화제를 준비할 때였다. 예보에도 없던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가 오면 야외상영은 불가능하다. 하늘과 기상청을 탓할 새도 없이 초등학교 실내강당에서 상영을 준비했다. 많아야 300명이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이었다.

실내 상영이 준비가 마무리될 때쯤 비가 잦아들었다. 실외 상영과 실내 상영을 둘 다 준비했다. 상영을 40분 남기고 비가 완전히 그쳤다. 비가 그친 자리에는 동화처럼 무지개가 떴다. 크고 또렷한 반원 모양의 무지개였다. 스탭과 관객 모두 떠오른 무지개에 감탄했다. 무사히 정시 상영이 시작되었다.

무지개가 뜨던 날, 모기를 쫓는 쑥불을 지피는 일을 했다. 전날과 다르게 영화를 볼 수 있었고,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도 있었다. 평소였으면 영화 한 장면을 놓칠까 싶어 집중했겠지만, 이날은 달랐다. 영사기의 불빛은 쑥불 연기에 일렁였고, 별들은 울컥거리듯 반짝였다. 사람들은 영화를 본다는 일보다는 같은 공간과 시간을 공유하고 있다는 일에 집중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때마침 멀리서 기차가 지나갔고, 기적소리가 들렸다. 느긋하고 편안한 밤이었다. 각각의 순간이 모여 하나의 장면이 되었다. 영화보다 영화적인 순간이었다. 모두가 주연이었고, 편집해야 할 장면은 단 한 장면도 없었다. 세상은 언젠가 영화가 될 거라는 어느 영화 평론가의 말을 믿을 수 있었다. 사랑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낭만적인 밤이었다.

셋째 날도 다르지 않게 지나갔다. 월요일에는 분주하던 초등학교가 다시 고요해졌다. 남항진에서 막국수를 먹고, 사진을 찍은 뒤 느리게 저마다 가야 하는 곳으로 떠났다.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그 밤과 그 날 밤의 공기를 생각한다. 영화를 보는 일이 영화가 되고, 숨을 쉬는 일조차도 낭만으로 느껴지던 그 밤의 공기를 기억한다. 2015년 여름은 분명 별 볼 일 있었고, 멍청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도 한가득 건졌다. ‘별이 지는 하늘, 영화가 뜨는 바다’가 있던 정동진은 분명 오래 두고 꺼내볼 장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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