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스몰 타임 크룩스’(2000)는 뛰어난 작품성과 부도덕한 사생활의 양면성을 지닌 우디 앨런 감독의 스노비즘 풍자 코미디의 보석이다. 어수룩한 은행털이 전과자 레이(우디 앨런)와 프렌치(트레이시 울만)는 가난한 부부다. 레이는 친구 3명과 공모해 은행 옆의 휴업 중인 피자집을 임차해 땅굴을 파서 은행 금고에 침입한다는 계획을 세운다.

사람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 가게에 ‘선셋 제과점’이란 간판을 달고 프렌치가 직접 만든 쿠키를 판다. 의외로 입소문을 타고 손님이 늘어 프렌치는 사촌 메이를 직원으로 채용한다. 두뇌와 체력 모두 무능력한 레이 일당의 작업은 답보상태지만 쿠키 장사가 불티나자 모두 가게 일에 매달린 끝에 1년 뒤 선셋은 동종업계 1위로 올라선다.

졸지에 엄청난 부자가 된 레이와 프렌치의 생활은 상전벽해가 됐다. 너른 집안엔 으리으리한 골동품, 미술품, 악기 등이 즐비하고 거실에선 문화예술계 인사들을 초청한 호화 파티가 열린다. 파티 중 프렌치는 우연히 상류층 사람들이 자신들을 교양 없는 졸부라고 비웃는 대화 내용을 엿듣는다.

그 즈음 프렌치의 주목을 끈 사람은 교사 출신 미술품 중개상 데이빗(휴 그랜트). 미술뿐만 아니라 음악과 역사는 물론 거의 모든 지식에 해박한 데이빗에게 프렌치는 교양 교육을 청하고 두 사람이 점점 더 가까워지는 동안 레이는 프렌치와 소원해진다. 대신 메이와 허심탄회하게 만나게 된다.

프렌치는 교양 수업 차 유럽의 박물관을 둘러보려는 데이빗과의 한 달 여행을 가자고 레이에게 제안하지만 레이는 거절한다. 그러자 프렌치는 기다렸다는 듯 이혼을 선언하고, 레이는 짐을 싼다. 유럽 여행 중 프렌치는 데이빗의 사업을 위해 엄청난 지원을 약속하지만 갑자기 변호사로부터 파산 소식을 듣는데.

일단 그냥 가볍게 즐겨도 꽤 재미있는 코미디다. 레이는 은행털이범 일당에게 ‘브레인’으로 통한다. 보편적 기준으로도 결코 똑똑해 보이지 않는 그가 두뇌 역할을 해내는 이 일당의 계획이 실현될 리 만무하다. 땅굴의 첫 삽을 뜰 때 수도관을 건드려 지하를 수영장으로 만들 정도다.

그뿐이 아니다. 레이가 내내 지하 도면을 거꾸로 보고 지휘한 끝에 일당이 땅굴을 완성해 지면에 올라선 곳은 은행 반대편 옷 가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수룩한 메이가 단골손님인 한 경찰에게 땅굴 파는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지껄인 탓에 결국 그 경찰에게 꼬리를 잡힌다. 그런데 그는 “쿠키 가게 프랜차이즈에 내 투자 받아 주면 눈감아 줄게”라고 제안한다.

처음에 레이의 집에 찾아온 레이의 친구들은 자꾸 쿠키를 집어먹어 프렌치의 핀잔을 듣는다. 감독의 암시다. 나중에 사업이 번창하자 프렌치는 “사람들이 맛있다고 하는 걸 예의상 그러는 줄 알았다”고 술회한다. 무엇이든 순수하고 진지하며 정성스러우면 자그마한 성과라도 이룰 수 있다는 얘기.

당시 그녀는 은행을 털겠다는 레이를 말리며 “우린 가난해도 행복해”라고 자족의 미덕을 설파한 바 있다. 영화의 큰 주제는 상류층의 가식과 졸부의 스노비즘(고상한 체 허세를 부리는 속물 혹은 그런 심리)에 대한 풍자다. 부자가 된 후 프렌치는 하인들에게 매일 에스카르고 등 프랑스 요리를 만들게 한다.

그러나 레이는 치즈 버거, 콜라, 중국 음식이 그립다. 프렌치는 연주할 줄도 모르는 하프를 집안에 들여놓고 어울리지도 않는 명품 옷을 몸에 걸치고 다닌다. 맛도 모르면서 샤토 마고 등 각종 와인을 마시지만 레이는 오직 맥주로 목을 축인다. 프렌치가 문화 강좌를 듣는 동안 레이는 친구들과 포커를 즐긴다.

과연 교양이란 뭣인가? 이 작품의 질문이다. 데이빗은 미술은 전문 분야니까 당연하고, 와인에 통달했으며 역사와 골동품에도 일가견이 있다. 음악, 연극 등 문화에서 뭣 하나 빠지는 게 없다. 그러나 정작 그에게 부족한 건 아주 기본적인 인간성이다. 제목은 ‘삼류 사기꾼’쯤 되겠다. 레이와 친구들이 아니라 데이빗이다.

우리나라 식으로 표현하자면 제비족에 다름없다. 기초적인 인성과 양심이 부재한데 아무리 박학다식하면 뭐할까? 디트리히 슈바니츠는 ‘교양’의 머리글에서 ‘우리는 교양지식을 에워싸고 있는 거룩한 붉은 광택, 위압감을 주는 효과, 개념의 안개를 모두 걷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그는 기존의 교육을 정보의 쓰레기라고 표현한다.

물론 미술과 음악, 와인과 요리 등에 해박한 사람들은 상류층 사교계에서 환영받고 각광받는다. 부자인데 교양까지 갖췄으면 존경받고 숭앙된다. 그런데 그런 신사적 태도가 가식이고, 마음속엔 저급한 욕망이 우글거리고 어긋난 우월감이 충만하다면 그 본질은 언젠가 드러날 테고 모든 건 사상누각이 될 것이다.

그래서 앨런이 마지막으로 내린 결론은 ‘솔직함’이다. 자신의 현실을 인정하고 그런 능력과 인격의 범주 안에서 오늘을 살고 미래를 설계하자는 얘기다. 데이빗의 교육으로 충분히 교양을 쌓았다고 자만하는 프렌치는 음악회 중 휴대전화를 받고 큰소리로 떠드는 바람에 눈총을 받는다. 교양은 하루아침에, 억지로 쌓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교양은 고대와 중세의 그림에서 원근법의 차이를 알아내는 게 다가 아니다.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에서 타살됨에도 순교자처럼 온화한 표정을 짓는 주인공을 그린 화풍을 평가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마라는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 당시 급진 자코뱅파였고, 그를 죽인 샤로테 코르데는 온건 지롱드파이며, 다비드는 ‘마라의 죽음’을 통해 선동하고자 하는 정치적 속셈이었다는 게 교양이다. 데이빗의 사기와 선셋의 파산은 레이와 프렌치에게 진정한 행복을 가르쳐 준다. 그건 자신들의 능력과 주특기가 어디까지인지 ‘솔직하게’ 시인하고 그에 맞춰 사는 것이다. 안빈낙도(가난해도 편안히 도를 즐김)까지는 아니더라도 안분지족(분수를 알고 만족)이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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