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1975년 영국 런던. 생리학 박사 랭(톰 히들스턴)은 세계적 건축가 로열(제레미 아이언스)이 설계한 40층 고급 아파트 25층에 입주한다. 고소득층 사람만 입주할 수 있는 데다 입주 심사마저 까다로운 이곳은 따로 밖에 나갈 필요 없이 건물 내에 모든 편의시설이 갖춰져 있고 다채로운 서비스가 제공된다.

랭은 바로 위층에 사는 아들을 둔 치명적인 미혼모 샬롯과 연인 사이가 된다. 이곳은 하층민, 중층민, 상층민 등으로 계급이 형성돼있다. 랭은 40층 펜트하우스와 옥상 정원을 소유한 로열의 부름을 받고 40층에 가고 상층민들의 파티에도 참석하지만 왠지 그들과 어울리는 게 어색하다.

외려 그는 샬롯, 다큐멘터리 PD 와일더(루크 에반스) 등이 어우러지는 중, 하층민 파티가 더 적성에 맞는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정전과 단수가 거듭되는 등 치명적 결함이 하나, 둘씩 나타나고, 하층민들의 불만은 점점 더 폭등한다. 랭은 상층에 사는 동료 의사 먼로의 CT 촬영 결과 이상을 발견하는데 먼로는 파티 중 39층에서 떨어져 죽는다.

하지만 경찰은 수사조차 하지 않는다. 하층민과 상층민의 갈등은 점점 더 고조된다. 상층민은 하층민을 지배하고자 하층민 선동자인 와일더에게 뇌엽절리술을 시술하기 위해 랭을 부르지만 랭은 거부한다. 하층민은 약탈과 폭동을 자행하는 가운데 더욱 결속력을 다지며 상층민의 압제에 맞서 싸우는데.

영화 ‘하이-라이즈’(벤 웨틀리 감독, 2015)는 누가 봐도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와 ‘기생충’이 연상될 만한 서사 구조를 가졌다. 하이-라이즈는 자본주의와 영국 제국주의를 노골적으로 나타낸다. 로열은 자신의 첨단 기술과 최상류층의 자본을 결합해 하이-라이즈라는 자본주의 공동체를 만든다.

그러나 로열의 “이 건물은 사회적 변화를 위한 시험대”라는 대사에서 보듯 자본가 등 상류층이 일반 국민들을 더욱 철저하게 통제하고 완벽하게 지배하기 위한 리트머스 시험지였던 것이다. 과연 상류층의 예상과 의도는 맞아떨어질까? 그렇지 않다. 상하 계층의 갈등과 다툼으로 건물은 황폐화된다.

그들은 ‘슈퍼마켓은 수렵과 채집하는 곳’이라고 정의 내린다. 질서 있게 차례로 계산함으로써 물건을 구매하는 게 아니라 오직 힘으로 약탈하면 되는 아수라장이다. ‘빅토리아 시대보다 위험하다’는 대사가 그걸 암시한다. 이 시대는 ‘벨 에포크’(좋았던 시절)와 연결되는 영국 제국주의 절정의 시대다.

하지만 동시에 정치적, 사회적 개혁이 시작됐고, 노동조합 운동이 정치세력화된 세상이다. 그러니 자본가(권력자, 귀족)들에겐 위기의 시대였고, 하이-라이즈의 하층민의 제 목소리 내기는 상층민에겐 위협이었던 것이다. 상층민 유명 여배우는 살 것도 없는데 돈 쓰는 게 취미고, 제가 먼저 사람들을 붙잡고 사인을 해주겠다고 나댄다.

상층민들은 중세의 의상과 가발을 갖추고 파티를 열고 유일하게 말끔한 수트를 입은 랭을 이방인 보듯 무시한다. 하층민들은 상층민들을 광기와 자아도취에 휩싸였다고, 자신들은 그들의 생체 로봇이라고 판단한다. 와일러의 아내 헬렌의 방에는 노골적으로 커다란 체 게바라의 그림이 걸려있다.

미혼인 랭은 새롭게 시작하는 동시에 미래를 보고 투자하는 개념으로 하이-라이즈에 입주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3달이 지나도 그의 방은 채 뜯지 않은 상자들로 그득하다. 자본주의를 못 믿는 것. 스스로 모더니스트라는 상층민의 수장 로열은 랭을 자신들의 세계로 끌어들이려 하지만 그의 모더니즘은 상층민의 보수주의와 부딪친다.

건물은 최첨단, 최고급이라는 수식에 어울리지 않게 을씨년스럽게 짙은 회색이다. 현대 문명과 자본주의의 서늘함을 대놓고 무채색으로 표현한다. 랭은 페인트를 사서 자신의 집을 칠하는데 조금 밝긴 하지만 여전히 회색이다. 당분간 자본주의는 절대 해체될 수 없다는, 그래서 영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을 의미하는 메타포다.

상층민은 하층민을 돈만 밝히는 돈벌레로, 하층민은 상층민을 자기 틀 안에 갇힌 내면적 수감자로 각각 인식한다. ‘기생충’이다. 상층민은 정전의 원인을 하층민의 전기 과다 사용으로 돌린다. 과연 전기는 어느 계층이 더 많이 소비할까? 로열의 개인 엘리베이터는 복층 거울이라 한 사람의 상이 무한대로 그려진다.

이는 로열과 랭으로 대변되는 현대 지식인의 고뇌와 갈등을 뜻한다. 지성과 이성의 기준으로는 평등한 인권, 그리고 과학과 지식과 혜택의 고른 분배를 통한 공리주의적 방향이 바람직한 건 알고 있지만 정치, 경제적 상황이 유토피아와 엄발나기에 내면이 합일하지 못하고 여러 갈래로 갈라진다는 걸 의미하는 분열 자아이자 복사 자아다.

시간이 흐를수록 하이-라이즈의 무질서화와 황폐화는 극점으로 내달리는 듯하지만 외려 하층민들은 널브러진 시체들과 쓰레기 더미 속에서도 표정이 점점 온화해진다. 고도의 문명과 체계화된 이념이 강제한 질서에서 자연으로 회귀할 때 인류는 인간적으로는 후퇴하지만 생명체로서는 자연스러워진다는 뜻. 마지막 ‘국가가 주도하는 자본주의냐, 국가의 통제에서 벗어난 자본주의냐?’에 대한 질문이 주제인 나름대로 심도 있는 스릴러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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