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윌리엄 프리드킨이 호러의 바이블 ‘엑소시스트’(1973)로만 기억되듯 ‘베티 블루 37.2’(1986)는 프랑스 영화계 누벨 이마주의 대표 주자 장 자끄 베넥스의 일생의 역작이다. 아름다운 영상미를 배경으로 치명적인 사랑이 펼쳐지고, 때론 광기가 넘실대면서도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연인들의 세계가 전개되다 충격적인 결말로 매조진다.

해변가 방갈로에 얹혀사는 30살의 작가 지망 배관공 조그(장 위그 앙글라드)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관능적이고 즉흥적인 19살 베티(베아트리스 달)와 사랑에 빠져 함께 산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주인이 500채 방갈로에 페인트칠을 하라고 강압하자 베티는 주인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방갈로에 불을 지른 뒤 조그와 함께 도망친다.

베티는 연인 에디와 함께 호텔과 피자 식당을 운영하는 친구 리사에게 의탁한다. 네 사람은 하루 종일 레스토랑에서 바쁘게 일하지만 폐점 후 집에서 그들만의 테킬라 파티를 벌이며 하루하루를 즐겁고 행복하게 산다. 그러던 중 에디가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듣자 나머지는 에디의 고향 가는 길에 동행한다.

장례식이 끝나자 에디는 조그에게 그곳에 머물며 엄마가 운영하던 피아노 상점을 대신 맡아줄 것을 제안한다. 조그와 베티는 친구의 깊은 배려에 환호한다. 베티는 조용한 이곳에서 조그가 제대로 된 작품을 쓸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마냥 행복하던 그들의 일상은 베티가 임신을 함으로써 절정에 이르는 듯한데.

베티는 자유분방하기에 치밀한 계획이 없다. 권력이나 금력에 굽힐 줄 모른 채 자신만의 느낌과 감정대로 행동한다. 다소 이기적이었고, 적당한 현실주의자였던 조그는 작가로서의 재질이 충분하다는 베티의 충동에 고무돼 점점 더 베티에 동화될 뿐만 아니라 베티의 광기마저 이해하고 감싸주는 보호자로 성장한다.

인트로부터 두 주인공의 베드신이 펼쳐지는 등 과감한 노출이 빈번하게 등장하지만 포르노적인 느낌을 주기보다는 적응하기 힘든 허위와 가식과 이기주의의 세상에서 숨을 쉬어야만 하는 순수한 두 영혼의 인내의 호흡과 번뇌의 몸부림으로 읽힌다. 화성에서 온 남자와 금성에서 온 여자의 고군분투 지구 행성 적응기!

이 작품은 사랑에 관한 영화가 거론될 때마다 거의 빠지지 않는 필독서로 손꼽힌다. 두 사람은 서로의 결점을 지적하거나 수정하려 하지 않고, 감싸주고 이해해 준다. 사람은 누구나 결점이 있기 마련이다. 조그의 친구인 식료품점 주인은 착하지만 결벽증이 심하면서도 바람둥이고, 그의 아내는 색정광이다. 연인이나 부부랍시고 그걸 지적하고 고치려 들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다. 사랑을 할 나이라면 학교에서 배울 건 웬만큼 배웠다.

두 사람의 공통의 목표는 조그의 작가 데뷔다. 조그를 만나기 전 베티는 식당에서 일했는데 온갖 주정꾼은 물론 심지어 주인에게까지 성추행을 당했다. 그녀의 생엔 목표의식도 희망도 없었다. 하지만 조그를 만나 참된 사랑을 깨달았고, 그의 작가로서의 잠재력을 발견하곤 희망이란 걸 발굴했다.

이 작품은 사랑과 더불어 창작의 고뇌에 대한 감독의 자전적 얘기다. 더불어 출세를 위한 타락과 이기주의와 편법이 범람하는 자본주의와 상업주의 세상에 대한 메타포다. 감독은 필립 지앙의 소설 ‘37.2도 아침’을 만남으로써 이 훌륭한 걸작을 만들었지만 전후로는 필적할 만한 작품이 없다.

그만큼 이 소설을 만나고, 이 작품을 만들기까지 엄청난 고통과 압박을 이겨냈다는 뜻이다. 이 작품 이후 조그와 같은 창작의 진통, 혹은 베티와 같은 상상임신의 복통을 겪을 것이란 암시다. 베티는 피임 루프를 장착했지만 임신했다고 착각한다. 조그의 출판될 수 있을 만한 작품을 탄생시키고픈 욕망의 은유다.

결국 상상임신이었음을 깨달은 베티는 모든 허망한 감정을 자신의 광기의 에너지로 환원시켜 급속도로 미쳐가더니 결국 한쪽 눈을 도려낸다. 자신이 원하는 건 되는 게 없다고 자조하면서. 세상을 바라보기 싫은 것이다. 그렇다. 순수한 영혼이 퇴락하고 피폐한 이 세상에서 바랄 수 있는 건 많지만 잡을 수 있는 건 포기 아니면 도피다.

그동안 계속 출판사로부터 퇴짜를 맞았던 조그는 베티를 위해 여장을 한 채 강도 짓을 하기도 하고, 또 그 여장을 하고 베티를 문병하기도 한다. 그러던 중 안정제를 맞고 온몸이 묶여 거의 코마 상태의 식물인간과 다름없는 베티를 발견하곤 뭔가 깨닫는다. 베티에게 이 세상은 온통 불친절과 폭력뿐인 것을.

에디의 모친의 집에서 살기로 한 첫날밤 베티는 망자의 침대가 찜찜하다며 조그를 통해 매트리스를 밖에 버린다. 그러자 새벽에 한 청소부가 갈고리 손으로 매트리스를 찍어내며 분노를 표출한다. 이는 분업화와 자동기계화로 노동자를 쫓아내고 노동력을 갈취하는 산업사회에 대한 무참한 알레고리다.

장 자크 루소가 도덕의 기초로 본 건 인간의 감수성이었다. 베티는 럭비공처럼 제멋대로인 듯하고, 막돼먹은 듯하지만 감수성이란 준거틀은 있었다. 그녀의 규준은 감성과 감정이었다. 집착하는 삶이란 게 얼마나 덧없는가를 깨달음으로써 이제 출산(작품 완성) 준비가 된 조그는 베티를 편안한 곳으로 떠나보낸 뒤 글을 쓴다. 그런 그를 고양이가 만족스럽게 바라본다. 베티의 영혼의 형상화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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