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네덜란드 영화 ‘블랙 위도우: 파이널 챕터’(디어드릭 반 루이옌 감독, 2019)는 마블의 블랙 위도우와는 전혀 상관없다. 할리우드의 상업적 구문론과는 다소 결이 다르지만 꽤 탄탄한 플롯이 색다른 재미와 완성도를 보장한다. 캐나다의 한 식당에서 일하는 마리아는 전 남편 지미에게 폭행당하는 동료 티나를 도와준다.

전과자인 지미는 친구를 대동하고 나타나 권총을 꺼내들고 그 과정에서 마리아는 지미를 죽인다. 이 사건을 한 손님이 찍어 SNS에 올리고 전 세계의 뉴스가 보도하자 마리아의 진짜 정체가 밝혀진다. 그녀는 네덜란드 마피아 조직의 두목으로 살인, 마약 판매 등의 중범죄를 저지른 카르멘으로 2년 전 죽음을 위장한 뒤 은거해온 것.

그녀를 오랫동안 추적했던 형사 짐이 캐나다에 와 그녀를 인도해간다. 그녀에겐 사랑하는 루시엔, 나탈리, 보리스 등 2남 1녀의 자식과 노모가 있다. 경찰에겐 카르멘의 범죄를 입증할 증거도, 증인도 없다. 오로지 자백만이 그녀를 옭아맬 수단이다. 카르멘은 수갑을 차지 않은 채 가족과 만날 것을 조건으로 자백을 약속한다.

너른 올림픽 경기장에서 카르멘과 가족의 재회가 이뤄지고 경찰은 철통같은 경비 체계를 펼친다. 카르멘은 가족과 옛 동료인 루터 등의 도움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하는 듯하지만 간발의 차이로 실패한다. 한편 멕시코 카르텔 소속 가브리엘이 나타나 카르멘의 옛 부하 베리로부터 중화기를 구매한다.

가브리엘은 변호사의 가족을 인질로 잡고 카르멘에게 검사 측 증인을 죽일 것을 명령한다. 가브리엘은 임무를 수행하지 않을 경우 카르멘의 가족을 차례차례 죽이겠다고 협박한 것. 첫 번째 미션에 실패하자 가브리엘은 카르멘의 어머니를 죽인다. 카르멘은 자식들에게 멀리 도망가라고 하지만 외려 그들은 카르멘을 탈출시키는데.

보편적인 기승전결의 클리셰가 아니라 집중하지 않으면 재미를 못 느끼겠지만 그래서 몰입해 관람하면 색다른 스릴을 만끽할 수 있다. 몇 군데 맥거핀의 떡밥도 있고, 미스터리적 흥밋거리도 탑재했다. 카르멘은 범죄 집안에서 자랐다는 소개가 있다. 이 영화를 즐길 만한 단서다.

남편이 죽자 그녀는 조직을 물려받아 더욱 대담하고 치밀한 수법으로 사업을 키워나간다. 멕시코 카르텔과의 연계는 필수. 인트로에서 멕시코 카르텔 두목의 대저택으로 관이 배달된다. 남편의 주검을 본 여자는 그 자리에서 머리에 총을 쏘고, 어린 큰딸은 여동생의 눈을 가린다. 카르멘 가족의 불행의 단초.

나탈리는 카페를 운영하며 그림을 그리고, 보리스는 자동차 정비사로 일하는 등 카르멘의 자식들은 평범하게 살았다. 그러나 러닝타임이 흐를수록 그건 함정이었다는 게 드러나면서 큰 재미를 준다. 카르멘은 비록 어머니는 잃었지만 자식과 옛 동료들의 도움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옛 부하인 베리의 배신으로 전 가족이 큰 위기에 빠진다.

여기서부터 하이라이트다. 과연 가브리엘은 뭣 때문에 카르멘과 그 가족들을 죽이지 못해 안달인가? 과연 인트로에 나온 한 남자의 죽음은 뭣을 의미하고, 그게 카르멘 가족과 어떤 상관이 있는가? 과연 그 남자는 왜 죽었는가? 그런 퍼즐을 맞춰나가는 사이에 어느덧 관객들은 영화가 집중하는 게 가족이라는 걸 깨닫고 눈시울이 뜨거워질 것이다.

가브리엘에게 붙잡힌 카르멘의 어머니는 “난 자식보다 오래 살 생각 없다"라며 자신의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카르멘이 2년간의 잠적 끝에 존재가 드러났을 때 가장 두려워한 것은 자식들이 느낄 배신감이었다. 그만큼 그녀에겐 삶의 모든 가치관이 오로지 자식이었다.

잔악한 범죄자로 살아온 그녀는 자식들에게 말한다. “알고 보니 난 자랑스러운 엄마였다. 자식들을 이렇게 멋지게 키웠으니까”라고. 영화는 그녀의 행동을 영웅시한다거나 합리화하려 들지 않는다. 다만 그런 가정에서 태어났기에 ‘가업’을 물려받을 수밖에 없었다는 논리가 그녀와 가족, 그리고 후반의 반전의 인물을 통해 펼쳐지는 건 다소 불편할 수도 있다.

그건 고대 그리스 철학부터 성립된 양가성인 아프리오리(선천적)와 아포스테리오리(후천적)를 말한다. 바로 수 세기 전까지만 해도 전성설이란 비과학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사상이 있었지만 그게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의 후성규칙이나 다윈의 ‘진화론’과 연결된다는 건 부인할 수 없다.

모든 생명체는 좋든 싫든, 원하든 거부하든 부모의 DNA를 물려받는다. 그래야 해당 종으로서의 한 개체를 완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갓난아이가 엄마의 젖을 빠는 본능은 우리의 DNA 내부에 이미 선험적으로 그런 지도가 그려있기 때문에 그에 따른 것. 뱀이 독 개구리를 잡아먹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

이 작품이 던지는 숙제는 인간의 운명에 대한 질문이다. 과연 선험성(부모, 선조)에 의해 우리에겐 그런 운명이 숙명적으로 주어졌는가, 아니면 후천적 경험에 의해 그런 쪽으로 스스로 진로를 결정한 경험론적 결과인가? 이 세상의 의문점에 명쾌한 ‘고르디우스의 매듭’은 없다는 열린 결말이 이 작품의 결론이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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