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영화 ‘패밀리 맨’(브렛 래트너 감독, 2000)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진정한 사랑과 그로 인해 형성되는 소박한 가정에서의 평범한 행복이라는 아주 보편적인 메시지를 담은 듯하지만 알고 나면 꽤 깊은 울림을 준다. 1987년 런던 최고 은행의 인턴십에 합격해 출국하려는 잭(니컬러스 케이지)을 연인 케이트(티아 레오니)가 만류하지만 떠난다.

2000년. 잭은 뉴욕의 큰 투자 회사의 CEO가 돼 승승장구하는 가운데 독신의 바람둥이로서 모든 면에서 풍요롭게 살고 있다. 크리스마스이브에도 야근을 한 뒤 퇴근길에 에그노그를 사러 편의점에 간다. 그런데 남루한 옷차림의 캐시(돈 치들)가 들어와 복권을 보여주며 당첨금을 달라고 하자 종업원은 복권이 가짜라며 거절한다.

그러자 갑자기 캐시는 권총을 꺼내들어 위협하고, 잭이 다가가 자신이 대신 그 돈을 지불하고 복권을 사겠다고 제안한다. 캐시가 이유를 묻자 잭은 “난 필요한 것 다 있다"라고 답한다. 그러자 캐시는 “이건 당신이 초래한 일. 이건 훔쳐보기”라는 야릇한 말을 남긴 채 사라진다.

다음날 아침 침대에서 눈을 뜬 잭은 옆에 케이트가 있는 걸 보고 기함한다. 자기가 살던 뉴욕의 최고급 아파트 펜트하우스가 아니라 뉴저지의 허름한 단독주택이다. 소녀 애니가 뛰어다니고, 갓난아이 조쉬가 울어댄다. 잭은 원래 자신의 스포츠카가 아닌 낡은 밴을 몰고 단숨에 뉴욕으로 가지만 아파트와 회사 건물 입구에서 관리인에게 쫓겨난다.

망연자실한 그의 앞에 원래 자신의 소유인 고급 스포츠카를 탄 말쑥한 차림의 캐시가 나타나더니 자전거 벨 하나를 준 뒤 사라진다. 하루 사이에 잭의 세상은 달라졌다. 그는 런던에서 1년 동안 인턴십을 수행한 게 아니라 포기하고 하루 만에 돌아왔고 의도치 않은 케이트의 애니의 임신으로 결혼했다.

케이트는 무료 인권 변호사고, 자신은 타이어 판매점에서 세일즈맨으로 일하고 있다. 싸구려 음식과 허름한 옷차림으로 살고 있으며 주말엔 동네 친구들과 볼링을 즐기는 게 고작이다. 무기력하게 포기한 채 그런 현실에 적응해 살아가는데 어느덧 그 생활이 익숙해질 뿐만 아니라 뉴욕과는 차원이 다른 행복이 넘실댄다는 걸 깨닫는다.

그러던 어느 날 예전에 다니던 투자사의 라시터 회장이 펑크 난 클래식카를 몰고 타이어 판매점에 나타난다. 잭은 증권가의 해박한 지식을 늘어놓아 라시터를 사로잡은 뒤 단숨에 투자사의 임원 자리를 꿰찬다. 그는 케이트에게 뉴욕의 고급 아파트를 보여준 뒤 이제 ‘고생 끝’이라며 이사하자고 하자 케이트는 난감한 반응을 보이는데.

‘훔쳐보기’라는 키워드가 매우 중요하다. 캐시는 신 혹은 그에 상응하는 존재자다. 전능한 존재자들이 차원이 다른 세상에서 전지적 시점으로 인간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들은 때론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기도 하고, 때론 응징하기도 하면서 우리가 알게 모르게 인간의 삶에 관여한다는 판타지 요소를 통해 참다운 행복을 묻는다.

13년 전 공항에서 케이트는 잭이 떠나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다고 예감하며 떠나지 말 것을 애원했고, 잭은 ‘1년이 지나든, 100년이 지나든 자신은 안 별할 것’이라며 철석같은 맹세를 했지만 보기 좋게 배신했다. 그는 자본주의의 유혹에 경도돼 남을 밟고 일어설수록 자신의 부가 복리 이자처럼 불어나는 데 도취했던 것이다.

만약 크리스마스이브에 편의점에서 권총을 꺼내든 캐시로부터 종업원을 구해 주지 않았더라면 그는 최소한 투자사 CEO 자리는 유지했을 테지만 뉴저지에서와 같은 남편, 아버지,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의 참다운 행복은 영영 맛보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투자유치 실패로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졌을 수도.

월스트리트가 그런 데 아닌가? 회장은 CEO 잭에게 대놓고 “자넨 자본주의의 진정한 자랑거리야”라고 말한다. 그런 칭찬은 잭의 실적이 유지될 때의 얘기고, 만약 계속 저조해진다면 ‘자넨 자본주의의 수치’라며 단숨에 내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잭은 케이트와 사는 동안 많이 변한다. 그럼에도 회장의 스카우트에 홀린 듯 따라간 건 아직 정신 못 차렸다는 얘기.

애니는 캐시와 같은 종족이다. 인식론과 기억 빼곤 모든 게 변함없는 잭을 케이트부터 모든 사람들이 잭이라고 믿지만 애니는 안 믿는다. 그래서 애니는 잭이 가져온 자전거 벨을 자신의 자전거에 부착한 뒤 “진짜 우리 아빠 아니죠?”라고 당돌하게 묻는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백화점에 간 잭은 2400달러짜리 에르메네질도 제냐를 사겠다며 케이트의 이마에 주름 하나를 추가시킨다.

영어 제목은 ‘가정적인 남자’이지만 내용상 국어로 바꾸면 ‘행복의 조건’ 정도 되겠다. 물론 보는 사람들에 따라 고작 30대에 투자사 사장으로서 일벌레가 돼 열심히 일하고, 그 대가로 펜트하우스에서 캐비아를 먹고살며, 수시로 금발 미녀들과 원 나이트 스탠딩을 하면서 사는 게 부러울 수도 있겠다.

하지만 세월은 우리의 삶의 속도보다 빠르고, 시간은 우리의 미래에 대해 아무것도 보장하지 않는다. 뉴저지의 잭과 케이트는 원래 신혼 때 뉴욕에 살았었다. 하지만 교육 환경으로 적합하지 못했고, 이웃과의 살가운 우정은 언감생심이라 이사했다. 변두리 단독주택은 눈이 오면 제설이 귀찮기는 하지만 낭만과 이웃이 있고, 대형 애완견을 키워도 무방했다.

뭣보다 아이들의 정서에 좋았다. 케이트는 결혼기념일에 잭에서 제냐 ‘짝퉁’을 선물한다. 아무렴 어떨까? 브랜드가 중요한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어떻게 봐 주느냐가 진짜지. 케이트는 이웃들이 자신들을 무척 부러워한다고 말한다. 지금 그 집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휴일을 보내며 늙어간 뒤 나중에 손주들이 찾아오면 바비큐 파티하면서 사는 게 꿈이라며.

인생이란 뭣일까? 행복의 척도는 뭘까? 그런 게 궁금해질 때 이 영화는 감격스러운 눈물, 콧물로 명쾌한 감동의 해답을 줄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최소한 돈에 관한 한 극적인 반전은 없거나 제한적이다. 출세와 돈을 위해 살 것인가,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을 위해, 그리고 나를 위해 살 것인가? “계획 때문에 행복해지는 게 아니라 우리라서 행복해지는 것”이라는 명제는 형이상학의 해답 같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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