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폭풍 속으로’, ‘허트 로커’의 캐스린 비글로가 남자보다 더 남자‘들’의 심리를 훨씬 많이 알고 그런 내면의 외화에 탁월한 솜씨를 보여 각광받는 여류 감독이라면 ‘섀도우 클라우드’의 중국계 뉴질랜드인 로젠느 리앙 감독은 페미니즘을 가장 거칠고 재미있는 액션으로 은유하는 작가로서 빛을 발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43년 뉴질랜드 오클랜드의 연합군 공군기지. 막 이륙하려는 폭격기에 영국 공군 소속 여군 비행장교 개릿(클로이 모레츠)이 탑승한다. 그녀는 라이거트 소령의 비밀 임무를 수행 중이라며 묵직한 가방 하나를 퀘이드 하사에게 맡기며 절대 개봉하지 말 것을 신신당부한다.

여자를 무시하는 남자 군인들은 개릿을 기체 하부의 터릿으로 내려보낸다. 남자들은 그녀를 소재로 성적인 대화를 일삼고 스피커를 통해 이를 들은 그녀는 통쾌하게 응수한다. 그녀는 비행기 외부에서 터릿 안으로 침투하려는 한 마리 괴수와 다투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일본 정찰기가 나타난다.

지휘자인 리브스 대위의 명령이 떨어지기도 전에 개릿이 중화기로 순식간에 일본기를 격추시키자 남자들은 놀란다. 개릿의 정체가 의심스러운 리브스는 그녀에게 정체를 추궁하는 한편 가방 안에 뭐가 들었는지 확인하려 한다. 하지만 군법회의에 회부되는 게 두려운 퀘이드 하사는 대위의 행위를 말린다.

그렇게 내부적으로 분열이 일어나는 사이 일본 전투기 3대가 등장하고, 괴수는 비행기 내부에 침투해 엔진을 뜯어내는데. 할리우드 스타 중 유난히 한국에 친화적인 모레츠가 ‘원 우먼 쇼’ 액션을 펼친다는 점에서 일단 국내 관객은 호감을 가질 법한데 다소 과장되긴 했지만 ‘에이리언’의 시고니 위버에 못지않은 페미니즘적 카타르시스를 준다는 점에선 긍정적이다.

첫 번째 흥밋거리는 개릿의 정체와 ‘임무’다. 아일랜드계 영국 공군 비행장교라고 하지만 발음이 어색하다. 군인이라면서 계급도 안 밝힌다. 특히 가방 안에 든 ‘기밀’이 무엇인지가 가장 궁금하게 만든다. 그런 퍼즐은 중간 이후에 차차 풀린다. 하지만 끝까지 괴수의 정체는 설명해 주지 않는다.

다만 대놓고 그렘린이라고 말하긴 한다. 조 단테 감독의 영화로 널리 알려진 그렘린은 ‘기계에 고장을 일으키는 것으로 여겨지는 가상의 존재’를 뜻한다. ‘에이리언’이 광활한 우주를 배경으로 하는 데 비해 남태평양 상공이라는 다소 협소한 공간에서 벌어지긴 하지만 개릿의 액션만큼은 강렬하고 공격적이라는 점에서 재미는 보장한다.

즉, 이 영화는 철저하게 페미니즘은 물론 인종차별 반대의 포스트모더니즘을 기치로 내건다. 폭격기 안의 다수의 남자들은 단 한 명의 여자를 놓고 일방적으로 성추행의 대사를 쏟아낸다. 영국 여군 중 99%는 레즈비언이고 1%는 창녀라는 식이다. 그렘린은 안타고니스트인 동시에 가치전도의 알레고리다.

그렘린이 고장 내려는 기계와 비행기는 바로 기존의 체제다. 굳이 그렘린이 어디서 왔고, 어떻게 탄생했는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 이유다. 이 영화는 남자 대 여자, 보수 대 진보, 보편 대 특수 등의 이항대립을 철저하게 반대한다. 제3의, 제4의 세계를 무한하게 상정한다. 그렘린은 그런 복합적인 상징이다.

에이리언은 자신이 숙주로 삼기 위해서 혹은 알을 낳기 위해 사람을 사냥한다. 그런데 그렘린은 그런 아무런 생존의 이유도 없이 개릿의 가방을 탈취하려 하거나 군인들을 죽이려 한다. 기존의 낡은 관습과 기득권 세력은 그저 습관적으로 약자들을 업신여기고, 지배하려 한다는 걸 은유하는 설정이다.

남자들은 개릿을 도도새에 비유한다. 네덜란드인들이 아프리카 남동부 모리셔스 섬을 지배하면서 17세기 말에 멸종시킨 날지 못하는 대형 조류가 도도새다. 사람들은 도도새를 그저 손쉬운 단백질 공급원으로만 생각했을 뿐 동등한 생명체로 인정하지 않았다. 도도새의 전멸로 도도나무 역시 곧 절멸한다.

남성은 여성을 그저 성욕의 대상화로만 여기지만 여성은 남성을 돕고 아이를 낳아 육아까지 한다. 영화는 쿠키 영상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참전한 여군들의 다큐멘터리 필름을 보여 준다. 이씨조선의 경우 임진왜란 당시 권율의 행주대첩 때 아녀자들이 행주로 나른 돌로 왜군을 무찔렀다는 설화도 있다.

일본기의 폭격으로 백인들이 차례로 죽어나가고 유일한 사모아인이 조종간을 잡자 한 백인이 “저 검둥이가 조종을?”이라고 기함하는 시퀀스는 여자와 유색인종은 열등하다는 차별적 편견을 조롱한다. 그렇게 이 영화는 그런 선입견과 아집을 깨부수고 인간이라면 누구든 극한 상황에서 의외의 초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걸 웅변한다.

개릿은 후반에 용기와 액션을,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여성으로서의 본능에 충실한 성모 마리아의 표징을 보여 줌으로써 남녀 역할의 전도, 즉 니체의 ‘가치전도’를 부르댄다. 우리가 항상 당연시해 온 것은 모두 전복돼야 한다는 포스트모더니즘. 폭격기의 외벽에 쓰인 ‘The fool's errand’는 지금까지의 (백인)남성우월주의가 걸어온 길은 헛걸음(헛수고)이었다는 뜻. 모레츠의 액션은 '킥 애스'와는 차원이 다르다. 15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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