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천장지구’(찬묵싱-진목승 감독, 1990)는 1980~90년대 홍콩 영화에 열광한 마니아들에게 ‘영웅본색’만큼 잊지 못할 누아르일 것이다. 원제 ‘天若有情’(하늘에도 정이 있다면, 하늘이 정이 있는 듯하다)와 ‘연애의 순간’이란 영어 제목에서 보듯 젊은 남녀의 맹목적이고 운명적인 사랑을 강렬하게 그린다.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타이완 출신 창녀 엄마에게서 태어난 아화(류더화-유덕화). 어릴 적 엄마가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바람에 같은 일을 하는 3명의 엄마 친구들 손에 자란 그는 폭력 조직에서 일하고 있다. 조직은 보스 아래 칠형과 라바의 두 중간 보스가 있는데 아화는 칠형 패거리 소속이다.

아화는 라바 일당이 보석상을 터는 데 운전수로 고용되는데 현장에 우연히 경찰이 나타나는 바람에 그들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일부러 교통사고를 낸 뒤 도망치는 과정에서 조조(우첸롄-오천련)를 인질로 삼아 위기를 넘긴다. 라바와의 접선 장소에 조조를 데리고 나타나자 라바는 증인이니 죽여야 한다고 압박한다.

하지만 아화는 고집을 부려 조조를 구해 집에 데려다 준다. 조조는 캐나다에서 사업을 하는 엄청난 갑부의 무남독녀로 대학 진학을 앞두고 있다. 아화의 ‘절친’은 일정한 주차 구역을 맡아 세차를 하는 조직 선배 파숙(우멍다-오맹달)이다. 그는 라바 부하들로부터 구역을 내놓으라는 협박을 받고 있다.

경찰은 보석상 강도 용의자로 아화와 라바를 지목하고 아화와 조조의 뒤를 캔다. 보스가 죽자 라바는 그동안 숨겼던 야망을 본격적으로 드러내 칠형에게 도전장을 내밀고, 라바 부하들의 파숙에 대한 압박은 더욱 심해진다. 아화와 만나는 걸 안 조조의 엄마는 캐나다로 유학을 떠나라고 일방적인 불호령을 내리는데.

개봉 당시 29살, 22살이던 류와 우의 청초한 매력이 꽤나 돋보여 홍콩 영화 마니아들의 가슴에 격동의 파도를 일렁이게 했다. 더불어 이후 저우싱즈의 영화에 거의 감초처럼 등장해 웃음을 선사한 38살 우의 양념 역할이 큰 재미를 줬다. 국내 영화 ‘맨발의 청춘’(1964) 같은 이런 누아르와 로맨스의 조합은 향후 국내 영화와 드라마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 영화 최대의 수혜자는 류일 것이다. 아니 류가 이 영화의 기승전결을 책임졌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한 송이 백합 같은 고고한 조조가 쓰레기와 다름없는 삶을 사는 아화에게 호감을 느끼고 먼저 접근한다는 스톡홀름 신드롬에서 시작된 발상부터 비극은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겉으로 보기엔 남부러울 것 없는 조조이지만 아마도 그녀의 외로움은 최소한 파숙이란 친구가 있는 아화보다 더 클 것이다. 부모는 집을 비우는 날이 더 많고 엄마는 왠지 매우 차갑다. 따로 설명은 없지만 계모인 듯한 인상이 짙다. 그녀는 조조가 귀찮아 빨리 눈앞에서 치우기 위해 외국으로 보내는 게 목적인 듯하다.

생일을 맞았지만 그걸 축하해 줄 친구 하나 없는 조조는 아화에게 나타나고, 아화는 문 닫은 상점의 문을 강제로 열어 케이크를 선물한다. 조조는 “네 생일은 언제?”냐고 묻고, 아화는 “모른다”라고 답한다. 그러자 조조는 제 생일과 같은 날로 정하자고 제안한다. 운명을 함께하자는 의미다.

사실 스토리 자체는 그리 신선할 게 없다. 누아르라고 하지만 로맨스가 중심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냉소적인 면보다는 처절하거나 처연한 분위기가 주를 이루는 데다 액션은 그리 강렬하지 못하다. 다만 7년 후 중국으로의 반환이 불안하고 힘겨운 당시 홍콩 주민들의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공포감이 화면 구석구석에 잘 녹아있다.

이 작품이 개봉 당시 청춘들을 열광케 했고, 아직까지 홍콩 누아르의 전설로 남아있는 건 마치 공주와 거지의 신분 때문에 이뤄질 수 없는 비극적인 사랑에 청춘들이 진저리를 친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미녀와 야수’는 야수에게 저주만 풀리면 잘생긴 왕자로 환원될 수 있다는 반전의 소지가 있지만 이 작품엔 그런 동화적 요소는 없다. 그게 홍콩의 현실이었으니까.

류의 리바이스 청바지에 청재킷을 매치한 ‘청청패션’과 입에 달고 사는 칼스버그 캔맥주, 그리고 스즈키 모터사이클은 당시 청춘들의 대표적인 아이콘이었다. 게다가 무선호출기와 벽돌만 한 크기를 자랑하는 1세대 무선전화기까지 등장함으로써 당시엔 많은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고, 이젠 그 세대를 폭풍처럼 질주한 사람들의 추억을 소환해 줄 듯하다.

라바 패거리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대항해 칠형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아화는 라바의 가스통 공격에 뒷머리를 맞아 큰 부상을 입는다. 그의 코에선 쉴 새 없이 피가 흐른다. 이제까지 그랬듯 앞으로도 홍콩은 소속이 불분명할 것이다. 유일한 혈육인 타이완의 외할아버지 집에 일시 의탁하는 것 외엔 아무런 연고도, 기댈 곳도 없는 아화는 홍콩 자체다.

캐나다로 출국하기 전날 조조는 아화의 숙소를 찾아와 깔끔하게 청소하고 정리해 준다. 술에 취해 돌아온 아화는 “깨끗하게 정리된 건 싫다”라며 닥치는 대로 부수고 어지른다. 홍콩은 애초부터 소속이 없었다. 이 시대의 젊은이들 역시 그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채 떠도는 섬일 따름이다.

어쩌면 아틀란티스처럼 어디론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코피가 멈추지 않는다는 건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의미한다. 아화는 공항으로 가야 할 조조를 모터사이클에 태우고 늦은 밤길을 질주해 폐점한 웨딩숍의 유리창을 깬다. 결혼 예복을 곱게 차려입은 두 사람은 교회로 간다. 아화는 조조의 손가락에 구리 반지를 끼워 준다.

이 영화가 종착역으로 삼는 이념은 불가지론이다. 청춘은 내일을 알 수 없는 수취인불명의 우편물이다. 최근 홍콩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태를 보면 반환 직전의 홍콩 주민들의 불안과 근심이 우려가 아니었음이 여실히 입증된다. 과연 청춘의 열정은 기성세대에게 무작정 불편한 과열에 불과한 걸까? 이 영화는 묻는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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