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중경삼림’(1994)은 홍콩을 대표하는 예술적 감독 왕자웨이(왕가위)의 영화 중 가장 걸작이라고도, 혹은 가장 쉬운 작품이라고도 평가된다. 사복 경찰 223(카네시로 타케시-금성무)은 5월 1일 생일을 한 달 앞둔 만우절에 5년간 사귄 연인 메이에게 거짓말처럼 실연당한 뒤 매일 5월 1일로 유통기한이 정해진 파인애플 통조림을 구매한다.

4월 30일 밤까지 메이의 연락이 없자 30개의 통조림을 한꺼번에 먹은 뒤 한 바에 들러 게워 내고 술을 마시며 이곳에 처음 들어오는 여자를 사랑하겠노라 다짐한다. 그리고 나타난 마약상(린칭샤-임청하)에게 접근한다. 그녀는 오늘 인도인 서너 명에게 마약 밀반출을 시키려다 제대로 뒤통수를 맞았다.

그녀는 너무 피곤해 쉬고 싶다며 223을 호텔로 데려간 뒤 잠든다. 223은 밤새 영화 2편을 보며 샐러드 4접시를 비운 뒤 잠든 그녀의 구두를 벗겨 제 넥타이로 닦아준 뒤 나온다. 드디어 5월 1일 25살이다. 조깅을 한 뒤 단골 패스트푸드점에 간다. 사장인 삼촌의 도움 요청에 ‘알바’로 첫 출근한 페이(왕페이-왕정문)가 스쳐 지나간다.

정복 경찰 663(량차오웨이-양조위)이 평소처럼 찾아와 블랙커피를 시킨다. 그는 스튜어디스인 연인으로부터 이별 통보를 받았다. 그녀는 패스트푸드점에 그의 집 열쇠를 담은 편지 한 통을 남겼는데 열쇠는 페이가 몰래 빼가고 편지는 다시 봉했다. 페이가 편지를 건네자 663은 그냥 보관해 달라고 한다.

그 후 페이는 틈만 나면 낮에 빈 663의 집에 가 청소와 정리 정돈을 하는가 하면 작은 것부터 하나하나 세간을 바꾼다. 그러던 어느 날 페이는 663의 집에서 그와 마주친다. 페이의 마음을 읽은 663은 그녀에게 캘리포니아 바에서의 데이트를 신청한다. 그러나 삼촌이 나타나 편지를 전해 주는데.

1997년 홍콩의 중국 반환이 결정된 이후 그날이 오기까지의 웬만한 홍콩 영화는 그에 대한 두려움과 상실감을 종종 정서로 활용했는데 이 작품도 마찬가지다. 외연으로 부각된 주제는 사랑과 상실이다. 223의 비퍼 암호는 ‘1만 년 동안 사랑해’다. 100년도 채 못 살고, 연인과 뜨거운 기간은 채 10년이 될까 말까 한데 1만 년의 사랑이라니!

역설적이게도 그건 현실에서 진정한, 진득한, 진지한 사랑이 드물다는 얘기다. 거짓말처럼 만우절에 이별을 통보한 223의 전 연인이나, 다른 남자도 알기 위해 항로를 바꾸겠다는 663의 전 애인이나 모두 진지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영국의 식민지화된 홍콩은 정체성이 불분명한 공간이다.

사회주의 중국에도, 본토와 다른 노선을 걷는 타이완에도 속하지 못한 외딴섬. 그렇다고 완전한 영국인도 아니다. 아시아 국가 중 유독 홍콩에서 누아르가 발달한 건 그런 애매모호한 정체성 때문이다. 젊은이들은 미래를 설계할 수 없었다. 본토에 반환되면 어떤 정책과 사회적 구조가 될지 막막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현대 자본주의는 ‘흙수저’에게서 반전이라는 걸 빼앗아갔다. 개천에선 지렁이만 나올 뿐 용은 나올 수 없다. 이미 자본주의의 달콤한 마약에 중독된 홍콩 주민들에게 중국의 사회주의 혹은 사회주의가 잔재한 체제하에서의 삶이란 두렵거나 절망적일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안정된 공무원인 223과 663의 사랑에 대한 낭만주의 자체가 홍콩에선 사치였을 것이다.

663이 “공부할 생각이 없냐?”라고 묻자 페이는 “그저 인생을 즐기고 싶다”라고 답한다. 돈을 모아서 캘리포니아에서 재미있게 지내고 싶다고. 그게 극단적 이념 체제가 만든 폐해다. 중국은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중용을 중요시했던 나라인데 고위 지도층은 마르크스를 왜곡한 스탈린의 못된 점만 배웠나 보다.

223은 조깅을 한다. 땀을 흘려야 눈물을 흘릴 수분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마약상은 한밤에도 금발 가발과 레인코트와 선글라스를 동시에 갖춘다. 언제 비가 올지, 화창해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내일이 불확실한 홍콩의 미래를 암시한다. 가발은 영국에도 중국에도 완벽하게 녹아 들지 못한 홍콩의 정체성이다.

유통기한은 이 영화 개봉 때를 기준으로 불과 3년밖에 남지 않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홍콩의 유통기한을 말한다. 음식뿐만 아니라 사랑에도 유통기한이 있다. 생리학적으로 도파민의 활성 기간은 고작해야 2년이라는 통계가 있다. 부부가 결혼할 때의 열정을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될 때까지 간직하는 경우는 박물관에도 드문 게 현실이다.

게다가 인스턴트 음식이 늘수록 가볍고 짧은 사랑도 비례하는 이 세상이다. 사랑 가득한 행복한 삶이 목적이 아니라 행복하기 위해선 돈이 최종의 목적이라고 여기는 게 자본주의에 경도된 사람이다. ‘타락천사’처럼 이 작품에도 맥도날드가 등장한다. 대놓고 인스턴트 시대를 비판한다.

223은 파인애플 통조림을, 663은 정어리 통조림을 자주 먹는다. 그리고 그들은 깨닫는다. 자신들은 전 연인에게 이런 인스턴트 음식에 불과했었음을. 제복은 체제와 이념을 뜻한다. 사복의 223은 영국 쪽이고, 정복의 663은 중국 체제에 순응하는 쪽이다. 제복을 입는 663과 전 연인은 훗날 편의점에서 우연히 사복 차림으로 마주치자 서로 “넌 정복이 어울려”라고 말한다.

223은 자신의 전 연인을 일본의 영원한 청춘스타를 닮았다며 야마구치 모모에라고 부른다. 타케시는 일본인이지만 타이완에서 태어나 홍콩에서 활동한, 실질적으로 홍콩을 대상화한 인물이다. 페이가 캘리포니아를 꿈꿨던 건 영국도 중국도 아닌 제3의 선택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바에 나타나지 않은 건 거기선 비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년 만에 캘리포니아로부터 제복을 입은 스튜어디스가 돼 돌아온 건 앙시앵레짐(구체제)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민초에 불과한 홍콩인을 의미한다. 첫 번째 에피소드가 비극이라면 두 번째는 해피엔딩의 열린 결말이 엿보인다.

으레 그렇듯 스텝 프린팅 기법, 핸드헬드 카메라, 레드와 옐로 계통의 강렬한 색채, 그리고 빠른 컷으로 조금은 난해한 그림이 펼쳐지는데 마마스&파파스의 ‘California dreaming’ 등 삽입곡이 절반의 역할을 해낸다. 특히 후반부는 마치 왕페이 주연의 뮤직비디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녀의 매력을 크게 부각시킨다.

제목은 중국 본토의 충칭의 숲인데 홍콩에 있는 충칭 멘션을 뜻한다. 캘리포니아 바 같은 상징적 의미. 희망도 내일도 앙망할 수 없는 청춘들이 기신기신 하루하루를 무기력하게 보내는 내용들은 섬뜩하다. 얼마나 외로웠으면 223은 유통기한에 집착하고, 663은 집안의 모든 것들을, 심지어 집조차 자신이나 친구로 대상화할까?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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