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역설의 거장’ G. K. 체스터턴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목요일이었던 남자’(발라즈 주슈트 감독, 2016)는 원작을 왜곡했다는 비판을 받은 데다 다소 난해하지만 깊게 음미하면 꽤 심오한 담론을 느낄 수 있다. 시골 성당의 신부 스미스는 헌금 수금원에 불과하다는 자괴감과 더불어 솟구치는 성욕 등에 혼란스러운 나날을 보낸다.

어느 날 고해성사를 하러 온 한 창녀의 유혹에 못 이겨 그녀와 관계를 맺으면서 그간 빼돌린 헌금을 모두 빼앗긴 뒤 성당에 불을 지른 죄로 로마의 사길리아 수도원에 수감돼 성직을 박탈당할 위기에 처한다. 그의 과거를 알고 있는 바티칸시국 정보국 요원 찰스가 나타나 복권을 전제로 교황을 암살하려는 조직에 잠입하라고 제안한다.

스미스는 토요일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를 리더로 한 5명의 조직에 합류해 목요일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찰스는 조직의 진짜 리더는 일요일이라며 그의 정체를 알아내라고 닦달하지만 스미스는 조직을 아무리 샅샅이 훑어봐도 일요일이라는 존재는 없고 토요일이 리더라고 보고한다. 스미스는 토요일과 사랑에 빠진다.

그런데 시제는 현재와 1942년을 넘나들고 그 아나키스트 조직은 베니토 무솔리니를 암살하고자 폭탄을 만든다. 게다가 찰스는 무솔리니 직계 비밀경찰의 수장으로서 나타나는 등 현실과 꿈의 경계를 넘나드는 세상이 펼쳐진다. 스미스는 사랑을 좇아 조직에 충성할지, 아니면 복귀를 위해 토요일을 배신해야 할지 혼란에 빠진다.

그 가운데 찰스는 스미스를 ‘잭’이라는 후미진 구석의 허름한 바에 데려가고 잭이라는 이름의 장님 주인장은 두 사람의 정체를 한눈에 알아본다. 토요일 조직은 공원묘지에서 사이비 종교 같은 의식을 통해 멤버 중 월요일을 희생시키고, 스미스는 조직을 쫓아온 비밀경찰에 쫓기다 총에 맞는데.

이 미스터리 스릴러는 현재와 ‘일 두체’의 파시즘의 시대, 종교와 의지, 체제와 자유, 이념과 개별자 등의 이항대립을 통해 인간다운-그게 무엇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삶과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갑자기 무솔리니의 파시즘이 궤멸을 향해 가던 1942년으로 가는 SF 형식의 차용은 다소 불친절하지만 개연성은 충분하다.

이 영화가 외치고 싶은 주장과 연계돼 있기 때문. 그건 종교의 허망함이다. 일부 종교인의 무소불위의 권력과 종교적 신비주의를 독재 권력과 동일선상에 놓고 비판하는 것. 스미스는 겉으로는 성경의 가르침을 설파하지만 그걸 통해 걷은 헌금 중 상당한 금액을 횡령해 자신의 비밀 금고에 차곡차곡 모아두고 있다.

뿐만 아니라 끓어오르는 성욕을 못 참고 자위행위를 하는가 하면 고해성사를 하는 창녀에게서 성욕을 느낀다. 그는 감옥에서 10년간 근무한 적이 있고, 중범죄자인 형과도 매우 친하게 지냈었다. 즉 그의 내면엔 폭력성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 매일 아침 기도를 하지만 결국 그의 갈증을 해소해 주는 건 잭 다니엘 같은 거친 술과 담배이다.

토요일은 원래 수녀였다. 아프리카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중 동료 신부에게 겁탈당한 뒤 그를 살해한 죄로 사길리아 수도원에 수감됐다 탈출해 무정부주의 운동에 뛰어든 것. 그녀는 “우린 저항군, 변화의 전사”라며 “신도, 체제도 없다. 무정부주의는 수단일 뿐 두뇌를 무기로 미신을 없애려는 것”이라고 외친다.

역사 이래 인류는 저마다의 집단을 만들고 종교와 정체로써 그 체제를 유지해 왔다. 바꿔 말하면 지도자 및 그 언저리의 권력자들이 종교와 정체로써 다수의 국민들을 장악하고 각종 이권을 챙겨 왔다. 성서는 법전이나 교과서가 아니다. 게다가 한 사람이 집필한 것도 아닌 데다 고대어부터 각종 국가의 언어로 변역됐다.

즉, 그 텍스트에 담긴 뜻은 명석판명하지 않고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상징적, 비유적 가능성을 무한히 품고 있다는 것. 그러나 분명한 건 기독교 발생 이래 종교적 권력자 전부가 예수의 가르침대로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마저 사랑하며, 금욕적이고 검소한 생활을 해온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 영화는 신이 있다거나 없다고 단언하지 않는다. 기독교가 나쁜 종교라는 뜻도 전혀 담고 있지 않다. 다만 적지 않은 종교적 지도자들이 타당한 설명 없이 맹목적인 믿음과 희생만 강요하는 데 대해 논리적으로 따질 따름이다. 대부분의 종교는 현실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기보다는 내세의 구원과 안락을 위한 믿음과 희생을 요구한다.

체스터턴은 1936년에 죽었으니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을 읽었을 리 만무하다. 그보다는 외려 도킨스가 원작 소설을 읽었을 가능성이 현실적이다. 이 영화는 신의 존재 여부를 따지는 게 아니라 ‘믿음이란 무엇을, 왜, 어떻게 믿어야 할지 중요한 게 바로 우리네 삶’이라는 식으로 ‘만들어진 신’을 완곡하게 잇는다.

대놓고 펠라기우스(354~418, 영국)를 거론하는 게 대표적이다. 펠라기우스는 로마에서 수도 생활을 했지만 원죄, 세례, 그리스도의 구원 등을 부정하는 펠라기우스 설을 제창하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르대는 바람에 성 아우구스티누스 등으로부터 맹렬한 비난을 받은 끝에 종교회의를 통해 이단으로 규정됐다.

이 영화는 플롯도, 편집도, 연출마저도 다소 갈지자를 그리지만 끝부분에 가서 일요일, 토요일, 찰스의 정체를 드러냄으로써 체스터턴과 감독의 의도가 비교적 명확해지는 놀랄 만한 반전을 경험하게 해 준다. 과연 사람들은 종교를 왜 만들었을까? 아니면 종교는 왜 우리의 삶에 개입했을까? 현세는 힘들고, 죽음은 두려우니, 내세에서 영원히 행복하고자 함에 종교의 목적이 있을까?

‘영혼불멸’을 주장한 플라톤과 그걸 ‘도래적 존재’라는 어려운 말로 비틀어 계승한 하이데거가 각광받은 배경엔 종교의 신비주의적 마력과의 연관이 없을까? 예수보다 먼저 에피쿠로스는 최대한의 검소한 생활로 정신적 만족을 추구하자는 쾌락주의를 설파했다는 사실을 적지 않은 사람들은 잘 모른다.

스미스가 마지막에 보여준 태도가 바로 종교의 가장 큰 미덕이 아닐까? 왜 하느님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라는 각기 다른 종교를 만들고(생기도록 묵인하고), 그들끼리 반목하도록 방치했을까? “한 사람의 망상은 광기에 그치지만 다수의 망상은 종교”라는 마지막 대사는 많이 들어본 명제이지만 큰 여운을 남긴다. 나치즘이나 파시즘이 사이비 종교와 뭐가 다를까? 목요일은 유대교나 기독교를, 토요일은 사탄을 상징하기도 한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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