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개 같은 내 인생’(1985), ‘길버트 그레이프’(1993), 그리고 비교적 최근의 ‘베일리 어게인’(2017)까지 라세 할스트롬 감독은 관객을 울리는 재주가 탁월하다. ‘세이프 헤이븐’(2013)은 그런 그의 주특기가 남녀 간의 사랑이라는 소재와 미스터리 스릴러라는 장르적 특성과 잘 어우러지는 작품이다.

에린(줄리언 허프)은 알코올중독자인 남편 케빈(데이비드 라이온스)의 폭행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다가 우연히 손에 잡힌 칼로 그를 찌른 후 무작정 도망친다. 그녀가 도착한 곳은 한적한 해변 마을. 케이티로 이름을 바꿔 식당에 웨이트리스로 취업하고, 숲속 한적한 곳의 아담한 집을 얻는데 웬 여자가 기웃거린다.

조(코비 스멀더스)라는 그녀는 자신도 이곳에 정착한 지 얼마 안 된다며 친구가 되어 준다. 케빈은 에린의 친척 펠먼 여사를 압박하지만 그녀는 모르쇠로 일관한다. 알렉스(조쉬 더하멜)는 수년 전 아내를 암으로 잃고 아들 조쉬, 딸 렉시를 키우며 삼촌 로저와 함께 시외버스 정류장 앞의 편의점을 운영한다.

케이티는 페인트를 사러 편의점에 왔다가 렉시와 친해진다. 알렉스는 무겁게 페인트를 들고 가는 케이티가 안쓰러워 제 차로 집까지 태워 준 인연으로 가까워진다. 그는 거듭 사소한 것까지 챙겨 주다가 급기야는 자전거를 선물한다. 하지만 케이티는 늦은 밤 집 앞에 자전거를 놓고 간 행동에 불안해하며 돌려준다.

그러자 조는 호의를 무시한 건 이 마을 정서에 안 맞는다며 케이티에게 충고하고, 자신이 케빈 때문에 지나치게 예민하다는 걸 인정한 케이티는 알렉스에게 사과한다. 알렉스는 카누를 타자고 제안하고 그렇게 두 사람은 연인 사이로 발전한다. 펠먼 부인이 에린의 소재를 알고 있다는 증거를 발견한 케빈은 에린의 ‘세이프 헤이븐(안식처)’을 알아내는데.

마지막 충격의 엔딩 시퀀스를 접하기 전까지는 할스트롬은 역시 남녀 간의 사랑에 대해서는 그다지 큰 재주가 없다고 다소 실망할 수도 있다. 죽은 아내를 못 잊지만 두 아이를 키우며 살아야만 하는 알렉스와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자 하는, 상처가 쉽게 아물지 않는 에린의 사랑은 그리 신선하지는 않다.

여기에 제정신이 아닌 알코올중독자 케빈이 형사라는 본분은 망각한 채 오직 아내에 대한 분노와 집착 때문에 그 직업을 오용, 남용하는 스릴러를 결합한 게 그나마 이색적인데 정작 케빈의 행동은 호러 장르만큼 위협적이지는 못하다. 오히려 시골 마을의 풍광과 특히 두 주인공이 데이트하는 호수의 경치가 관객의 눈을 호강시킨다.

알렉스에겐 집과 편의점이라는 두 공간이 있다. 편의점의 2층은 그의 아내가 생전에 쓰던 작업실이다. 그 공간에서 가장 소중한 물건은 자신이 곧 죽을 걸 깨달은 아내가 조쉬와 렉시가 향후 성장하며 맞을 여러 가지 기념일들에 맞춰 써 놓은 여러 장의 편지들이다. 특히 조쉬는 이 작업실을 신성시한다.

케이티를 사랑한다는 걸 처음 깨달은 날 밤 알렉스는 잠을 못 이루고 작업실로 올라간다. 아마 아내에게 죄악감을 느꼈을 것이다. 이를 본 조쉬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을 침범한 아버지에게 서운함을 표시한다. 그는 평소에도 사사건건 아버지에게 반항하거나 아버지를 시험하려 드는 버릇이 있다. 마치 바가지 긁는 아내처럼.

그건 세 가족 중 엄마를 가장 그리워해서 제일 못 잊기 때문이다. 케빈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에린을 일급살인 용의자로 조작한 공문을 전국 경찰서로 전송한다. 물론 불법이다. 하지만 동네 경찰서에서 그 전단지를 목도한 알렉스는 그런 진실을 알 리 없어 에린에게 달려가 항의하며 떠나라고 외친다.

그리고 또 그는 아내의 작업실에 올라간다. 그러고는 무엇을 깨우쳤다는 듯 뛰쳐나와 배를 타려는 에린을 붙잡는다. 에린이 정착한 외딴집의 나무 바닥이 쉽게 꺼진다. 알렉스의 편의점의 한쪽 문과 지프의 뒷문은 항상 잘 안 열려 말썽이다. 그건 두 사람의 고통과 외로움, 미래에 대한 오리무중 등의 결핍을 의미한다.

알렉스는 “아내를 잊기 위해 그녀와의 추억이 깃든 곳은 일부러 피해 다녔다. 그렇게 앞만, 자식들만 보고 가다가 아내를 내가 기억해 줘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당신과 마주하는 오늘 처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됐다”라고 케이티에게 고백을 한다. 그리고 아내의 작업실에 오른 건 아내에게 양해를 구하거나 허락을 받으려는 의식이었다.

알렉스의 호의를 무시하고 거리를 두려는 케이티에게 조는 “인생에 두 번째 기회는 언제든 있어”라고 충고한다. 그녀는 또 “유럽 가 보는 게 꿈이었는데 근처에도 못 가 봤다”라며 하고 싶은 건 적극적으로 추진하라고 덧붙인다. 알렉스가 진실을 알아채자 에린이 떠나려 할 때 조는 “도망치는 건 쉽지만 비겁해. 뭐가 됐든 피하지 말고 부딪쳐 봐”라고 말한다.

평소 알렉스는 사진을 많이 찍고, 조쉬는 그런 아버지의 행동이 못마땅해 그 이유를 묻는다. 알렉스의 답은 “기억”이다. 차에 마크 트웨인의 동화 카세트테이프를 넣고 다닐 정도로 그는 자식밖에 몰랐다. 그건 곧 아내에 대한 사랑과 의리였다. ‘당신 몫까지 다해 아이들을 아끼고 사랑하며 키우겠다’라는.

모든 상황이 마무리된 후 조는 에린에게 작별을 고하며 “사진을 많이 찍어 둬”라고 마지막 충고를 한다. 사람은 기억과 레테(망각의 강)라는 양가성을 초월하려 안간힘을 쓰는 가운데 추억을 더듬으며 사는 회한의 존재자이다. 문자의 발명은 어쩌면 역사와 지식의 전승보다 추억 보존이 더 큰 동인(動因)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내를 잊지 못하는 알렉스와 남편을 지우고 싶은 에린의 처지는 전혀 상반되지만 어쨌든 그들은 오늘을 살아야 하고 내일을 기대할 여지가 있다는 점만큼은 공통적이다. 추억은 많이 쌓을수록 좋고, 기억은 사라지지 않도록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하며, 새로운 인생의 기회는 항상 열려 있다!

편지 ‘그녀에게’가 공개되는 마지막 시퀀스 하나만으로도 이 영화의 값어치는 매우 빛난다. 케빈은 에린을 제 것인 줄만 알았지 존중할 줄 몰랐다. 케이티의 정체를 안 알렉스의 첫 태도 역시 케빈과 별다를 바 없었다. 이 영화의 결론은 ‘사랑은 집착과 소유가 아니라 배려와 존중’이라는, 누구나 알고 있지만 아무도 실천할 줄 모르는 사랑의 자세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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