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리얼 스틸’(숀 레비 감독, 2011)은 그것의 홍보 카피 같은 로봇 블록버스터 액션을 기대한다면 실망할 것이다. 그럼에도 재미, 감동, 메시지 등을 고루 챙길 수 있는 웰메이드 상업 영화다. 세계 챔피언 타이틀에 도전할 정도로 촉망받는 복서였던 찰리(휴 잭맨)는 은퇴한 후 로봇 파이터 프로모터로 살아간다.

그의 코치였던 탤릿이 사망하며 딸 베일리(에반젤린 릴리)에게 물려준 건물에 세도 제대로 안 내며 빌붙어 사는 그는 빚에 쪼들리는 신세이다. 그에게 양육권 재판 출두 명령이 떨어진다. 한때 사귀었던 캐롤라인이 사망했기에 그들의 11살 아들 맥스(다코타 고요)의 유일한 양육권자로서의 자격으로.

돈 많은 노인 마빈과 결혼했지만 아이가 없는 캐롤라인의 언니 데브라가 맥스에게 남다른 애정을 보이고 있다. 찰리는 양육권을 넘기는 조건으로 10만 달러를 제안하고 마빈은 받아들인다. 그런데 마빈은 친구 부부와 함께 2달간 해외여행을 다녀올 스케줄이 있으니 그동안만 맥스를 돌보아 달라고 한다.

찰리는 한때 성적이 좋았던 일본형 로봇 노이지 보이를 사고 돈을 벌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 부풀어 첫 경기를 잡는데 맥스가 동행한다. 그러나 조종법도 제대로 익히지 못한 찰리는 참패하고, 노이지 보이는 처참하게 부서진다. 노이지 보이의 부품을 훔치기 위해 찰리는 맥스를 데리고 고철상에 몰래 잠입한다.

그러나 쏟아지는 빗물에 싱크홀이 생기고 맥스가 그리로 빨려 들어간다. 맥스는 2세대 고물 로봇 아톰의 팔에 걸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하고, 아톰을 탤릿 체육관으로 가져온다. 아톰은 과거에 로봇 파이터의 스파링용으로 제작돼 맷집은 좋지만 전투 능력은 그리 뛰어나지 않은 데다 구형 모델이다.

그런데 아톰은 덩치는 작지만 주인의 행동을 따라 하고, 말을 알아듣는 기능이 있어 컴퓨터 게임에 능한 맥스의 전술과, 찰리의 복싱 능력을 이어받아 승승장구하며 드디어 프로 리그에 입성해 첫 승까지 따낸다. 그러자 무적의 세계 챔피언 제우스를 보유한 탁 마시도 팀에서 20만 달러에 팔라고 제안하는데.

많은 천재들은 저마다의 숱한 사상을 만들어 냈지만 그 어떤 사상도 사람들을 명쾌하게 도성하도록 만들지는 못한 듯하다. 적어도 현재 진보주의와 보수주의가 가장 큰 세력으로서 맞서고 있는 형국을 보면 그렇다. 시대의 흐름에 맞춰 변화하고 또 변모시키려는 자, 구습과 통례를 지키려는 자가 대립하고 있다.

현재는 개인주의의 시대다. 그렇다고 다 이기주의자는 아니다. 자신의 행복이 우선이지만 그럼에도 가능하다면 보다 많은 사람이 고루 ‘잘 살기’를 바라는 진보주의자와 나 혼자 ‘잘살기’를 추구하는 보수주의자! 맥스를 만나기 전까지 찰리의 삶은 철저하게 후자였다. 인간이 아닌 로봇에 불과했다.

그는 거의 모든 아는 사람에게 빚을 지고 있다. 보편타당한 노동을 통해 땀의 대가를 얻으려 하기보다는 그저 투기꾼에 가까운 삶을 살고 있다. 그는 맥스의 출생도 보지 않은 채 캐롤라인에게서 떠났다. 맥스를 만나기 전까지 그의 존재에 대해 단 한 번도 고뇌해 본 적 없다. 그저 제 배만 부르면 그만!

베일리와 한때 연인이었지만 그런 그에 실망한 베일리의 마음이 먼저 떠났다. 물론 찰리는 그런 그녀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한 몸을 운신할 공간 제공자로써만 활용할 따름이다. 맥스는 찰리를 아버지라 안 부르고 이름을 부른다. 그가 아버지에게 한 첫 책망은 “필요 없는 건 다 버려요?”였다.

이 말 한마디에 찰리의 정체성이 오롯이 녹아 있다. 찰리는 매번 맥스에게 햄버거를 건네고 그때마다 맥스는 그걸 거부한다. 임기응변에 기대 인스턴트 식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을-그리고 그렇게 사는 아버지를-싫어하는 것이다. 찰리는 평소 “진짜 복싱 경기가 사라졌다”라고 한탄하곤 한다.

그러자 맥스는 “요즘은 종합격투기가 대세고, 그마저도 시시해 로봇 파이터가 대리만족을 주는 시대”라고 일깨워 준다. 그렇게 서로 등을 맞댄 채 각자의 방향으로 엄발나던 부자를 연결해 주는 건 아톰이다. 아톰은 시대에 뒤져 도태된 찰리이자, 구세대의 낭만을 이해하지 못하는 맥스를 동시에 함유한다.

아톰은 구형 모델에 작은 체구의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승승장구하며 ‘춤추는 로봇 파이터’라는 별명으로 명성을 얻는다. 맥스가 춤을 추면 그걸 따라 하기 때문이다. 이는 맥스가 구세대의 낭만을 이해하게 됐다는 걸 의미한다. 찰리는 자신의 고집을 꺾고 맥스의 부탁대로 아톰에게 복싱을 가르친다.

이토록 진보와 보수는 악수를 하며 중립의 지대를 찾아간다. 물론 이 영화 역시 완벽하진 않다. 노이지 보이를 일본으로 묘사한 데서 아시아 혐오증이 의심되는가 하면 찰리의 부활은 신 보수주의의 승리를 기원하는 듯한 뉘앙스도 풍긴다. 게다가 찰리가 갑자기 2000km를 달려와 베일리와 키스 한 번 한 뒤 되돌아가는 시퀀스는 뜬금없다.

그럼에도 온갖 결핍투성이인 우리들이 이 사회와, 모든 사람들과 화해하고, 화합할 수 있는 길은 있다는 메시지만큼은 많은 관객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다. 맥스는 결국 이모네 집에서 자랄 것이다. 하지만 찰리가 처음에 보내려던 의중과 마지막에 보내려는 의도는 완전히 다르다.

찰리는 “더 나은 삶을 살아라”라고, 맥스는 “아빠가 날 지켜 주려고 싸우기를 원해”라고 각각 말한다. 아톰과 제우스가 대결하는 마지막 시퀀스는 자본과 테크놀로지가 최상은 될지언정 최적은 아니라며 인간관계의 숭고함을 웅변한다. 그건 “인류의 통합에 대한 믿음이며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자아를 완성하는 인간의 잠재력이 휴머니즘”이라고 규정한 에리히 프롬이다. 그래서 이 영화의 결론은 ‘소유적 실존 양식’이 아닌 ‘존재적 실존 양식’이다. 대기실에 홀로 남은 아톰이 거울을 보는 시퀀스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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