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엠마 헤밍 SNS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6월 3번째 일요일인 미국의 아버지날을 맞아 데미 무어(59)가 전 남편인 브루스 윌리스(66)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시했다. 무어는 6월 20일(현지 시각) 자신의 SNS에 “이 소녀(딸들)들의 아빠의 아버지날을 축하합니다! 당신이 있어서 정말 다행입니다.”라는 글과 함께 예전에 두 사람 사이에 낳은 세 딸과 브루스가 함께 찍은 사진을 올렸다.

두 사람은 1987년 결혼해 루머, 스카우트, 탈룰라 등 세 딸을 낳았지만 2000년 이혼했다. 최소한 10년은 금슬이 좋았다는 이야기이다. 브루스는 2009년 23살 연하의 모델 엠마 헤밍과 재혼했다. 무어 역시 이혼 후 전신 성형 수술 등으로 관리를 하는 가운데 자유롭게 연애를 하며 살아왔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세 딸의 공통된 부모라는 점을 잊지 않고 여전히 좋은 관계를 유지해 왔다.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 이혼율 1위이다. 일반인은 말할 것도 없이 비일비재할 것이고 연예인 중에서도 미디어에 오르내리는 이혼 부부가 적지 않다. 일반인의 경우 헤어진 후 대부분 사이가 좋지 않다. 양육비 문제로 다투는 이혼 부부가 신문지상에서 거론되는 기사만 봐도 그렇다.

그러니 그들이 서로에게 좋은 메시지를 보내고 격려해 주는 모습을 보는 건 하늘의 별 따기일 것이다. 하지만 연예인의 경우 다투는 사례를 보는 건 쉽지 않다. 그런데 그들이 정말 헤어진 후에도 사이가 좋아서 그런 걸까? 그럴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요즘 유행하는 ‘비혼’으로 헤어진 부부라면 모를까?

설령 ‘비혼’ 부부일지라도 예전 같은 관계를 유지하기는 힘들다. 더 이상 혼인 관계를 유지하지 않기로 결심한 배경은 서로가 서로의 짐이 되든가, 어쨌든 불편하기 때문일 터이니. 결혼이라는 제도가 생긴 이래 결혼에는 상류층에는 정략적인 목적이, 그 외에는 안정된 성적 파트너의 확보와 더불어 종족 보존이라는 본능이 함유되어 있었다.

사랑이란 인류가 고대 그리스 시대에 철학을 할 줄 알게 되면서부터 모든 가치관의 최고의 척도로 숭앙되었지만 그게 진정성 깊은 남녀 관계를 맺어 주고 그걸 결혼이라는 안정된 종착역에 안착시켜 주게 된 건 20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였다. 그 이전까지는 트리스탄과 이졸데 같은 파행적 사랑이거나 혹은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비극적 사랑이 대부분이었다.

그것도 아니면 베르테르의 극단적 선택이든지. 중세의 기사도 정신은 겉으로는 페미니즘과 아가페적 사랑을 표방했지만 결국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출세의 정규 코스에 다름 아니었다. 그러나 그 기백만큼은 18세기 말~19세기의 낭만주의에 스며들면서 20세기의 사랑을 전제로 한 연애결혼이라는 현대의 결혼 풍속도를 낳았다.

그런데 왜 나날이 이혼율은 높아만 갈까? 부모가 억지로 짝지어 준 것도 아니고, 정치나 사업상의 목적으로 전략적 결혼을 한 것도 아닌데. 동물 중 사랑앵무는 평생을 딱 한 마리의 파트너와 해로한다. 그만큼 금슬도 좋다. ‘원앙부부’라는 상징성으로 알려진 원앙은 사실은 일부일처제를 지키지 않는다.

▲ 출처=데미 무어 SNS

사자와 원숭이는 대표적인 군주제 집단으로 유지되는 종이다. 기존의 리더를 물리친 새 리더 사자는 암컷들의 새끼를 모조리 죽인다. 암사자들은 반항하지 않고 새 리더를 받아들여 그의 새끼들을 낳는다. 나머지 수사자들은 짝짓기를 못 한다. 원숭이는 다르다. 리더를 제외한 수컷 원숭이들은 암컷들을 유혹해 리더 몰래 교미를 한다. 암컷들은 거부하지 않는다.

인류의 가장 인간다운 조상의 끝은 오스트랄로 피테쿠스 아파렌시스이다. 약 300만 년 전 나무 위에서 떨어져 죽은 루시의 유골로 알려졌다. 굳이 다윈의 진화론을 들먹일 필요도 없다. 즉 인간에겐 동물적 본성이 후성규칙으로 잔존해 있다는 얘기이다. 그런 사례를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몸속에 흐르는 뜨거운 피를 인지하고 속으로는 인정할 것이다. 다만 인간이기에 겉으로 가식을 포장할 따름이다.

플라톤이 소크라테스를 앞장세웠듯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결혼은 평생 계속될 우둔함 하나를 얻기 위해 단기간에 있을 수많은 어리석음을 끝내는 행위이다.”라고 말했다. 더 나아가 “둘이 함께하는 영혼의 더러움이자 보잘것없는 안락.”이라고 부연했다.

물론 인식론은 제각각이고, 또 시대에 따라 변전한다. 그런데 니체는 이렇게 외친다. ‘이 사람을 보라’라고. 이 저술은 워낙 어려워서 심지어 나치에 악용되기까지 했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즐거운 지식’이 곡해되거나 많이 안 읽힌 데 대한 부연 설명이다. 자신이 얼마나 지혜롭고 현명한지 알리는 선언이다.

낙관주의가 세상을 만만하게 볼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면, 긍정주의는 나태해지게 만들 독성을 지니고 있다. 운명론은 자포자기를 잉태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하지만 이걸 생기의 촉진제로, 활력의 심폐소생술로 활용한다면 최소한 정신세계만큼은 풍요로워질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무어와 윌리스가 보여 주는 사례는 매우 긍정적이고 발전적이며 평화적이다.

칸트는 여자에 관심이 없었지만 딱 한 번 결혼을 심각하게 생각하다가 지나치게 오래 생각하는 바람에 ‘그녀’가 다른 남자에게로 시집간 것도 모른 채 다 늙어서 청혼한 적이 있다. 니체를 보라! 니체는 단 한 번도 결혼을 생각한 적도, 여자에게 한눈을 판 적도 없이 오직 아모르파티(자기애)와 위버멘시(극복인)만을 추구하다 눈을 감았다.

브루스와 무어는 이혼 후에도 각자의 파트너와 함께 아이들을 동반한 식사 자리를 가지는 등 이혼 후 보여 줄 수 있는 가장 평화로운 모습을 자랑하곤 한다. 미국을 비롯한 유럽 선진국에서는 이혼 후에도 친구 사이로 지내는 아름다운 풍경을 종종 보여 주곤 한다. 우리나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이색 풍속도이다. 그래서 브루스와 무어의 ‘뒤끝’은 참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현재는 ‘N포세대’의 시대이다. 결혼은 강요되어선 안 된다. 이혼 역시 장려되어서도 안 된다. 그런데 부부가 이혼을 하는 상황을 서로 인정하고, 자식에게 갈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면서, 향후 그들이 상처받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만큼은 명석판명이다. 그럴 각오와 능력 등의 자격이 없다면 결혼 혹은 출산의 권리가 없는 게 현실이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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