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더 그레이’(조 카나한 감독, 2012)는 리암 니슨의 액션 활극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심오한 생철학과 실존주의 이념이 넘쳐흐른다. 오트웨이(리암 니슨)는 아내와 사별한 뒤 삶의 의욕을 잃은 채 알래스카에서 석유 시추공들을 위협하는 늑대로부터 보호해 주는 일을 하며 무미건조한 삶을 살아간다.

그는 드디어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비행기에 거친 시추공들과 함께 탑승하지만 기상 악화로 인해 깊은 산속에 추락하고 만다. 생존자는 그를 포함해 7명. 혹독한 추위도 견디기 힘든데 늑대 무리가 그들을 공격해 하나하나 죽인다. 늑대는 먹이 활동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치 사냥을 즐기는 듯하다.

산속을 헤매던 오트웨이는 벌목한 나무를 보고 절벽 건너편으로 이동하는 위험만 감수한다면 구조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해 잔존한 생존자들과 밧줄을 이용해 감행한다. 그러나 쫓아온 늑대들에게 나머지 사람들이 희생되고 드디어 오트웨이는 안전한 곳에 도착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곳은 늑대의 소굴이었으니.

영화는 오트웨이의 내레이션으로 시작된다. “내 일터는 세상의 끝. 난 정유회사의 킬러이다. 주변엔 죄다 세상 부적응자들뿐. 아내가 보고 싶다. 여기는 지옥이다. 난 저주 받은 듯하다. 머잖아 진짜 지옥에 가겠지. 글을 쓴다. 부질없는 짓이다. 어쩌다 우리가 이렇게 됐을까? 내 탓이다. 난 좋은 세상을 등졌다.”라는.

비행기를 타기 전날 밤 모두들 바에서 술을 마시고 다투는 등 소란스러운데 오트웨이 혼자 그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듯 홀로 밖으로 나간다. 낮에 늑대 한 마리를 죽였던 총구를 자신의 입속에 욱여넣는다.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 늑대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총구를 뺀다.

그건 막연한 희망이었다. 이곳은 늑대들의 영역이지 사람들의 영역이 아니다. 그런데 내일이면 자신의 영역(집)으로 돌아간다. 어쩌면 그곳에서 적응할 수도 있으리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발생한 것이다. 늑대의 영역을 침범해 녀석들을 사살한 자신이 진짜로 인간의 세계에서 인간을 위해 살 수도 있겠다는 의지의 발로이기도 하다.

그는 수시로 아내와의 행복했던 한때를 꿈꾼다. 깨어 있어도 그 환상을 본다. 가장 소중하게 간직한 건 작은 편지 한 장. 아내에게 쓴 것인데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전하지 못한. 그건 그의 정체성이자 하루빨리 죽고 싶어 하는 이유이다. 아내가 있는 곳으로 가서 전하기 위해 수시로 꺼내 보고 또 보는 것이다.

동료들을 모두 잃고 홀로 남았을 때 절망하다 못해 분노한 그는 하늘을 향해 외친다. “이 엉터리 신아! 사기꾼 같으니라고. 구경만 발고 증명해 봐. 믿어 보게. 나중에 말고 지금 당장.”이라며 자신을 구해 달라고. 그러나 이내 “됐다. 내가 하고 말지. 내 힘으로.”라며 스스로 생을 향한 의지를 불태운다.

이동 중 다리를 다친 한 동료는 스스로 낙오를 선택한다. 데려가려는 동료 둘에게 “가면 뭐가 기다리는데? 밤새 기계 돌리고 술 마시고? 저 산처럼 꽉 막힌 게 내 인생이야. 언제나 좀 나아질 수 있을까?”라고 외치며 그토록 소중히 간직한 시계를 내던진다. 그건 전날 밤 모닥불 앞에서 오트웨이가 “이 공기가 현실.”이라며 현실주의 관념론을 펼친 것과 맥락을 함께한다.

오트웨이는 또 “우리의 운명은 누가 정한 건데? 절대자가?”라고 강하게 반발한 바 있다. 영화 전편에는 유물론적 무신론이 강하게 흐른다. 생존자들은 희생자들의 지갑을 챙긴다. 유족들에게 전달하기 위해서이다. 마지막에 홀로 남은 오트웨이는 모든 지갑을 한데 모은 뒤 그 위에 편지를 얹는다.

지갑은 돈과 신용카드를 보관하기 위한 용도로 필요하지만 거의 모든 사람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의 사진을 넣는다. 바로 가족사진이다. 그 가족을 만들고 지키는 이는 신이 아니라 바로 나이다. 생존자들은 잡은 늑대로 바비큐 파티를 한다. ‘늑대는 복수하는 유일한 동물’이라는 대사와 함께.

있지도 않은 신을 믿느니 차라리 주술에 기대겠다는 도발이다. 니체, 베르그송, 딜타이, 쇼펜하우어 등의 생철학은 인간이 자연 안에 놓인 존재로서의 본능적인 욕구, 감정, 충동적 의지 등을 존중했다. 그래서 니체는 권력에의 의지를 천명하고 가치전도를 주창했다. 기존의 이성적인 가치의 전도!

또한 키에르케고르는 개인의 주체성만이 진리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사르트르는 야스퍼스와 마르셀을 유신론적 실존주의자로 규정하고 자신의 무신론적 실존주의를 언명했다. 기존의 야스퍼스 등의 실존주의는 가능태인 본질존재가 현실태인 현실존재를 앞선다고 주장했지만 사르트르는 언제나 실존이 본질에 선행한다고 명토 박았다. 왜? 인간의 본질을 결정하는 신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사르트르는 개개인의 자각적이기에 자주적인 삶의 존재 방식을 믿었다. 최소한 인간이라는 종만큼은 각 개체가 자유롭게 살 수 있고, 또 그게 운명이라고 믿었다. 물론 그래서 그게 영혼의 어깨를 짓누르는 인생의 무게이기는 하지만. 그런들 어떠하랴! 이 얼마나 열린 운명론인가? 라이프니츠의 어설픈 낙관주의적 결정론보다는 낫지 않은가!

수시로 자살을 기도할 만큼 피폐한 하루하루를 살던 오트웨이는 막상 목숨이 경각에 달한, 극한 상황에 처하자 생존을 포기하는 동료들의 회의주의의 잘못을 깨우쳐 주고, 새로운 의지를 고무함으로써 실존주의로 나아간다. 종교를 갖든, 특정한 신비적 존재를 믿든 개개인의 자유이다.

이 영화는 그런 믿음에 대한 허망함을 얘기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현실 감각을, 즉 실증주의적 실존주의를 언명한다. 오트웨이는 이제 아버지가 생전에 지은 시를 읊는다. ‘한번 더 싸워 보자. 이날 살고 또 죽자.’라고. 죽음에 대한 공포를 초월해야 진정한 실존주의로 나아간다는 교훈!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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