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출처=픽사베이

[미디어파인 청춘칼럼] 불교에서 말하는 여덟 가지 고통 중에 ‘원증회고’라는 것이 있다. 싫어하는 사람과 어쩔 수 없이 함께 지내는 고통을 뜻하는 말인데, 석가모니께서도 이것을 인간의 대표적인 고통이라고 말씀하신 걸로 미루어 보아 마음 맞지 않는 사람과 같이 있는 건 어지간히 괴로운 일인가보다. 우리를 괴롭히는 수많은 걱정거리 가운데 적지 않은 것들이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적대관계나 상하관계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애정관계나 우정관계에서도 괴로움을 느낄 때가 있다. 주위에 미운 사람을 단 한명도 만들지 않으며 살아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지만 우린 타인에게 실망하게 되는, 이른바 ‘정이 떨어지는’ 순간을 적잖이 겪곤 한다. 다른 사람의 아주 사소한 행동 하나가 그 사람 전체를 규정해 버린다. 이는 인간관계에 있어 완벽을 추구하고자 하는 우리의 욕심 때문이다.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당장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우리부터가 완벽하지가 않다. 모든 성격과 행동은 빛과 그림자를 모두 지니고 있다.

▲ 사진 출처=픽사베이

사람은 하나의 시각으로만 바라보고 평가할 만큼 단순한 존재가 아니다. 마치 복잡한 태엽장치와 비슷한 면이 있어서 겉으로 보이는 간단한 모습만 보고 그 기저에 깔려 있는 다양한 요소들을 파악하는 건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소심한 사람은 관점에 따라 신중한 사람이 될 수 있고, 반대로 대범한 사람은 무모한 사람과 맥락을 같이 하는 식이다. 이렇듯 동일한 사람이라도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해석될 수가 있다. 결국 우리가 타인에게 내리는 모든 평가는, 우리가 보고자 하는 시선에 의해서 정해지는 얕은 판단일 뿐이다.

다만 이상하게도 상대방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그 사람의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눈에 잘 들어오는 것 같다. 거슬리는 점이 있어서 고쳐주려 해도 소용이 없다. 괜히 굳이 얘기를 먼저 꺼냈다가 싸움이 일어나지만 않으면 다행이다. 그런데 사실 생각해보면 그러한 반응은 지극히 당연하다. 지금껏 한평생을 그런 방식으로 살아 왔는데 이제 와서 다른 누가 고치려 든다고 쉽게 고쳐지겠는가. 상대방의 단점에 집중하면 오히려 본인만 피곤해진다.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인정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어떤 한 가지 잘못 때문에 남을 미워하면 손해보는 쪽은 나 자신이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은 무의식 속에서 그 사람에 대한 태도를 결정하게 된다. 이렇게 결정된 태도는 상대방에게 그대로 보여져 그로 하여금 나를 똑같은 이유로 미워하게 만든다. 타인을 미워하는 태도는 동시에 자신을 타인으로부터 미움 받을 위험에 노출시키는 행동이다. 웃는 얼굴에는 침을 못 뱉겠지만, 찡그린 얼굴엔 가래침까지 거리낌 없이 뱉을 수 있는 게 사람의 심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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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원증회고의 원인은 순전히 내 안에 있다는 말이 된다. 애초에 나부터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을 포기한다면 남에게 미움을 받을 이유도, 또 그것에 의해 고통을 느낄 필요도 없다. 우린 모두가 완벽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나면 자신과 타인의 장단점을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관용이 생긴다. 물론 살다 보면 나와 정 마음이 맞지 않는 이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억지로 내게 싸움을 걸어오는 이들과는 아무리 잘 지내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럴 땐 그들과 맞서서 굳이 부딪치려 하지 말고 그들로부터 멀리 떨어지는 지혜를 발휘하도록 하자. 일단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서서히 잊혀진다. 어쩔 수 없이 충돌하는 일이 생기면 나의 시선에서 그를 파악하려 들지 말고 그의 상황에 들어가 입장을 이해하는 것도 좋은 선택이다. 당장 나부터 남들에게 자비를 베푼다면 우리 모두가 조화롭게 어울리는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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