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지평은 서울시 건축문화활성화사업 ‘김중업과 김수근, 현대건축 1세대 궤적을 쫓아서’를 진행한다.

[미디어파인 칼럼=김중업과 김수근, 현대건축 1세대 궤적을 쫓아서] 문화지평은 지난 6월 19일부터 김중업과 김수근의 궤적을 쫓는 서울시 건축문화 활성화사업을 시작했다. 이번 답사는 도시인문콘텐츠·디지털 헤리티지 아카이빙 전문단체인 문화지평이 서울시 건축기획과의 후원으로 ‘김중업과 김수근, 현대건축 1세대 궤적을 쫓아서’란 주제로 진행하는 것이다.

지난해도 건축문화 활성화사업 수행기관으로 선정돼 서울의 첫 종교건축물에 대한 답사와 디지털 아카이빙을 수행한 바 있는 문화지평은 올해도 현장답사와 텍스트 아카이빙으로 기록을 남기는 작업을 계속한다.

첫 답사는 아르코미술관을 정점으로 하는 대학로 일대 김수근의 궤적과 일대 공간에 스며 있는 역사문화 스토리를 찾아 나섰다. 코로나19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답사 탐방객들이 나와 현대건축 거장의 족적에 큰 관심을 보였다.

건축가 김수근 그리고 건축언어

▲ 건축가 김수근(1931~1986). 사진은 일본 사진작가 무라이 오사무가 찍은 것이다. 1985년 일본 교토통신사 의뢰로 완성 직전의 잠실올림픽경기장을 배경으로 사진을 부탁했는데 병중의 김수근이 쾌히 응한 것이다. 그것이 이듬해 영정 사진이 됐다.

김수근의 작품 세계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그의 삶과 건축 언어를 짧게나마 들춰본다. 김수근은 1931년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난 김수근은 8세를 전후로 서울 북촌지역으로 이주해 정착한다. 경기고를 나와 1950년도에 김수근은 서울대 건축학과에 입학했다. 당시 이 학교 교수로 있던 김중업과 인연의 시작이다.

한국전쟁 발발로 학업은 중단됐고 인민군 징용을 피해 그는 일본으로 밀항했다. 1954년 동경예대 건축과에 입학한 김수근은 이곳에서 그의 첫 번째 스승 요시무라 준죠(吉村順三,1908~1997)를 만났다. 동경예대를 졸업한 김수근은 1958년 동경대 대학원의 단게 겐죠(丹下健三,1913~2005) 연구실 진학을 희망했지만 좌절됐다.

대신 같은 대학 다카야마 에이카(高山英華)의 연구실에 입학했다. 하지만 단게 겐죠의 건축기법이 이후 김수근 건축의 확고한 근간을 이루게 된다. 1960년 29세의 약관의 건축가 김수근은 남산 국회의사당 현상설계의 당선자로 금의환향해 자신의 건축사무소 문을 연다. 현대건축 1세대의 첫발은 이렇게 뗐다.

1960년대 김수근 건축에서 재료적 해석은 노출콘크리트의 조형적 표현이었다. 그러나 르 꼬르뷔지에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김중업과는 달리 그는 일본이라는 필터를 통해 해석된다. 이후 그의 건축에서 공간개념과 함께 한국 고유미를 나타내는 요소인 벽돌사용이 강해진다. 이는 한국 전통건축의 추상적 개념에서 진일보해 구체적인 재료를 통한 건축언어의 사용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부분이다.

초기건축에서 주 외장 재료로 사용했던 노출콘크리트 대신에 벽돌을 사용함으로써 한국 전통에 대한 정서적 접근을 꾀했다. 벽돌을 돌출시킴으로써 단조로운 벽체에 조형미를 입혔고 창의 입면효과에도 강한 요소로 작용한다. 벽돌의 사용으로 인한 구조의 문제로 인해 김수근은 자신만의 해결책을 강구하고 벽돌의 구조를 다른 측면으로 해석했다.

벽돌의 조적조는 횡력에 약하기 때문에 층고가 낮아져서 내부 공간을 제약받게 된다. 공간사옥의 구관 내부공간을 보면 이러한 하중의 제약에 의해 두꺼운 벽돌벽이 일정한 그리드 위에 놓인다. 따라서 벽돌을 사용하되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70년대 그의 건축은 철근 콘크리트 라멘조에 치장벽돌 쌓는 방식을 채택한다.

그리고 그는 건축과 자연의 관계성에 대해서도 중요하게 취급했다. 지역성과 주변과의 관계를 고려하면서 건축은 환경과 조우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한 것이다. 1960년대 그의 건축이 건축과 대지와의 관계성을 고려한데 반해, 70년대는 환경에 대한 관계성으로 외연을 확장시키면서 구축한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전통공간의 표현방법에서 중정(마당)과 내부공간의 관계, 빛과 조경 그리고 바람과 같은 자연요소와의 관계를 통해서 나타나고, 전통건축에서 가져온 벽돌로 지어진 건축물들의 담장을 타고 흐르는 넝쿨을 통하여 주변의 자연과 연계시킨다. 담장 넝쿨은 계절의 변화를 느끼게 하면서 자연성을 강조하는 요소이다.

또한 음양에 의해 다양한 공간을 느낄 수 있도록 하고 벽돌로 된 외부벽체에는 그림자 효과로 인해 건축물에 깊이를 더해준다. 더불어 벽돌을 반으로 잘라 조적함으로써 벽체에 변화를 주고 장식요소로 사용해 단조로움을 없애고 창부분에 입체적으로 조적 하면서 빛의 깊이를 더욱 부각했다.

김수근 건축에서 고전해석은 초기의 형태적 측면에서 공간적이고 전통적인 측면으로 진화됐다고 볼 수 있다. 더불어 추상적이고 정신적인 측면으로 고착될 수 있는 고전해석을 구체적인 건축 재료인 벽돌을 사용함으로써 전통을 형태화의 근본요소로 사용해 물적화시키는 새로운 시도를 보여줬다는 평가다. 그에게 있어 건축은 ‘빛과 벽돌이 지은 시’다.

대학로는 김수근이 벽돌로 엮은 ‘시집’

▲ 대학로에는 김수근이 붉은 벽돌을 사용해 건축한 건축물이 꽤 많다. 사진 상단 좌측부터 시계방향으로 아르코미술관, 아르코예술극장, 샘터사옥(현 샘터공공그라운드), 국제협력단건물(서울대병원 부속건물), 서울대병원연구동이 그의 작품이다.

서울 혜화동 대학로에 가면 작고한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건물들이 꽤 많이 있다. 올망졸망 모여 있는 아르코미술관, 아르코예술극장, 샘터사옥, 국제협력단건물, 서울대병원연구동 등이 그의 작품이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살아있는 김수근 갤러리'다. 아르코미술관(구 문예진흥원과 예술극장은 명칭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지만 샘터사옥은 샘터공공그라운드로, 국제협력단건물(구 해외개발공사)은 서울대병원 의생명연구원 의학연구혁신센터로 이름이 바뀌었다.

대학로에 세워진 작품들은 바깥벽에 대부분 붉은 벽돌을 사용했다. ‘건축은 빛과 벽돌이 짓는 시’라고 정의한 벽돌예찬론자 김수근의 면모를 들여다볼 수 있다. 그가 벽돌을 편애(?)하는 이유는 실용과 예술이라는 건축예술을 한껏 살리는 재료이기 때문이다. 그는 “아무리 급해도 벽돌은 한꺼번에 쌓지 못한다. 때문에 한장 한장 단정히 쌓지 않으면 무너지거나 제대로 힘을 받지 못한다. 그리고 벽돌이 지닌 조소성은 무한히 인간화되는 과정을 상징한다”고 벽돌을 예찬한 바 있다. 그의 벽돌건축 영향을 받아 대학로에는 붉은 벽돌로 지은 건축물이 많다. 이를 ‘흉내’라는 표현하기도 하지만 일종의 ‘오마주’가 아닐까 한다.

아르코예술극장은 공연장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바로 옆 미술관과 더불어 마로니에 공원을 마치 증정과 같이 둘러싸는 형태로 되어 있다. 붉은 벽돌의 벽들이 단아하고 세련되게 솟아 있고 각각 분절돼 있다. 당시로서는 꽤나 큰 규모의 공연장 중 하나였다. 더욱이 내부공연장의 객석이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부정형이란 특징을 갖고 있다.

지하 1층의 소극장은 가변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 출입구 캐노피가 앞으로 뻗어 나와 있어서 공원과의 긴밀한 관계를 의식하고 있다는 평이다. 전체적으로 부정형일 뿐 아니라 높이가 높아서 주위의 어디에서 보아도 아름다운 벽돌건축의 이미지를 풍기고 있다.

▲ 문화지평 서울시건축활성화사업 답사탐방팀이 아르코예술극장과 미술관 앞에서 단체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아르코미술관은 옛 서울대 문리대 터에 세워졌다. 1층 부분 중앙은 원래 사람들 통행을 위한 필로티로 만들어 졌다. 남측을 전시장, 북측은 사무실과 자료실로 되어 있다. 전반적으로 대담한 벽면 장식을 구현했고 측향의 강한 햇빛에 그림자를 내는 효과를 기대했다. 공원에서 경사로를 통해 직접 2층 전시장으로 진입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자칫 이곳이 예술공간이 아닌 아파트가 들어설 뻔한 일화가 있다. 문리대가 관악캠퍼스로 이전이 확정되자 대한주택공사가 땅 주인이 됐다. 주택공사는 1973년 이 부지에 아파트 건립 계획을 세운다. 제법 중대형급 고급 아파트 단지를 개발하겠다는 계획이었다. 1931년 지은 대학본부(현 예술가의 집)를 아파트 관리사무소, 중앙도서관은 슈퍼마켓으로 쓰겠다는 방침까지 세웠다.

그러나 인근 샘터사 창업자 김재순 전 국회의장, 건축가 김수근 등이 이 같은 주택공사 계획에 반대했다. 반대여론이 커지자 1975년 당시 건설부는 아파트 건립계획을 접었다. 대신 주택공사는 문리대와 사범대 부지를 일반에게 택지로 팔았다. 이때 한국문화예술진흥원(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이 대학본부 및 주변 부지를 매입했다. 김재순 전 국회의장도 일부 사들여 샘터사를 지었다. 1979년 샘터사옥과 아르코미술관, 1981년 아르코예술극장이 김수근의 손을 거쳐 차례로 들어섰다. 동숭동은 문화예술 거리로 변모하면서 후일 대학로라는 대표적인 젊음의 거리로 발전한다.

샘터사옥으로 입에 붙은 공공그라운드(공공일호)는 벤처기업인들이 ‘착한 부동산투자’를 기치로 내걸고 기금을 모아 구입한 첫 번째 건물이다. 1, 2층은 필로티와 상업공간으로 구성되어 있고 3,4층을 사무실로 사용된다. 공공그라운드는 지난해 서울시의 우수건축자산으로 등록됐다. 우수건축자산은 역사, 경관, 예술, 사회문화적으로 의미가 있는 건축자산이 제대로 가치를 발현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제도다. 공공그라운드는 민간 부문에서 선정됐는데 대학로 일대에 붉은 벽돌 경관과 소극장 문화를 확산시킨 옛 샘터사옥의 공로를 이어받은 셈이다.

국제협력단건물(구 해외개발공사, 현 서울대병원 의생명연구원 의학연구혁신센터)는 대학로변 연건동 서울대 의대 쪽에 위치해 있다. 붉은 벽돌 치장쌓기 건물로써 도로변 고목을 보존하기 위해 두 매스 사이 주진입구의 외부계단에 자연스러운 조경을 유도한 것이 특징이다. 또 흡인력을 강조하고 통과차량에서 발생되는 소음을 덜기 위해 벽면으로 처리했고 대각선 방향으로 어긋난 두 매스를 천장을 설치해 아트리움을 만들고 넓은 바닥은 각종 파티, 집회, 휴식공간 등 이벤트홀로 활용할 수 있도록 계획했다.

주변 건축·공간유산 답사

▲ 성균관 동재 툇마루서 문묘와 성균관의 유래와 흥덕사지 표석 앞에서 이 지역의 시층을 설명하는 김태휘 해설사.

답사팀은 성균관대 정문을 통해 문묘와 성균관에 들어섰다. 성균관은 제향공간인 대성전 일곽을 앞에 두고 뒤로 강학공간인 명륜당 일곽을 배치한 전묘후학(前廟後學)을 취하고 있다. 일반 서원은 이와 반대로 전학후묘를 취한다. 조선의 문묘는 1397년(태조 6)에 96칸 규모로 출발했다. 개성으로 환도한 사이인 1400년(정종 2)에 대성전이 불에 탔다. 이후 1407년(태종 7)에 다시 지었다.

연산군 때 문묘는 한때 짐승을 기르는 놀이터로 변했다고 한다. 이를 1506년(중종 원년)부터 6년 동안 모두 정비했지만 임진왜란 때 전사청과 동·서재 일부를 남기고 대부분 소실됐다. 1601년(선조 34)부터 1605년 사이에 거의 원래 모습으로 중건했고 1869년(고종 6) 대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른다.

문묘는 대성전, 동무, 서무 등 제향공간과 명륜당, 동재, 서재 등 강학공간으로 크게 나뉜다.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해 증자, 맹자, 안자, 자사 등 5대 성인과 공자의 제자들인 10철, 송나라 6현, 우리나라 명현 18인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대성전은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전면 툇간은 개방된 전형적인 사당 평면을 취했다. 동무, 서무는 11칸으로 동일한 규모이며 내부는 트여 있다.

대성전 앞쪽 마당의 동서쪽에는 유교의 덕목인 삼강오륜을 나타내는 삼강목과 오륜목이라 불리는 향나무가 있다. 향나무 가지가 3개, 5개로 갈라져서 붙은 이름이다. 동남 모서리에는 1칸 규모의 묘정비 비각이 자리 잡고 있다. 신문은 남향으로 3칸, 동삼문은 동무의 북쪽에 있어 동향으로 3칸 규모다. 성균관의 정단인 명륜당은 강당으로 쓰인 건물이다. 동재와 서재는 18칸으로 동일한 규모다. 성균관을 한 바퀴 돌고 나서 양현고 앞을 지나 송시열의 집터로 향했다.

양현고는 현재 표석만 남아 있는데, 성균관 유생들의 식량, 물품 공급을 담당한 기관이다. 1392년(태조 1)에 고려의 제도를 계승해 호조의 부속기관으로 설치됐고 1894년 갑오개혁 때 과거제 폐지와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길을 거슬러 오르니 흥덕사지 표지석이 나온다. 이곳은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에 살았던 곳이다. 1401년(태종 1) 여름 이성계는 태상왕 태조의 신분으로 예전에 자신이 살던 집 동쪽에 터를 정해 흥덕사를 창건하게 했다. 연산군 때 폐사가 됐다고 하니 부자지간의 사이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흥덕사는 정릉의 원찰 흥천사와 더불어 조선 초 왕실서 지은 사찰이다. 억불숭유를 건국이념으로 내세운 조선의 아이러니가 엿보인다.

흥덕사는 명륜동1가 산 1번지에 자리하고 있어 조선시대에는 이곳을 흥덕동이라고 불렀다. 지적원도에 따르면 숭1동 2번지(현 종로구 명륜동1가 2-1번지 일대)로 지목은 社(廟(묘) 사당)로 북묘 터와 중복된다. 북묘는 1883년(고종 20)에 성균관 뒷산에 관성묘를 세우고 북묘라고 불렀다. 중국 촉나라 명장 관우를 모신 사당이다.

▲ 좌측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송시열의 집터를 특정할 수 있는 증주벽립 각자와 공업전습소, 서울사대부속초교 교문, 경성제대 본부로 세워졌던 예술인의 집.

흥덕사가 폐사되고 북묘가 들어서기 전에는 우암 송시열의 집터로 추정된다. 빌라촌 관리실 옆에는 보일 듯 말 듯 ‘尤庵舊基’(우암구기)라는 비석이 서 있고 조금 더 오르면 집들에 둘러싸인 거대한 암벽에 ‘曾朱壁立’(증주벽립)이란 각자가 나온다. 증·주는 각각 공자의 제자 증자와 송나라 유학자 주희를 뜻한다. 이들은 자기 처신과 학문에 있어서 올바른 뜻을 굽히지 않은 인물로 알려져 있다.

송시열은 조선 후기 주자학의 대가이자 노론의 영수로서 독선적이고 강한 성품 때문에 여러 번 정치적 곤경을 겪었다. 그 역시 증자와 주희처럼 자신의 소신을 지키겠다는 뜻으로 ‘증주벽립’이란 각자를 남긴 것이다. 그는 충청도 옥천 생으로 만년에는 괴산에 머물렀다. 임금의 부름을 받거나 벼슬살이를 할 때에는 서울 숭교방 흥덕동에 거처했다는 기록이 남았다. 때문에 그가 살던 동네를 송동(宋洞)이라고도 불렀다. 이는 그의 정치적 입지뿐만 아니라 그의 집터 규모를 짐작케 하는 단서다.

‘증주벽립’ 외에도 근처에 있는 서울과학고등학교 교정에는 ‘今古一般’(금고일반,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다)‘과 ’詠磐‘(영반, 올라앉아 시를 읊는 바위)이라는 송시열의 글씨가 새겨진 바위가 두루 남아 있다.

서울사대부속초등학교·부설여중 앞에서 좌측으로 살짝 꺾어져 흐른다. 서울사대부속초는 고풍스러운 교문을 가지고 있다. 이는 원래 탑골공원 정문 기둥이었다. 탑골공원은 원각사란 절이 있던 자리에 1897년 탑과 대문을 세우고 파고다공원으로 문을 열었다. 기둥은 1969년 3.1절 50주년을 기념해 서울시가 서울대 법대 교문기둥으로 기증했다. 학생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양시키기 위해서였다. 1975년 법대가 관악으로 이전하면서 남기고 간 것을 부속초등학교가 사용한 것이다.

▲ 탑골공원 정문 기둥이었던 서울사대부속초교 교문 기둥과 서울보증보험 본사 빌딩과 옛 정신여고 세브란스관인 대호빌딩. 서울보증보험 뒤로는 정신여고를 나와 애국부인회를 결성해 독립운동을 한 김마리아 흉상이 있다.

인근에 서울보증보험 본사빌딩이 있다. 이 자리는 미션스쿨인 정신여고가 있던 곳이다. 서울보증보험 빌딩 옆 고풍스러운 건축물인 대호빌딩이 옛 정신여고 세브란스관이다. 세브란스의 기부금으로 지었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미 북장로교회가 1886년 정동여학당을 지금의 덕수궁 석조전 자리에 세웠다. 1895년 연지동으로 옮긴 후 연동여학당으로 이름을 바꾼다. 신사참배거부와 한글말살정책에 항거하다 1945년 3월 폐교됐다.

1947년 졸업생 김필례가 교장이 돼 학교를 다시 열고 1978년 지금의 잠실로 이전했다. 정신여고는 애국부인회를 주도해 여성 독립운동가를 대거 배출한 민족학교다. 교훈이 굳건한 믿음, 고결한 인격, 희생적 봉사다. 애국부인회를 주도했던 4회 졸업생 김마리아 선생 흉상이 서울보증보험 빌딩 뒤편에 있다.

이번 답사는 프랑스 소르본대학에서 조경학 박사를 마치고 돌아와 우리 건축문화와 역사문화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김태휘 해설사가 맡았다. 김 해설사는 창덕궁‧의릉 궁궐길라잡이, 한양도성 시민순성관으로 있으면서 조경생태와 건축, 역사 분야 전문가다. 문화유산아카데미, 전국역사지도사모임 대표이며 지난해 표석시리즈로 <표석을 따라 제국에서 민국으로 걷다>에 이어 표석시리즈 네 번째인 <표석을 따라 서울을 걷다>를 펴냈다.

<참고문헌>
- 강윤식(2006), 건축가의 사승관계와 독창성문제-김중업과 김수근을 중심으로-, 부산대 건축공학과 박사논문
- 황현미, 한국 근대건축가의 고전해석방법론, 동명대 건축전문대학원
- 정인하(2000), 김수근 건축론 -한국건축의 새로운 이념형, 시공문화사
- 한겨레신문(2018), 사진으로 보는 샘터 사옥과 대학로

[문화지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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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2016), 역사도시 서울답사(2017), 서울 구석구석 톺아보기(2018), 2천년 역사도시 서울 진피답사(2019), 서울미래유산 시장 관광자원화 아카이빙(2019), 서울 첫 종교건축물과 주변 근대 건축물 답사‧아카이빙(2020), 물길 따라 점·선·면으로 잇는 서울 역사(2021), 김중업과 김수근, 현대건축 1세대 궤적을 쫓아서(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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