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매기’는 신예 김미조 감독의 장편 데뷔작으로 단순한 페미니즘을 넘어선, 아직도 보수적이고 편협한 여성에 대한 시선과 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진중한 의문 부호이다. 수산 시장에서 생선가게를 하는 오복(정애화)은 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하는 무일(이상희)과의 사이에 세 딸을 낳은 60대이다.

둘째는 일찍 시집가서 두 아이를 낳았고, 첫째 인애(고서희)는 공무원과의 결혼을 앞두고 있다. 셋째 지애(김가빈)는 친구들과 어울려 술 마시기 바쁜 철딱서니이다. 오복은 상인들과 합심해 시장 재개발 반대 시위를 한 뒤 그들과 어울려 술을 마셨는데 깨고 보니 기택에게 성폭행을 당한 뒤였다.

기택은 무일을 친형처럼 따르던 사이. 오복은 일단 산부인과에 가서 치료를 받은 뒤 상인조합장에게 기택이 자신에게 잘못한 게 있으니 사과만 하면 된다고 전해 달라고 부탁한다. 하지만 돌아온 건 기택의 폭력적 행동. 사정을 알게 된 상인들조차 “젊은 사람 살려 달라.”라며 사건을 덮을 것을 요구한다.

며칠째 가게에 안 나가는 걸 걱정한 인애에게 오복은 자초지종을 털어놓고, 인애는 오복을 데리고 경찰에 신고한다. 하지만 경찰은 증거나 증인을 요구하며 속수무책일 따름인데. 오복의 피해 사실을 모르는 무일은 상인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다가 성폭행을 당한 한 여인의 얘기를 듣게 된다.

집에 돌아온 그는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홀로 술잔을 기울이는 오복의 속내도 모른 채 시장의 소문을 얘기하며 “여자가 조금이라도 협조하지 않으면 성폭행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라고 뇌까린다. 만약 그 피해자가 자신의 아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혹은 딸이 그런 끔찍한 일을 당했다면 과연 그는 어떻게 말하고 행동했을까?

엄청난 배신감과 낭패감과 자괴감을 느낀 오복은 여자고등학교에 홀로 앉아 학생들을 바라본다. 그때 걸려온 엄마의 전화. 그녀는 “엄마, 왜 나 학교에 안 보냈어?”라고 항의하며 눈물을 쏟는다. 오복은 배우고 싶었지만 아들에 비해 홀대를 받았던 우리네 가난한 할머니와 엄마와 누이들의 초상이다.

오복이 원한 건 기택에 대한 단죄도, 피해 보상도 아니었다. 단지 진심 어린 사과일 따름이었다. 그건 그녀가 학교에 앉아 엄마에게 아들만 학교에 보내고 자신은 안 보낸 것을 원망하는 시퀀스와 맞닿아 있다. 그녀는 먹지도 못하는 생선을 팔아 세 딸을 키웠다. 배운 게 없으니 할 게 그것밖에.

그렇게 오로지 남편과 자식만 바라보고 살아왔는데 이제 살날이 얼마 안 남아 자신을 되돌아보니 오복이란 여자는 없었다. 그녀가 술 취한 남편의 손길을 거부한 채 전율하는 이유이다. 그저 남편에게 밥을 해 주고, 성욕 해소의 대상이 되어 주며, 자식에게 일방적으로 희생만 해 온 정체성 불명의 존재.

오복 혹은 여자라는 ‘존재자’가 아닌 ‘존재’이다. 그냥 ‘있을’ 뿐 ‘존재하는 현존재’가 아닌 ‘존재’. 인간의 존엄성은 고대 그리스에서 철학이 생긴 이래 거의 모든 철학자들이 테제로 외친 소재이다. 스토아학파가 연구에 매진한 범주는 주로 논리학, 자연학, 윤리학이었는데 그중에서도 윤리학을 가장 중요시했다.

그들은 자연(신)의 뜻을 따라 금욕과 평정(아파테이아)으로써 현자를 추구하는 삶을 강조했다. 신의 뜻은 곧 이성이었다. 금욕과 평정은 인간애와 정의였다. 17세기 토마스 홉스는 ‘인간의 존엄성이 절대적 가치가 아니고 상대적 가치’라고 주장하면서도 ‘리바이어던’을 통해 생존을 위한 권리인 자연권을 규정했다.

‘자연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타자와 공존해야 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서로에게 존엄성이라는 가치를 부여할 줄 알아야 한다’라고 했다. 장 자크 루소가 돌아가라고 외쳤던 ‘자연’은 인간의 선한 본성을 의미한다. 칸트는 ‘현상 세계의 모든 외적 가치는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있지만 인간의 내적 가치만큼은 그럴 수 없다’라고 외쳤다.

그 내적 가치가 바로 존엄성이다. 크게 낙담한 오복이 부지불식간에 한 폐건물의 옥상을 바라보자 그곳에는 한 중년 남성이 올라서서 1인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그 앞의 슈퍼마켓의 여주인은 “저런다고 해결되나?”라고 혀를 끌끌 찬다. 오복은 그걸 보고 단죄나 복수가 아닌 극복으로 진로를 수정한다.

기택이 사과를 하지 않는다. 법은 멀다. 자신은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그렇다면 현실의 이 열패감과 체기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스스로 니체의 위버멘시(극복인)가 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페터 비에리는 존엄성을 ‘주체로서의 자립성과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썼다. 마지막 시퀀스이다.

영화는 내내 가슴이 답답해지고 미어지게 만들더니 마지막 시퀀스에서 묵직한 망치로 뒤통수를 내리치듯 충격을 선사한다. 그건 세상에 자신의 존엄성을 알리는 이 시대 피해 여성들의 자아의 선언이자 존엄성의 외침이다. 하지만 그게 답답한 현행법체계와 고루한 다수의 인식 세계를 알리는 것이기에 현실에 대한 원망과 허무한 절망은 더욱 심화된다.

과연 지금까지 여성은 얼마나 성적 대상화, 일상생활적 도구화의 존재로서 비쳐 왔을까? 여자를, 아줌마(할머니)를 쳐다보는 사회적 인식이 얼마나 비뚤어져 있는지를 새삼스럽게 일깨워 준다. 쾌락의 낭떠러지와 편견의 심연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줄 모르는 케케묵은 의식 체계에 코페르니쿠스적 전회가 절실하다고 외치는 문제작! 28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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