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시 비영리민간단체공익활동 지원사업 ‘물길 따라 점·선·면으로 잇는 서울 역사’ 4차 답사인 ‘창동천 물길 따라 걷는 남산 서쪽 길’을 진행했다.

[미디어파인 칼럼=물길 따라 점·선·면으로 잇는 서울 역사] 지난 7월 31일 오전 8시 30분 지하철 4호선 명동역 1번 출구 한국전력 서울본부 전력관리처 앞에서 네 번째 ‘물길답사’가 시작됐다. 이번 물길답사는 도시인문콘텐츠·디지털 헤리티지 아카이빙 전문단체인 문화지평이 서울시 비영리민간단체공익활동 지원사업으로 ‘물길 따라 점·선·면으로 잇는 서울 역사’란 프로그램 일환으로 진행하는 것이다.

한양은 내사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등 산에서 내려오는 물은 서에서 동으로 흘러 도성의 동쪽 오간수문(五間水門)과 이간수문(二間水門)으로 나가 중랑천과 합류한 후 한강으로 흘러든다. 이 내수를 가리켜 개천(開川)이라고 했다. 오늘날에는 청계천(淸溪川)으로 부른다.

개천에는 30여 개의 지천이 있었다. 이 지천들은 한양의 한복판으로 모여 개천으로 흘러들었다. 한양의 물길은 빗물과 생활용수가 흐르는 배수로였다. 동시에 아낙네들의 빨래터이자 어린이들의 놀이터로 사랑받는 공간이었다. 한양으로 몰려든 집 없는 백성들이 천변에 움집을 짓고 산 생활 거처이기도 했다.

한양 사람들은 동네 인근의 물길에 이름을 붙이고 물가에서 갖가지 풍류를 즐겼다. 개천과 지천들은 한양의 공간을 결정하는 요소이기도했다. 도성 내 길들은 물길의 방향과 모양을 따라 생겨났다. 길과 물길 안으로 마을들이 들어서면서 자연스럽게 공간이 구획됐다. 지금도 물길 위를 걸으면 조선시대 한양 사람들의 삶이 느껴진다. 그런 면에서 물길 답사는 그런 옛사람들의 생활과 공간을 공유하며 찾아 나서는 여정이다.

옛 선혜청을 지나서 창동천으로 불러

▲ 창동천은 남산공원 백범광장 인근 두 개의 물길이 합쳐져 남대문시장을 따라 을지로1가에서 청계천으로 흘러드는 청계천 지천이다.

이번 답사는 무더위를 감안해 답사 시간을 대폭 앞당겼다. 명동역에서 시작한 이유는 소파로를 통해 창동천 발원지인 남산 백범광장으로 올라가는 길에 여러 지천을 볼 수 있고 다양한 역사의 시층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청계천 지류는 거의 모든 구간이 복개돼 눈으로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복개된 물길 위와 주변에는 이르면 고려 시대, 그리고 조선 시대와 근현대에 형성된 역사문화자원, 공간·자연유산, 산업관광 유산 등이 무수히 들어서 있다. 이번 답사에서는 이들 자원을 ‘점·선·면’으로 이어 공간을 이해하는 시간이다. 아울러 2만 보에 달하는 긴 답사 끝에 맛집을 찾아가는 시간이기도 하다.

문화지평은 청계천을 이루는 서울의 주요 5대 물길 답사와 함께 3D, 동영상, 텍스트 등 다양한 디지털 아카이브를 진행한다. 답사 대상은 백운동천을 비롯해 삼청동천, 흥덕동천, 창동천, 남소문동천 등 청계천을 이루는 5개 지류 발원지부터 청계천 합수 지점까지다. 이번 답사는 5개 지류 중 네 번째 코스인 창동천 물길이다.

답사 해설은 전상봉 서울시민연대 대표가 맡았다. 전문해설사의 해설이 없으면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는 것이 현재 물길 상황이다. 답사에서는 전문해설사의 대동과 해설은 그래서 매우 중요하다. 특정 장소에 대한 역사적 스토리에 대한 설명이 없으면 단순한 산책에 그치기 때문이다. 의미 있는 답사를 위해서는 반드시 전문해설사의 안내를 받는 것이 바람직하다.

백범광장서 발원 을지로1가서 청계천에 합수

▲ 문화지평 답사팀이 창동천 발원지인 백범광장에서 단체사진을 찍고 있다.

창동천은 중구 남창동 남산 서쪽 기슭에서 발원해 시청 앞을 지나 무교와 소광교를 거쳐 청계천에 합류하는 물줄기다. 조선 시대 세곡을 관리하던 선혜청의 남창, 북창 등 곡물창고가 있던 곳을 지나면서 유래된 이름이다. 남산 서쪽 기슭은 지금의 백범광장이다. 백범광장 아래 두 지역서 발원해 시청역 부근 부림빌딩 앞에서 정동 동천과 합류하고 이어 회현동천, 남산동천과 만나 청계천으로 흘러 들어간다.

좀 더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목멱 자락 이곳저곳에서 발원한 물줄기는 남창동 남대문시장 중심부를 흘러 시장 2번 게이트를 빠져나온다. 물줄기는 길 건너 2층 한옥 상가 우측 도로인 남대문로1길을 관통해서 한화빌딩과 플라자호텔 사이로 우회전한 다음 환구단 옆을 지나 프레지던트호텔 뒤로 흘렀다. 물길은 을지로 길을 건너 부산은행 우측으로 흘러가다가 부림빌딩 앞에서 정동 동천과 합류해 마치 게걸음 걷듯 우측으로 횡보한다.

이렇게 가다 보면 남대문로를 만난다. 이는 남산의 또 다른 물줄기 회현동천의 흔적이다. 1907~1915년경에 물길을 인공적으로 암거화 했다. 지금의 남대문로 지하에서 적벽돌로 둥글게 축조된 암거가 394m 구간이 발견됨으로써 알려졌다. 남대문로를 가로지르면 삼각형으로 생긴 경기빌딩을 만난다. 물길이 흐르던 지형 때문에 필지가 사각형이 아닌 삼각에 가까운 형태가 된 것이다. 물길은 미래에셋 센터원 빌딩 앞에서 남산동천과 만나 청계천 한빛 광장을 지나 청계천으로 흘러 들어가면서 소임을 다한다.

창동천의 다리들

▲ ‘MAP OF SEOUL’(1902년)에 표기된 창동천 다리들.(원내) [출처=청계천 지천 연구(2020)]

조선시대 창동천 일대에는 수풀이 우거지고 풍경이 아름다워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서울 장안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어 조선시대 유명한 재상들이 모여 살기도 했던 곳이다. 대표적으로 조선시대 정승을 지낸 상진이나 이항복·이유원, 대학자였던 허목 등이 이곳에 살았다. 유명한 정자로는 쌍회정과 칠송정 등이 있었다.

물줄기 하류인 수하동 64번지 일대에는 그림을 가르치고 관원들의 초상화 등을 그려 주던 도화서가 있었다. 이 물줄기에 놓여 있던 다리는 모두 7개란 기록이 있다. 청계천에서 남산으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처음 만나는 곡교는 삼각동 104번지 경기빌딩 동남쪽에 있던 다리다. 길이 굽이쳐 돌아가는 위치에 다리가 있어서 굽은다리 또는 곱은다리로 부르기도 했다. 한자어로 곡교(曲橋)라 했다. 또한 광교(廣橋)와 청계천의 글자를 하나씩 따서 광청교(廣淸橋)라고도 했다.

소광통교는 남대문로1가 23번지 남쪽에 있던 다리이다. 대광교(大廣橋) 남쪽에 있던 다리라서 소광통교 혹은 소광교(小廣橋)라고 했다. 군기시교는 태평로1가 30번지 동남쪽과 무교동 32번지 현 체육회관 부근에 있던 다리이다. 조선시대 이 지역에는 병기·기치·융장·집물 등 군대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을 제조하고 관리하던 관청인 군기시가 있었다. 군기시 앞에 있던 다리라고 해서 군기섯다리, 군섯다리 또는 무교(武橋)로도 불렀다.

미장동교는 을지로1가 192번지 부근에 있던 다리이다. 조선시대 이곳이 미동 또는 미장동인데서 다리 이름이 유래했다. 전도감교는 태평로2가 57번지 서쪽에 있던 다리이다. 전도감 앞에 있던 다리라서 전도감교 줄여서 전교(錢橋)라고 했다. 조선후기 영조 때 만들어진 ‘도성삼군문분계지도’에 교량 표시와 함께 다리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수각교는 남대문로4가 1번지 부근에 있던 다리이다. 남대문을 들어와 첫 번째 다리로써 조선시대 이곳에 수각(水閣)이 있어서 붙은 이름이다. 수교라고도 했다. 1902년 제작된 ‘MAP OF SEOUL’에는 수교로 표기돼 있다.

창동천 주변의 역사적 공간

▲ 남산공원 백범광장은 일제에 의해 조선신궁, 스키장, 이승만 동상, 백범광장이란 시층을 가지고 있다.(상단 좌부터 시계방향)

창동천이 시작된 남산 꼭대기에는 국사당이 있었다. 국사당은 매년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면서 사당이다. 국사당은 원래 지금의 남산 팔각정 자리에 있었으나 1925년 일본인들이 남산 기슭에 조선신궁을 지으면서 이전을 강제해 지금은 인왕산 기슭에 있다. 일제는 국사당이 자기들 신사보다 높은 곳에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기 때문에 이전을 강요한 것이다. 인왕산으로 이전한 곳은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가 기도하던 자리로 전해지기 때문이다.

백범광장은 남산공원을 올라가는 도중 산 중턱에 있다. 남산 둘레는 구한말부터 일본인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일본인들은 남산에 신사를 세웠다. 노기신사, 경성신사 등에 이어 1920년 조선신사가 들어섰다. 조선신사는 1925년에 조선신궁이 됐다. 지금의 백범광장에서 서울시교육연구정보원(옛 어린이회관), 안중근의사기념관 일대가 조선신궁이었다.

조선신궁은 관폐대사(官幣大社)로 불렀는데 이는 일본 천황이 제물을 바치는 신궁이란 의미다. 해방이 되자 일본인들은 미군정에 부탁해 신궁을 스스로 철거해서 본국으로 부재를 옮겼을 정도로 신성시 여기는 곳이었다. 철거된 조선신궁 자리에는 잠시 스키장이 들어섰다는 소리도 있다. 신궁 올라가는 계단과 길이 제법 넓고 경사가 있었기 때문에 나온 소리다. 과연 당시 스키 인구가 얼마나 있었을까. 아마도 사진 때문에 침소봉대된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도 한때 이곳에 세워졌다. 그러나 4·19혁명 이후 성난 군중에 의해 동상은 허물어졌고 1968년 백범광장이 들어서면서 김구 선생의 동상을 세웠다. 김구 선생과 나란히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 선생 동상이 있고 약간 아래쪽에 신라 김유신 장군 기마상도 있다.

답사팀은 물길을 따라 힐튼호텔 앞을 지났다. 물길이 급격히 남대문 시장 쪽을 향해 흐른 듯 경사가 제법 가파르다. 이런 경사를 완만하게 하게 넘고 퇴계로 위를 교차하는 육교가 나온다. 이는 1961년 12월 서울에서 처음으로 설치된 고가차도인 남산육교다. 숭례문과 밀레니엄서울힐튼을 연결하는 차로로 아래로는 퇴계로가 지난다. 처음에는 일반교량이었지만 나중에 고가차로로 재분류됐다. 1950년대 한국전쟁이 끝나고 우마차나 수레 대신 자동차가 늘면서 서울역 인근 차량 및 도보 통행이 번잡해지자 만든 육교다.

육교를 지나서 내려오다 보면 좌측에 숭례문(남대문)이 보이고 우측으로는 남대문시장 입구가 나온다. 이곳에는 선혜청 표지석이 서 있다. 선혜청은 광혜군 즉위 원년인 1608년 대동법이 선혜법이란 이름으로 경기도에 처음 시행되면서 이를 관리하기 위해 설치된 관서다. 대동법은 조선 중기 이후 공물을 쌀로 통일해 바치게 한 납세제도다. 경기도에서 처음 실시한 것은 방납 폐단이 가장 심했기 때문이다.

선혜청의 위치는 현 남대문시장 일대로 추정된다. 선혜청 창고는 남대문시장 건물로 재사용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남대문시장은 최초의 근대 상설시장이다. 남대문시장의 형성은 당시 도로개수사업과 맞물려 있다. 대광통교에서 숭례문에 이르는 도로를 폭 55척으로 넓히면서 도로변 상가는 일정 기준에 맞는 경우만 허가했다. 이때 노점상들의 생존권이 위협받았고 이들을 선혜청 창고로 이동시키면서 시장도 따라서 움직였다. 물론 저항세력도 있었지만 반 강제로 선혜청으로 몰아넣었다는 기록이 있다.

전상봉 해설사는 “1897년(고종 34) 1월 선혜청 창내장(倉內場)이 설립돼 영업을 시작했으며 이는 지금의 남대문시장 형성의 직접적 기원이 됐다”고 설명했다. 창내장 설치 후부터 거래가 매우 활발해져서 시장은 금세 자리를 잡았다. 처음엔 남대문로 일대 철거된 노점상이 주를 이뤘지만 선혜청 앞 노점상과 종로에서 철거된 상인, 인근의 칠패시장 상인들까지 유입되면서 활기를 띠었다. 당시 남대문 인근과 칠패시장은 매일 새벽에 한시적으로 열리던 조시였지만 청내장은 상설시장이었다.

▲ 창동천 물길이 지나는 길에 있거나 있었던 역사와 건축유산들. 남산육교, 남대문시장, 대관정, 환궁우와 찰도호텔(현 조선호텔), 경기빌딩 등.

물길은 남대문시장을 관통해 우측으로 휘면서 저경궁과 대관정, 황단(환구단)을 지난다. 저경궁은 선조의 후궁으로 인조의 생부인 원종을 낳은 인빈김씨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저경궁 위치는 기록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현 한국은행 신관과 경성부립도서관 자리로 보는 견해가 있다. 저경궁은 1908년 육상궁 안으로 신위가 옮겨 가면서 폐궁됐고 이후 필지가 나뉜다. 경성치과의학교가 초기에는 경성의전 부속병원에서 수업을 하다가 1928년 저경궁 터를 무상으로 임대받아 독립교사를 마련했다.

대관정은 대한제국 선포 이듬해인 1898년(광무2)부터 외국 사신을 맞이하는 영빈관으로 사용된 2층 양관이었다. ‘크게 볼 수 있는 정자’란 뜻의 대관정은 당시만 해도 지대가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서 서울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1899년엔 독일 황제 동생인 하인리히 친왕이 잠시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다.

1904년 러일전쟁 때에는 일본 한국주차군이 무단 점거해 사령부로 쓰기도 했다. 사령관인 하세가와의 관저로도 쓰이다가 1905년 한일협상조약 당시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머물기도 했다. 1923년에는 일본군 소유에서 일 재벌인 미쓰이(三井) 상사로 소유권이 넘어갔다. 1926년 5월부터는 경성부립도서관과 경성부사회관으로 사용됐다. 지금은 부영그룹에서 호텔을 짓기 위해 터를 닦아 놓은 상태다. 정비 전에는 야트막한 둔덕도 있었지만 지금은 완전히 평지가 된 상태다.

답사팀은 조선호텔과 원구단이 있는 건너편으로 가기 위해 지하보도를 건넜다. 소공로 중간에는 지하보도만 있을 뿐 횡단보도가 없다. 지하도에 있는 상권을 위한 것이다. 이는 상인들의 권리도 중요하지만 휠체어를 탄 이동장애인들에게는 매우 불편한 구조다. 휠체어는 플라자호텔 앞에서 서울시청 광장으로 건너가 원구단 대문 앞을 지나 조선호텔 정문으로 빙 돌아야 한다. 문화지평 답사에는 휠체어 이동장애인이 참석하기 때문에 꼭 지적하고 싶은 부분이었다.

원구단은 고종 황제 즉위 원년인 1897년(광무 1) 즉위식을 연 곳이다. 황궁우는 1899년(광무 3)에 원구단 북쪽에 세웠다. 원구단은 황제국에서 하늘에 제를 지내는 곳이고 환궁우는 원구단의 신위를 보관하는 곳이다. 그동안 제후국으로 사직단에서 제를 지내던 것을 원구단에서 하늘에 제를 지냄으로써 자주국가를 표방한 고종의 의지가 담긴 건축물이다.

그러나 이곳은 일제에 의해 호텔이 들어서면서 훼손되기 시작했다. 1911년 국권을 빼앗은 일제는 원구단을 총독부 소유로 돌리고 1913년 이곳에 조선총독부 직영 철도호텔(지금의 조선호텔)을 지었다. 일제는 해체해서 나온 부재는 이곳저곳에 팔아 고의적으로 훼손했다. 원구단 정문은 조선호텔 정문이 됐고 1967년 조선호텔이 신축되고 태평로가 확장되면서 이듬해 매각 해체되고 1969년 5월 어디론가 팔려갔다.

전 해설사는 “2007년 강북구 우이동에 있는 그린파크 호텔을 재개발하는 과정에서 호텔 정문이 원구단 정문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2009년 지금 자리로 이전 복원됐다”며 “당시 문화재에 대한 인식 수준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라고 지적했다.

물길은 서울시청 옆에서 정릉동천을 흡수하고 횡보를 시작한다. NPO지원센터가 입주해 있는 센터플레이스 뒷길을 게걸음 걷듯 청계천과 평행하게 흐른 후 남대문로로 나가 경기빌딩부터는 비스듬히 청계천을 향해 달려간다. 경기빌딩은 물길 지형에 맞게 삼각형으로 지어졌다. 물길 순응형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다. 지하 2층, 지상 18층 규모의 오피스 빌딩으로 1969년 준공됐다. 제법 오래된 건물이지만 관리를 잘한 덕에 외관이 산뜻하다. 일대가 청계천과 창동천에 의해 삼각 형태의 지형을 형성해 동명도 삼각동이다.

남산 중턱서 발원한 창동천 물길이 청계천에 거의 다다랐다. 청계천 합수 직전 지역에 조성된 청계천한빛광장에서 전 해설사가 답사 마무리를 했다. 전 해설사는 “창동천은 청계천까지 가면서 정릉동천, 회현동천, 남산동천 등 3개의 물길을 품는다”며 “물길처럼 우리 삶도 서로를 포용하고 과실을 품어주는 넉넉한 삶이 되길 기원하다”고 끝을 맺었다.

창동천 물길 답사코스
명동역 3번출구-소월로 지류 확인-경성신사터‧노기신사터-한양공원비-백범광장(창동천 발원지)-김유신 장군동상-남산육교-2층한옥상가-선혜청 터-남대문시장-남별궁터-환궁우-구 미 문화원-경기빌딩-청계천한빛광장-청계천 합수

■ 일시 : 2021. 7. 31(토) 8:30~13:00
■ 주관 : 문화지평
■ 후원 : 서울시청
■ 해설 : 전상봉 역사문화해설사

<참고문헌>
- 서울역사박물관, 청계천지천연구(2020)
- 서울역사편찬원, 쉽게 읽는 서울史 현대편2(2021)
- 서울시사편찬위원회, 서울의 하천(2000)

[문화지평]
서울시비영리민간단체(도시문화콘텐츠연구·답사‧아카이브 전문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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