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앤리 법률사무소 김진영 변호사

[미디어파인 시사칼럼] 지난 2월 대법원이 술을 과도하게 마신 상태에서 기억이 나지 않는 소위 ‘필름이 끊긴’ 여성과 성관계를 한 사건에서 피해여성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점을 가해자에 대한 무죄 판단의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판결을 내렸다. 다시 말해 피해자가 의식상실 상태일지 아닐지 알코올 영향으로 추행에 저항할 수 있는 능력이 떨어진 상태였다면 준강간죄·준강제추행죄를 적용할 수 있다고 해석된다. 이는 종전의 대법원 판결들이 블랙아웃 상태를 심신상실이나 항거불능으로 볼 수 없어 준강제추행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고수했던 것과 다소 결이 다른 부분이다.

구체적으로 대법원이 “취한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는 주변 진술 등 피해자의 단편적인 모습만으로 피해자가 단순히 ‘알코올 블랙아웃’에 해당해 심신상실 상태에 있지 않았다고 단정해선 안 된다”고 판시한 것. 이때 해당 판결이 블랙아웃과 심신상실을 동일시하는 것은 아님을 알아둬야 한다. 피해자의 연령, 성향, 사건 전후 정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단순히 블랙아웃 상태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심실상실 내지는 항거불능의 상태가 아니었다고 단언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번 판결을 주된 요지이기 때문이다.

관련해 이번 대법원 판결은 앞으로 준강제추행이나 준강간 사안에서 공통적으로 언급될 가능성이 있다. 이에 따라 준강간, 준강제추행 사안에서 블랙아웃 상태가 어떻게 해석될 것인지 조금 더 기민하게 대응할 필요도 커졌다.

기본적으로 성범죄는 피해자 진술을 중심으로 수사 및 재판의 방향성이 결정된다. 그렇기에 관련 사안 연루 시 섣불리 피해 주장이 거짓이라 매도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특히 당사자들이 취중인 경우 자신도 모르게 혹은 블랙아웃으로 관련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참고로 준강간, 준강제추행은 형법상 사람의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의 상태를 이용하여 간음 또는 강제추행함으로써 성립하는 범죄이다. 여기에서 심신상실이란 정신기능의 장애로 인해 정상적인 판단 능력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며 항거불능 상태란 심신상실 외의 원인으로 심리적 또는 물리적으로 반항이 절대적으로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한 경우를 말한다.

이러한 혐의가 ‘피해자의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의 상태를 이용했는가’ 여부를 다투는데 집중되는 이유이다. 그만큼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주장과 입증 과정을 거쳐야 함을 기억해둬야 한다. 문제는 그러한 과정을 일반 개인이 법률적으로 풀어나가기 쉽지 않다는 점이다.

실제 만취 또는 수면 등의 이유로 당시 상황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피해자가 상황을 정확하게 진술하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이에 사건 전후의 정황과 간접 증거를 최대한 활용해 사실관계를 정리해나가야 한다. 그 과정에서 CCTV나 목격자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피해자의 당시 상태나 언동, 가해자와의 관계, 만나게 된 경위, 성적 접촉이 이루어진 장소나 방식, 계기와 정황, 피해자의 연령과 경험 등의 특성, 사건 후 피해자와 가해자의 반응 등 제반 사정을 면밀하게 살펴 누구의 말이 사실인지, 신빙성을 갖췄는지 따져나가는 것이다.

실무상으로 사건 전후의 객관적인 정황상 피해자가 심신상실 등 비정상적인 상태에 있었음이 밝혀지거나,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 등에 비추어 피해자가 정상적인 상태에서라면 성적 관계를 맺거나 이에 대해 동의하리라고 도저히 기대하기 어려운 사정이 드러난다면 준강간 또는 준강제추행이 인정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반면 피해 진술 속 모순을 찾아내 신빙성을 배척할 수 있다면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기에 사건 연루 초기 혐의에 대해 무조건 인정하거나 부인하는 것은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키는 근거로 작용할 수 있음을 기억해 정확한 법률 조력을 활용해 사실관계 파악에 집중할 것을 권한다.(진앤리 법률사무소 김진영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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