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영화 ‘휴가’(이란희 감독)는 낭만적인 제목과 달리 매우 아프고 처연하다. 홀로 고교 3년생 현희(김정연), 중학 2년생 현빈(이승주) 두 딸을 키우는 재복(이봉하)은 5년째 서울 강남역에서 부당 해고 철회를 요구하는 농성 중이다. 지친 동료 영석(서광택), 만용(황정용)과 갈등하다가 일주일간 휴가를 갖기로 결정한다.

지방 소도시 허름한 집으로 돌아온 재복은 현희로부터 수시모집에 합격했으니 예치금 40만 원을 내야 한다는 말을 듣고 큰소리를 치지만 막막하다. 그 돈을 빌리기 위해 친구 우진(신운섭)을 만났다가 그가 다니는 목재 가구 공장에서 일주일간 ‘알바’를 해 달라는 제안을 받고 출근하게 된다.

그곳에서 함께 일하는 견습생 준영(김아석)과 친해져 함께 밥을 먹기도 한다. 어느 날 준영이 작업 중 낙상해 다리를 다친다. 재복은 준영에게 산업재해 신청을 하라고 충고하지만 망설인다. 재복은 우진에게 회사를 통해 산업재해 신청을 해 줄 것을 종용하기도 하지만 곤란하다는 답변만 들을 따름이다.

그렇게 ‘휴가’가 끝나갈 즈음 농성 동료들로부터 연락이 오고, 재복은 두 딸에게 이번 농성이 마지막이라며 양해를 부탁하지만 거센 반발만 되돌아올 뿐이다. 특히 현희는 “내가 5년간 현빈의 엄마 노릇을 해 왔다. 이제 내가 진학해 집을 떠나면 현빈이 혼자가 될 텐데 어쩔 거냐.”라며 강하게 반발하는데.

이 영화가 그리는 설정은 아이러니투성이이다. 농성장을 떠나는 게 휴가라고 한다. 그렇다면 농성이 그들의 일이다. 그런데 수입은 없다. 휴가랍시고 간 데가 집이다. 집안 살림은 엉망이다. 아이들은 인스턴트 음식으로 매 끼니를 때우고 있었다. 손 볼 곳도, 청소할 것도 많아 온종일 일에 파묻혀 있다.

딸 대학 등록금 마련을 위해 취업을 하려다 실패한다. 불행 중 다행으로 친구가 근무하는 공장에서 ‘알바’를 할 수 있다. 준영은 다쳤는데 회사에서 불이익을 당할 게 두려워, 혹은 질 게 뻔해서 스스로 산업재해 신청을 거부한다. 우진은 당연히 해 줘야 할 산업재해 신청의 의무를 당연한 듯 저버린다.

재복과 동료들이 부당 해고 철회 청구소송에서 진 것부터, 거리와 철탑에서 장기 농성 중임에도 외면당하는 것부터 모두 아이러니이다. 현희는 묻는다. “아빠, 재판에도 졌잖아. 동료들이 우선이야, 우리들이 우선이야?”라고. 그리고 울부짖는다. “아빠, 나 좀 살게 해 줘. 숨 좀 쉬고 살자.”라고.

정치인의 캐치프레이즈에는 공정과 평등이 단골 메뉴이다. 그만큼 이 사회가 불공정하고 불평등하다는 증거이다. 친구는 재복에게 “농성 같은 것 왜 해? 너만 다쳐.”라고 핀잔만 늘어놓는다. 지극히 당연한, 그리고 아주 기초적인 권리를 주장하지만 힘의 논리에 의해 시시비비가 가려지는 아이러니.

눈만 봐도 까르르 웃거나 낙엽만 봐도 센티멘털해져야 할 18살, 14살 소녀들의 얼굴이 밝은 적이 없다. 귀가하면 가족끼리 대화 한마디 없이 제 방에 틀어박힐 따름이다. 심지어 현빈은 거리에서 전단지를 돌리는 ‘알바’를 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현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에 그만두라는 아빠의 명령을 거부한다.

소녀들의 입장에서 볼 때 재복은 아빠 노릇을 제대로 해 본 적이 없는, 결격의 인물이다. 회사에서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이기에 단칼에 해고당한 루저, 아내와의 결혼 생활이 실패한 낙오자, 딸들에게 아빠 자격이 없는 그림자, 친구들에게는 돈이나 빌리고 걱정이나 하게 만드는 민폐 인물.

그런데 과연 그럴까? 재복이 거리에서 취식하며 농성을 하는 건 자신의 기본적인 권리를 보장받겠다는 용틀임이다. 그 근거는 자존감과 아버지로서의 생존의 몸부림이다. 가족을 버리겠다고 거리로 나선 게 아니라 가족을 지키기 위해 일터를 되찾겠다는 아우성이다.

존 듀이는 ‘중요한 사람이 되려는 욕구’로 자존감을 설명한 바 있다. 매슬로는 저 유명한 ‘욕구 단계 이론’을 통해 욕구의 피라미드 하부로부터 생리와 안전의 욕구, 애정과 소속의 욕구, 존중의 욕구, 그리고 자아실현의 욕구 이론을 세웠다.

헤겔은 “모든 사회 구성원들에게 공정하게 적용될 수 있는 공동의 도덕성, 즉 인륜성을 만들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애덤 스미스는 ‘보이지 않는 손(시장 기구, 가격)에 의해 부가 공정하고 효율적으로 배분되어야 사회적 조화가 실현된다.’라고 외쳤다. 굳이 ‘공동 생산, 공동 소유’의 마르크스까지 갈 필요도 없다.

고대의 에피쿠로스로부터 시작해 제레미 벤담이 완성한 공리주의가 일부 비현실적이긴 하지만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슬로건은 모든 정치인들이 외치는 ‘공약’의 근간이 아닌가! 동물의 세계는 비록 약육강식이라는 비장한 힘의 논리로 운영되지만 그들에게도 최소한의 공생의 관계는 존재한다.

감독의 시선은 ‘이게 드라마이냐, 다큐멘터리이냐?’라는 질문이 들 만큼 살 떨리는 현사실적 생활의 속살을 파고든다. 자본주의 체제가 굳어진 이상 과대하거나 과다한 혁명과 변혁은 혼란과 가까울 따름이고, 소소한 문제부터의 변화가 현실적이다. 그게 바로 노동자 문제라고 이 영화는 나지막이 울부짖는다.

마지막 시퀀스는 자기애냐, 최고선이냐의 선택의 기로에 대한 감독의 결론을 보여 주는 듯하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그래서 어떤 선택을 하는가? 살짝 충격적이고, 아린 여운을 주는 이 시퀀스는 사람답게 사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그럼에도 왜 그래야만 하는지 콧등의 저릿함으로 알려 준다. 21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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