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케이 팩스’(이안 소프틀리 감독, 2001)는 리처드 쉔크만 감독의 영리한 철학 SF ‘맨 프롬 어스’(2007)에 필적할 만한 수작이다. 어느 날 맨해튼 기차역에 허름한 차림에 선글라스를 낀 프롯(케빈 스페이시)이라는 남자가 나타난다. 경찰은 신분증도 없이 횡설수설하는 수상한 그를 정신 병원으로 보낸다.

첫 결혼에 실패해 아들과 등을 돌렸지만 두 번째 결혼에서 두 딸을 얻어 행복하게 사는 파웰(제프 브리지스) 박사가 그의 치료를 맡는다. 프롯은 지구로부터 1000광년 떨어진 거문고자리의 케이 팩스라는 행성에서 초광속 이동으로 여행을 왔다고 한다. 지구 나이로 337살이며, 지구에 여러 번 왔다고.

파웰이 친구인 천문학자 스티브에게 프롯의 주장을 전달하자 스티브는 일부 저명한 학자 외에는 알려지지 않은 우주의 발견을 프롯이 알고 있다며 놀란다. 스티브는 파웰의 양해를 얻어 선배 학자들을 모은 자리에 프롯을 불러 케이 팩스의 위치를 그려 보라고 주문하는데 놀랍도록 연구와 일치한다.

파웰은 프롯의 치료에 전념하는 동안 그에게 관심과 동시에 연민의 정을 느끼고 최면 요법으로 그의 정체를 알아 간다. 결정적으로 프롯의 몽당연필을 통해 그의 출신지가 과달루페임을 알아낸 파웰은 그곳으로 달려간다. 현지 경찰의 도움을 받아 프롯의 정체는 로버트 포터라는 것을 알게 된다.

포터는 어릴 때 만난 연인과 결혼해 딸 하나를 낳고 살던, 소 도살장에서 일하던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퇴근하는 사이에 집에 강도가 들어 아내와 딸을 살해했고, 범행을 막 목격한 그는 강도를 죽인 뒤 강물에 스스로 몸을 던졌지만 시체는 발견되지 않았다. 경찰은 그냥 자살로 마무리했던 것.

이 영화는 감동을 강제하거나 목청을 높이지 않아서 더욱 뭉클하다. 우리의 상상력은 우주인을 E.T.나 에일리언, 혹은 로스웰의 우주인 등으로 상정해 놓았다. 더 기상천외한 외모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인간 혹은 지구상의 동물들의 형상과 생리 등에 적용해 변용했을 따름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단 한 번도 외계인을 보지 못했을까?

칼 세이건은 ‘코스모스’를 통해 외계인은 분명히 존재한다고 단언했다. 우주에는 약 1000억 개의 은하가 있고, 각 은하 당 약 1000억 개의 별이 있다고 한다. 상식적으로 보더라도 달랑 지구 한 곳에만 생명체가 존재한다는 건 정말 인본주의가 낳은 최고로 어리석은 확정 오답이 아닐 수 없다.

인류의 문화와 과학이 가장 진화했다는 생각 역시 난센스이다. 일부 고고학자의, 아주 오래된 유적 중 외계인이나 비행 물체를 연상케 하는 그림이 있다는 주장, 세계의 불가사의에 대한 외계인의 문명 전파설 등은 우습게 넘길 수만은 없다. 즉 우리는 지금까지 지나치게 자의적으로, 편협하게 외계인을 창작했다.

사람의 마음은 뉴런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간 뇌의 이 100억 개의 신경 세포는 100조 개의 시냅스에 의해 연결되어 서로 정보를 교환한다. 결국 인간이라는 존재자의 몸은 겉모습일 뿐 인간의 진정한 자아는 시냅스와 뉴런에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종교적으로는 영혼, 심령 등일 수도 있겠다.

만약 지구와 환경이 똑같은 행성이 있다면 그곳의 생명체는 지구와 비슷한 외모와 생리적 구조를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런 행성은 발견된 적이 없다. 그렇다면 이 지구와는 엄청난 차이가 나는 공간인 무한한 별들 중에 존재하는 생명체라면 지구와는 전혀 다른 형상으로 살아갈 확률이 높다.

어쩌면 형상이 아닌 현상으로 존재할 수도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지나치게 아전인수식 유물론으로만 외계인을 상상해 왔다. 이 영화는 그래서 다분히 유심론적이고 관념론적이다. ‘맨 프롬 어스’의 주인공 존은 자신이 1만 4000년을 살아왔고, 석가모니를 만나 가르침을 받았으며, 인도의 신기한 의술도 배웠다고 주장한다.

즉 자신이 예수로도 존재했던 사람이라고. 기독교가 반발했음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이 작품은 그 정도는 아니다. 오히려 프롯은 최면 요법 중 “오, 신이여!”라고 외치기도 한다. 그런데 그 신은 우리가 생각하는 신과는 다소 거리가 먼 듯하다. 왜냐하면 케이 팩스의 생명체, 생활 방식, 개념 등은 지구와 완전히 다르므로.

프롯이 선언한 7월 27일 파웰은 실신한 그를 발견하고 응급 치료를 해 준다. 이후 ‘포터’는 말을 잃고 휠체어에 의지한 채 살아간다. 즉 케이 팩스인들은 따로 육체가 있는 게 아닌, 뉴런이 엄청나게 진화한 것 같은 존재일 것이다. 어쩌면 심령만 존재하는, 그래서 육체적 숙주가 필요한 존재일 것이다.

아니, 그 알 수 없는, 엄청나고 불가사의한 과학과 공간과 존재자들에 대해 말로 설명하거나 단순하게 이해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다만 프롯은 지구에 와서 가족이라는 걸 배웠고, 그는 또 지구인 일부에게 어떻게 사는 게 그나마 바람직한지를 가르쳐 주었다는 게 중요하다. 이 작품이 품은 의도이다.

프롯은 환자 중 자신을 가장 믿고 따랐던 노인 하위에게 “너는 지구에 남아라. 그래서 어떤 일이든 이겨 내라.”라고 용기를 심어 준 뒤 가장 소외되었던 베스를 데리고 간다. 글쓰기를 통해 동행자 한 명을 뽑기로 했는데 그녀의 글은 “나는 가져갈 짐이 없다.”였기에. 바리바리 짐을 싸는 한 여인과 달리.

이 정신 병원은 지구의 축소판이다. 누구는 미쳤다고 하지만 미치지 않은 사람도 있다. 도대체 미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무엇으로 구분할 것인가? 과연 정상과 비정상의 기준은 무엇인가? 프롯은 케이 팩스에는 가족도, 번식도, 법도, 정부도 없다며 “받은 만큼 돌려준다는 생각이 제일 어리석다.”라고 말한다. 예수도 부처도 그걸 가르쳤는데 왜 모르냐며.

그는 우주는 팽창과 소멸을 반복하는데 결국 변하는 건 없다고 말한다. 얼핏 결정론, 운명론, 기계론, 즉 라이프니츠의 예정조화 같지만 이 작품의 문법으로 보았을 때 ‘아등바등해 봐야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 어차피 인간의 삶이라는 게 죄다 거기서 거기이니 하루하루를 잘 이겨 내며 만족하며 살아라.’이다. 그래서 제일 중요한 건 가족이라는, 마지막 시퀀스이다. 채식주의 테제는 보너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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