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1991년 4월 26일 서울 명지대학교 앞에서 ‘학원 자주화 완전 승리와 노태우 정권 타도 및 총학생회장 구출을 위한 결의 대회’가 개최되었다. 시위가 격렬해지자 경찰은 그 악명 높은 백골단(사복 전경)을 투입했고, 신입생 강경대(19)는 그들이 무자비하게 휘두른 쇠 파이프에 두부를 맞아 사망했다.

27일부터 대학생들은 노태우 대통령의 사과와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면서 연세대학교에서 규탄 대회를 벌였는데 이는 전국 20개 대학에서의 강경대 폭행 치사에 항의하는 집회와 시위로 이어졌다. 그리고 다음 달 민주 투사들의 분신이 이어지는 가운데 25일 서울 대한극장 일대에서 성균관대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대규모 시위가 펼쳐진다.

당시 3학년 김귀정(25) 씨가 백골단에게 무차별 구타를 당한 끝에 압박 질식사한다. 경찰은 26일 새벽에 시신을 탈취하려고 영안실에 진입하였으나 유가족들과 성균관대 학생들,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관계자들 등에 의해 저지되었다. 고인은 가난한 집안에서 자랐지만 그 누구보다 민주주의를 사랑한 여학생이었다.

‘왕십리 김종분’(김진열 감독)은 30년째 서울 지하철 2호선 왕십리역 11번 출구 쪽에서 노점상을 해 온 김종분(82) 씨를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그녀는 바로 김귀정 열사의 어머니이다. 영화는 한겨울의 왕십리를 스케치하면서 시작되어 다시 겨울을 맞아 퇴근하는 김 씨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수미상관으로 매조진다.

첫째 딸 귀임 씨(57)가 2살 때 강화도에서 왕십리로 와서 30년을 한자리를 지켜 온 김 씨. 비록 남편이 무능해서 일찍부터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지만 아들과 딸을 넉넉하게 낳았고, 제 집까지 마련한, ‘남부러울 것 없는’ 인생을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그녀. 게다가 귀정 씨는 대학에 합격까지 했다.

영화는 시치미 떼듯 종분 씨의 아주 평범하면서, 그래서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일상으로 잔잔하게 내달린다. 다소 늦게 출근하는 그녀는 각종 채소부터 찐 옥수수와 구운 가래떡 등을 판매한다. 또래의 두 할머니와 함께 장사도 하고 화투도 치며 넉넉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딱 안성맞춤의 노후를 보내고 있다.

인심 좋은 그녀는 아무에게나 외상을 주는가 하면 심지어 돈도 꿔 준다. 어느 날 중늙은이 남자 하나가 나타나 늙은 호박 4개와 함께 6만 원이 담긴 봉투를 내민다. 처음 노점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갑자기 나타나 3만 원을 꿔 갔던 남자가 30년 만에 제 마음의 짐을 벗어던진 것이다.

김 씨는 그에게 서운하다는 말 한마디 하기는커녕 자꾸 밥을 먹고 가라고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되어 준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을 것 같지만 의외로 흔치 않은 이 ‘어머니’의 가슴에 누가, 왜 못을 박았는가? 비록 3년 후 세상을 떠났지만 그녀의 남편과 그녀는 1987년 노태우에게 표를 던졌는데.

4년 후 노태우의 백골단에게 제 뼈와 살보다 소중하고, 제 영혼의 무게보다 더 둔중한 딸을 잃었다. 천연덕스럽게 종분 씨의 일상을 스케치하던 영화는 중간 지점에 이르면 민주 투사 귀정 씨가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이었는지 보여 준다. 화려한 수사나 연출된 눈물 쥐어짜기가 아닌 그녀의 일기를 통해.

식구들은 그녀를 자랑스러워했지만 그녀는 괴로웠다. 일단 집안 사정이 어려웠기에 스스로 학비를 벌어야 했다. “이번 등록금 어떡하지? 아르바이트 없는 세상에 살게 해 주세요. 지금의 내 처지와 환경이 원망스럽기 그지없다.”라는 글은 그녀가 가족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얼마나 고통을 감추고 억지웃음을 지었는지 보여 준다.

그런데 그녀가 괴로웠던 더 큰 아픔은 바로 국내의 정치적 현실이었다. “지랄탄 가스를 맡아 괴롭다. 정말 자본주의 체제는(바람직한 체제가) 아닌 것 같다.”라는 글에 극소수의 재벌과 고위 공직자들에게 편중된 부와, 그만큼 고통받는 대다수 국민이라는 언밸런스에 대한 그녀의 거시적 고민과 통시적 통증이 절절히 배어 있었다. 그녀는 “역사를 움직이는 인민 대중의 힘을 믿고, 모든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끊임없이 투쟁하는 내가 되고 싶다.”라고 썼다.

제목과 달리 영화는 김 씨와 귀정 씨를 왔다 갔다 하는 것 같지만 두 사람은 둘이 아니라 모녀라는 하나이기 때문에 결국 한 얘기를 한다. 이 땅의 엄마, 여자, 그리고 그저 평범한 행복을 꿈꾸는 한 국민의 이야기이다. 노태우를 지지하던 부모와 김대중에게 표를 던진 딸이 한 지붕 아래에 살았다.

그 ‘표심’은 표현의 방법이 달랐을 뿐 그저 제 가족과 함께 오순도순 별 탈 없이 잘 살고자-결코 잘살고자 하는 게 아니고-하는 소박한 바람이었다. 김 씨가 노태우에게 표를 던진 건 그가 그녀의 자식들이 잘 사는 세상을 만들어 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 영화가 시사하는 가장 큰 메시지이다.

아무 생각 없이 ‘태극기’를 흔들었던 그녀는 귀정 씨를 잃고 난 뒤 시위 현장에서 “산 자여 따르라.”를 외친다. 다큐멘터리의 장점을 제대로 살려 감동을 준다. 이 땅의 노인들이 꼭 봐야 할 교과서이다. 젊었을 때 서울의 유명 아파트 건설 현장을 안 뛰어 본 적 없는 막노동꾼 출신 김 씨는 자신의 힘들었던 삶이 만족스럽다고 자랑스러워한다.

귀정 씨를 잃은 것만 빼면 결함이 없다고 자부한다. 그런 그녀가 대학생 시위 현장의 연단에 서고, 주먹을 쥔 채 운동 가요를 부른다. 그녀가 자본주의, 공산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를 알 리 없다. 마르크스가 위대한 철학자인지 알 수 없고 생소할 것이다. 귀정 씨의 고뇌를 이해할지도 오리무중이다.

그러나 단 한 가지는 깨달았다. 노태우와 당시의 기득권자들이 국민의 심부름꾼이나 보호자가 아니라 군림하는 자, 착취하는 자, 국민의 생명을 우습게 아는 살인자였다는 것을. 대다수의 국민은 자유와 행복을 누릴 권리를 박탈당하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불의에 대해 분연히 떨쳐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11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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