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김동리의 걸작 단편 소설(1936)을 최초로 뮤지컬 애니메이션으로 재탄생시킨 안재훈 감독의 ‘무녀도’는 원작의 재미, 중립, 철학을 극대화한 예술성이 돋보인다. 제44회 안시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에서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은 게 지극히 당연한, K-애니메이션의 상전벽해이다.

유난히 예술을 사랑한 할아버지로부터 들은 그림 무녀도에 관한 사연을 화자가 내레이션으로 펼쳐 나가는 액자 형식으로 진행된다. 경주 외곽에 사는 무녀 모화(소냐)는 홀로 혼외 아들 욱이(김다현)와 수양딸 낭이(안정아)를 키운다. 제 미천한 근본이 욱이의 장래를 망칠까 싶어 9살 때 절에 보낸다.

유난히 오빠를 따랐던 낭이는 그 길로 누워 3년을 앓다 청각을 잃어버린다. 모화도 이유 없이 몸져눕고 영검이 점점 사라짐으로써 굿 의뢰가 점차 줄자 하루하루를 술에 취해 산다. 그리움에 지친 외톨이 신세인 낭이는 입과 귀를 닫고 오로지 그림에 의지한 채 자신만의 세계 안에서 갇혀 산다.

15살까지 상좌로 산 욱이는 서울에 가서 달라진 세상을 접하고 경악한 가운데 이내 새 물결인 기독교에 심취한다. 목사를 따라 미국으로 가서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을 한 그는 출국하기 전에 어머니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집에 돌아오지만 서로 다른 신을 모시기에 관계가 악화되고 틈새에 끼인 낭이는 괴로워하는데.

시대는 항상 격동의 시간이고, 그 공간은 매사 갈등의 차원이다. 원작도, 이 영화도 말하고자 하는 건 그 천변만화하는 시공간 속에서 상충하는 믿음, 가족의 관계 혹은 인간관계, 그리고 여자의 위상이다. 과연 종교란 무엇일까? 현생 인류의 직접적 조상은 4만 년 전쯤 출현한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이다.

아마 종교가 시작되었다면 그 즈음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실제 다수의 전문가들은 최소한 2만 5000년 전 삼위일체 여신 트리비아를 모시는 종교가 시작되었다고 나름대로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우리가 아는 기독교는 2000년, 불교는 2600년 정도 되었다. 부처나 예수가 아니라 그 제자들이 창교했다.

신은 있을까? 있다면 어떠한 존재일까? 자연법을 주장하는 철학자들은 자연의 섭리, 이 우주의 진리가 곧 신이라고도 한다. 칼 세이건이 살아 있다면 그게 맞는다고 했을지도. 모든 걸 떠나 종교란 절대적인 힘을 지닌 신을 숭배함으로써 우리네 고통을 해결하고 삶의 근본 목적과 진리를 찾는 문화이다.

굳이 유물론자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종교가 정치, 사회적인 목적에서 시작된 것을 대다수는 안다. 기후와 포식자 등 환경에 적응하고 이겨내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했고, 그건 자연스레 지도자에게 일임되었다. 지도자는 강력한 체력과 지혜는 기본이고, 자신의 정치적 신임을 위해 신통력이 필요했다.

그 신통력은 부족들을 하나의 이념으로 묶을 수 있는 믿음에 기원했다. 가이아 여신도, 오르페우스도, 마르두크도, 오시리스도.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들이 신의 아들을 자처한 게 좋은 예이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개종하며 국교로 공인함으로써 기독교는 유럽과 미국의 대표적인 종교가 되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제우스와 마르두크는 폐위된 것. 한반도에는 인도처럼 많은 신이 오랫동안 공존해 왔다. 알려졌다시피 김동리는 극우파였지만 이 영화는 굳이 특정 이념을 옹호하지 않고 중도의 길을 걷는 가운데 오히려 모화와 낭이를 통해 격변기의 여성상에 대해 고뇌하는 영특함을 보인다.

모화와 욱이는 보수와 진보의 상징성이다. 모화는 변화를 이해하려 하지 않고 무조건 반대한다. 욱이는 기성의 장점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무조건 새것을 따른다. 모화는 김동리이고, 욱이는 유진오이다. 낭이는 예수와 신령님 중 어느 쪽을 선택하지도, 특정 신을 부정하지도 않는 중용의 아리스토텔레스이다.

오랜만에 만난 엄마와 아들이 해야 할 일은 회포를 푸는 것이다.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사연을 듣고 위안을 해 주는 가운데 서로의 앞날을 위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하는 게 가족이다. 서로 다른 종교 때문에 다툴 시간이 없을 만큼 우리의 인생은 짧고, 가족이 함께하는 시간은 더 촉박하다.

감독은 그런 균형을 유지하는 가운데 과거를 통해 오늘날 여성에 대한 처우와 인식론을 묻는다. 모화는 자신의 신분과 혼외자를 낳았다는 ‘불륜’ 때문에 욱이의 장래를 망칠 게 염려되어 그를 출가시키는 불행의 씨앗을 뿌린다. 마을 사람들은 욱이와 낭이의 관계를 의심하여 난이에 대해 숙덕공론한다.

왜 똑같은 행동을 두고서 남자와 여자를 구분할까? 이 첨단의 시대에 개념이 많이 바뀌었다고 하더라도 남녀의 차별은 지속적이다. 왜 욱이의 친부와 욱이에 대해서는 뒷말이 없고, 오직 모화와 낭이에 대해서만 흉을 볼까? 감독은 묻는다. 여자라는 단어 뒤에는 아직도 ‘이니까’라는 조건이 붙는 게 아니냐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하느님께 심판을 맡긴 채 편한 마음으로 자신을 사랑하라는 뜻이다. 모화는 욱이의 기도를 제 기도처럼 그냥 인정하면 그뿐이었다. 욱이는 포교를 할 게 아니라 어머니의 세계관을 인정하고 자신은 자신의 종교관을 펼쳐 나갔으면 되었다. 두 사람을 관조하는 낭이처럼.

형형색색의 차일이 흐드러진 숲속에서 벌어지는 굿 한 판이 펼쳐지는 인트로부터 모든 쇼트가 아름답다. 동양화와 서양화의 크로스오버가 신비스럽고 현란하다는 표현조차 아쉬울 정도이다. 게다가 강상구 음악 감독의 퓨전이 완성도를 더해 준다. 지금까지의 K-애니메이션 중 단연코 강력한 걸작! 24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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