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 칼럼=정분임 작가의 아무튼 영화&글쟁이 엿보기]

▲ 사진 출처=픽사베이

"우리 이 아파트 팔고 저 아래 빌라 새로 생긴 데로 이사 갈까?"

"싫어."

초6 딸은 완고했다. 빌라에 산다는 것이 창피하단다. 전에 반 친구가 반지하에 산다고 아이가 안타깝게 여겼던 표정이 기억난다.

TV 예능에서 집 구해주는 장면을 보면 내가 살고 있는 집 인테리어가 허접하고 남루했다. 거기에 나오는 집들은 아파트, 빌라, 전원주택, 단독주택, 주상복합, 원룸 등 참 깨끗하고 좋아 보였다. 궁전같이 화려한 집도 있었다. 우리 동네 새로 지은 빌라가 지금 아파트보다 더 세련되고 깨끗한데 왜 그러냐? 아이에게 물었더니 "나중에 안 팔리잖아." 였다.

"집 없어서 청약통장을 못 만들었다."는 대선후보자 집을 지난 여름에 지나친 적이 있다. 거기 주상복합 상가에서 점심 약속이 있었는데 건물을 잘못 보고 주거지 쪽으로 향했다가 1층 로비에서 검문(?)을 당했다. 여기는 아무나 올 수 없다는 위압감 때문에 약속 장소를 친절히 가르쳐주던 젊은 안내원 앞에서 쫄았던 것 같다. 몇 십억짜리 건물 안 로얄 거주민들에게 민폐를 끼칠 듯한 이방인의 모습에서 빨리 벗어나려 발걸음을 재촉해야 했다.

도대체 강남에서 자기 소유로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돈을 모았을까? 거리에 선 가로수들마저 퀄리티 있어 보이지 않는가? 오래전 내게는 타향인 서울에서 이집 저집 얹혀 살던 기억이 났고, 청년 시절 옥탑방에 살면서 썼던 시가 떠올랐다.

▲ 사진 출처=픽사베이

선을 보러 갔다
깔끔하고 아담한 배우자를 찾기엔
턱없이 모자라는 높이
그렇다고 눈이 낮추어지지 않는다
두꺼운 조개껍질 속에 몰래 잠자는 진주알처럼
어디선가 꼭꼭 숨은 나의 연인이
기다리고 있을지 몰라

이 횡단보도를 건너면 나타나 줄까
저 고갯마루를 넘으면 다 왔다고 손짓해 줄까
화끈거리는 발바닥은 돌아가기를 부채질하는데
열 손가락 넘게 퇴짜를 맞고
벌개진 귓불 감추며
기도까지 올려본다

어른거리는 모습은 환상이고
날 보러오라는 속삭임은 환청이었나
달빛 속으로 빨려가는 저녁과
맞장구치며
화투판을 추수하는 복덕방 할아버지의
문걸어 잠그는 소리에
오늘의 선을 마감한다.

-정분임, <이삿집을 찾아> 전문-

▲ 사진 출처=픽사베이

1990년대 중반에 썼던 이 시가 2021년을 살아가는 20·30세대들에게 공감이 될지는 모르겠다. 20세기에 집을 알아봐 주는 중개를 대부분 어르신이 맡으셨다면, 이제는 장년과 심지어 젊은 중개인이 부동산 시장에서 활동한다. 게다가 복덕방이라는 간판은 거의 쓰지 않는다. 예전의 복덕방(福德房)은 실제 거주할 곳을 찾는 사람에게 복과 덕이 있는 방, 편히 쉬고 자면서 복을 꿈꾸게 하는 그런 집을 찾아주고자 했던 걸까? 지금의 부동산(不動産)은 재산을 증식시켜 주려고, 소유가치를 업그레이드해 주려고 보다 전문적이고 세밀하게 투자가치를 설명해 준다.

어떤 집을 소유하고 있음에 내 계급이 드러난다. 강남의 아파트냐 강북의 다세대빌라냐, 어디에 사는지에 따라 내 가치가 매겨진다. 아무리 강북의 최신축 빌라여도, 오래되고 칙칙한 외형일지언정 대기업 건설사 딱지가 붙은 ‘강남권 아파트’라는 가치를 뛰어넘기 힘들다.

강북 변두리 작은 아파트라도 살고 있으니, 종합부동산세를 안 내도 되니, 그 얼마나 다행인가 안분지족(安分知足)하면서 스스로 행복하다고 말해야 할까? 그런데 대선 후보는 종부세를 재검토해서 1주택자에게는 종부세를 면제해주겠다 한다. 그 대선후보처럼 처지와 계급이 비슷한 고퀄리티 주택을 소유한, 나보다 아~주 많이 비싼 집에 사는 사람들마저 끌어안는 그의 정책에 박수가 나오지 않는 건 왜일까? 부러움일까? 질투일까?

▲ 정분임 작가

[정분임 작가]
극동방송 주님의 시간에 작가(2014~19)
글쓰기 강사
저서 ‘영화로 보는 신앙’, ‘꿈꾸는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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