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정이 평화롭지 않았던 ‘세계평화의 문’ [문화지평 답사 아카이브]

문화지평l승인2021.11.29l수정2021.11.29 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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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지평은 서울시 건축문화활성화사업 ‘김중업과 김수근, 현대건축 1세대 궤적을 쫓아서’를 진행했다.

[미디어파인 칼럼=김중업과 김수근, 현대건축 1세대 궤적을 쫓아서] 문화지평은 김중업과 김수근의 건축유산을 둘러보는 서울시 건축문화 활성화사업을 시작했다. 이번 답사는 도시인문콘텐츠·디지털 헤리티지 아카이빙 전문단체인 문화지평이 서울시 건축기획과의 후원으로 ‘김중업과 김수근, 현대건축 1세대 궤적을 쫓아서’란 주제로 진행했다.

지난해도 건축문화 활성화사업 수행기관으로 선정돼 서울의 첫 종교건축물에 대한 답사와 디지털 아카이빙을 수행한 바 있는 문화지평은 올해도 현장답사와 텍스트 아카이빙으로 기록을 남기는 작업을 계속한다.

두 번째 답사는 김중업의 마지막 건축유산인 올림픽공원 세계평화의 문과 송파, 방이, 잠실 일대 건축 및 역사자원을 둘러봤다. 코로나19로 인한 방역지침 강화로 소수 인원으로 안전하게 진행했다. 답사는 7월10일 오전 10시30분 올림픽공원 세계평화의 문 앞에서 시작했다.

건축가 김중업 그리고 건축언어

▲ 건축가 김중업(1922.3.9.~1988.5.11.).

김중업은 김수근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현대건축의 1세대 주자로 평가받는 건축가다. 당시 우리나라는 식민지 시대와 6.25전쟁 등으로 세계 건축계에서 소외되고 관심밖에 있던 건축 후진국 위치였다. 김중업은 당시 여과 없이 밀려들어오는 서구의 모더니즘을 한국의 건축으로 변모시켜 국내 건축계가 진일보될 수 있는 산파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 건축가다.

김중업의 영감을 통한 감성의 건축은 기능적인 것이 도외시된 것은 아니지만 그만의 독특한 철학을 가지고 자기만의 언어로 평면을 해석했다. 그러다 보니 논란이 있는 작품도 있었다. 또한 김중업은 사사한 르꼬르뷔지에라는 거대한 울타리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자신만의 오롯한 자신만의 건축관으로 승화시키지 못했다는 비판도 있다. 입체적인 공간의 해석에 대한 고민이 부족한 채 형상에 많은 투자를 했다는 일설이 그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근대건축의 불모지였던 한국의 건축계에 가능성을 제시했다고 평가받는다. 그 이유는 그만이 가지는 건축언어들의 표현과 그가 추구하는 낭만적이고 감성적인 것이 결코 무시될 수 없는 건축의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건축주들과 충분한 교감을 통해 그에 걸맞은 건축물을 만들고자 노력했다. 거주자들의 속성이나 경험에 따라 형성된 생활패턴과 그에 상응하는 요구들을 주택의 물리적인 형태나 기능적인 계획에 반영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1922년 평양에서 태어난 김중업은 일본 요코하마 관립 공업 고등학교에서 건축을 전공했다. 요코하마 관립 공업고등학교는 대부분의 일본 학교가 건축공학과인데 반해 유일하게 건축학과를 가진 학교였다. 당시 주임교수로는 에꼴 드 보자르 출신의 나카무라 준페이가 재직하고 있었다. 1942년부터 마츠다 히라다 사무실에서 근무한 후 1944년 귀국, 여러 직장을 옮겨 다니다가 1946년 월남, 미군 24군단 사령부에서 설계원으로 근무했다.

이후 서울대학교 공대 전임강사를 역임하다가 1952년 유네스코 주최 제1회 세계예술가대회에 참석차 베니스로 가 르꼬르뷔지에와 조우하게 된다. 대회가 끝난 후 김중업은 귀국하지 않고 르꼬르뷔지에의 사무실 설계원으로 1952년부터 1956년까지 약 3년 2개월 간 근무하게 된다.

당시 르 꼬르뷔지에는 20년대의 기계미학적 건축에서 벗어나 노출 콘크리트를 사용한 형태주의 성향의 건축을 행하고 있었다. 이는 몰개성의 국제주의 양식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전 세계적인 경향 중 중요한 한 흐름이기도 했다. 근대건축은 산업혁명으로 발아된 기술의 가능성에 모든 것을 걸고, 그것을 기저로 공간의식의 변혁과 건축 표현의 혁명을 목표로 삼았다.

르 꼬르뷔지에 사무실에서 1952년에서 1956년까지 약 3년 2개월간 근무한 김중업은 탈 모더니즘 경향의 르 꼬르뷔지에 후기건축을 체험한 후 귀국했다. 이후 자신의 사무실을 개소하고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미 전 세계적으로 탈 모더니즘에 대한 논의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으나 제대로 된 근대건축을 가져보지 못한 한국 건축계는 여전히 근대건축에 대한 갈증이 있었고 르 꼬르뷔지에는 국제주의의 한 조류인 기계주의 미학의 창시자로서 전 세계적으로 추종자를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제자인 김중업에 상당한 기대를 걸고 있었다.

이에 김중업은 귀국과 동시에 이미 스타건축가의 입지를 굳히고 있었다. 프랑스에서 귀국 후 초기 작품들은 1920년대 성기모더니즘의 형식이다. 정인하 한양대학교 ERICA캠퍼스 건축학부 교수는 이를 일제 식민지배와 남북분단, 그리고 내전으로 이어진 혼란한 시기를 겪으며 한국 건축계가 서구의 모더니즘 건축을 제대로 수용할 기회를 놓쳐 버린 상황에서 김중업은 르 꼬르뷔지에의 제자이며 한국 현대건축의 1세대로서 제대로 된 근대 건축을 한국에 도입해보리라는 일종의 사명감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김중업이 성기 모더니즘의 특징으로 받아들인 것은 투명성과 경량감, 그리고 구조의 직접적인 노출이었다. 투명성은 부산대학교 본관(1956), 건국대학교도서관(1956)(현 언어교육원)에서 명확히 나타나고 있다. 구조의 직접적인 노출은 유유산업 사무실(1959)(현 김중업건축박물관)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특히 이 시기의 많은 작품들은 르 꼬르뷔지에의 건축을 모방 및 변용하고 있는데, 성기 모더니즘적 건축의 모방 및 변용은 자신만의 건축 언어를 발굴해 낸 1960년대 주한프랑스대사관을 시작으로 점차 사라진다.

자신만의 건축 언어를 확립한 김중업은 비로소 특정 재료를 통한 건축 언어를 확립하여 새로운 양식 구현이라는 근대건축가적인 면모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근대 건축운동의 핵심적인 내용이 ‘전 시대 양식과의 결별, 재료의 물성을 통한 새로운 양식 구현’이라는 점을 상기하면 1960년대 이후의 김중업은 근대건축가로서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김중업에게 있어 한국에 유입된 모더니즘은 이미 새로운 사상의 결정체로서의 건축 양식이 아닌 역사주의로서 결별해야 마땅한 양식이었다. 이는 주체적으로 양식을 발굴해 낸 근대적 사고의 결과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에 김중업은 조형성에 근간한 건축 언어를 구사함으로써 근대건축가로서의 면모를 과시하게 된다. 특히 그는 노출콘크리트, 조적재료, 유리, 나무 등의 재료를 통해 조형성을 구사해 냄으로써 새로운 양식을 창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올림픽 평화의 문에 얽힌 이야기

▲ 문화지평은 지난 7월10일 김중업의 말기 작품인 올림픽공원 세계평화의 문 앞에서 두 번째 건축문화답사를 시작했다.

김중업은 1979년 영구 귀국한 이후 맡았던 대형프로젝트였던 바다호텔과 민족대성전이 실현되지 못하고 계획안으로 끝났다. 바다호텔은 덕적도에 세우려고 한 해상호텔이었다. 모래사장에서 제작한 후 레일을 이용해 바다로 이동시키려고 했다. 민족대성전은 그가 미국에 체류 중일 때 황재경 목사의 제의로 시작됐다. 처음 제의 받을 때 건립위치는 북한산 뒤 조그만 봉우리였다고 한다. 교파를 초월한 모든 종교의식, 오페라, 오케스트라, 연극, 무용, 영화, 페스티벌, 국전, 문학의 밤, 국제세미나, 축제 등 모든 문화행사를 할 수 있는 공간 개념을 가진 곳이다.

김중업은 “기독교 1백주년 기념을 위해서 기독교당이 아닌 모든 문화를 수용할 수 있는 건물을 짓자는 데까지 발전되었습니다. 저도 기독교라는 이름을 빼고 민족이란 이름을 붙여지어서 남북통일이 되었을 때 새로운 대통령이 그곳에서 취임식을 갖도록 하자고 주장했습니다. 미국서 5000만달러를 모금하고 나머지는 국내서 부담하자고 해서 미국서는 일부 모금까지 되었는데 한국서 교파 간에 주도권싸움을 하다 좌절되었습니다. 국내서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수용태세가 되어있지 않아 무산되었습니다. 멋있는 것 세울 기회를 놓쳤습니다”라고 아쉬워하기도 했다.

민족대성전이 무산되면서 몇 년을 이렇다할 프로젝트 없이 지내다가 88년 하계올림픽을 우리나라가 유치하면서 이와 관련된 국제방송센터(KBS방송국)와 올림픽상징조형물의 현상공모에서 김중업 작품이 당선된다.

올림픽 상징조형물의 현상공모의 지침내용(1984,12)을 살펴보면 1차 예비공모에서 5명의 작가를 선정하고 지명된 5명의 작가와 함께 총10개 팀이 본공모를 실시하기로 돼 있었다. 결국 예비공모 당선작가로 장태현, 오인환, 강건희, 오기주, 노재승과 본공모 지명작가 김중업, 장석웅, 김세중, 최기원, 오휘영이 경합을 하게 된다.

결국 현상설계의 최우수작 김중업, 우수작 김세중 안이 채택되었는데 최우수, 우수작가에게 규모 조정의 이유로 재출품을 요구해 결국 김중업의 작품이 본 공사 심사에서 채택됐다. 그 과정에서 두 건축가의 합작 요구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현상설계의 당선안은 높이 24m, 폭이 74m인 문을 상징화한 작품이었다. 계획안에 따르면 문을 상징화한 이유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역사적인 사건을 기념한다는 행위는 탑 아니면 문이었다는 다소 틀에 박힌 사고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러나 주변 경관을 살펴볼 때 올림픽회관이 77m 높이로 솟아있는 상태라서 김중업은 위로 솟는 것보다는 수평으로 펼쳐지는 형식을 채택했다. 수평적인 요소를 강조하면서도 날개의 이미지를 가진 디자인을 생각했다. 수평이지만 상승의 효과를 갖도록 하려는 의도였다.

조형물 앞 공간은 부산 충혼탑이나 육군박물관처럼 거울과 같이 대상물을 투영시키는 역할을 담당하게 했다. 조형물의 날개부분 연결구조물은 원래 당선 안에는 없었다. 철골연결보가 만들어지고 올림픽 오륜표시가 그려졌다. 올림픽조형물의 현상설계 응모안의 구성스케치에서 부터 2차 규모 조정실시, 설계, 납품까지 전 과정은 곽재환 건축가가 담당한 것으로 돼 있다.

최초 디자인은 높이 24m, 폭 74m, 곡선의 철골조 지붕은 폭 37m에 한쪽 날개만 400톤에 가까웠다. 캔틸레버(한쪽 끝만 고정되어 달아맨 구조)로 중앙 기둥에 묶였다. 광화문은 높이 20m, 폭 30m가량이다. 수평으로 두 배 크기다. 김중업이 추구했던 수평의 힘이다. 그러나 이 조차도 위정자들에게는 작아 보였던 모양이다. 설계변경을 통해 높이 90m, 폭 130m의 초대형 무시무시한 도면이 탄생했다. 그랬더니 이번엔 너무 크다는 지적이 나왔다. 김중업은 단단히 기분 상했던 모양이다. 딱 절반으로 축소한 설계 변경안을 냈고 그것이 확정된다.

88올림픽의 상징 ‘올림픽 세계평화의 문’

▲ 다각도로 본 올림픽 세계평화의 문.

올림픽 세계평화의 문은 서울시 송파구 올림픽공원 입구에 소재한 지하 1층, 지상 4층, 연면적 3,120㎡의 철골철근콘크리트조 건물이다. 1986년 설계해서 1988년 9월 12일 준공했다. 안타깝게도 김중업은 준공 4개월을 앞둔 5월11일 작고해 완성된 모습을 보지 못했다.

세계평화의 문은 올림픽정신을 구상적으로 표현하고 대회 개최를 기념하기 위해 건립된 상징 기념물이다. 세 차례 설계 변경을 거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한국의 전통적인 문(門) 개념을 도입, 전통건축과 현대건축의 조화를 이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높이 24m, 지붕길이 62m, 폭 37m의 거대한 규모로 몸체는 철근콘크리트에 화강석판을 붙여 만들었다. 지붕은 철골트러스구조에 동판 덮개를 씌워 제작했다. 지붕 아래쪽에는 고구려 고분 벽화의 사신도가 있다. 판화가이자 그래픽 디자이너인 백금남에 의해 단청으로 입혀 있다. 세계평화의 문 앞쪽 마당에는 괴면 두상 조각을 얹은 열주가 길게 나열되어 있는데 이는 미술작가 이승택이 제작했다.

김중업이 끝까지 마무리 못한 탓에 그가 추구했던 우아하고 날렵한 한국적 처마선이 다소 무디단 평가다. 조현신 국민대 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원 교수는 “(김중업은 한국적 미의) 처마선 복원을 꿈꾸었지만,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중앙의 거대한 기둥과 동으로 만들어지고 원색의 사신도로 채워진 지붕의 형상에서 그 선의 미감은 도저히 느낄 수 없다. 색은 언제나 형상보다 감각적으로 먼저 다가오기에, 형상이 지닌 미감 체험은 언제나 한발 늦다”고 평했다.

김중업이 추구한 처마선은 그가 가졌던 전통적 고정 양식의 현대적 해석과 맞닿아 있다. 그는 전통이란 새로운 문화의 재창조에 기여하지 못한다면 ‘죽은 거축’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단순히 한국이란 지역적인 문제가 아닌 저 세계에 공감되고 공용될 수 있는 가치를 지녀야 한다고 봤다. 그는 프랑스, 일본 스승 밑에서 서구적인 건축 기조 영향을 많이 받았다.

승효상이 쓴 ‘김중업과 그의 현대적 고전주의’(공간, 1986)를 인용하면 ‘나는 유전학적으로 동양인이며 우랄 알타이어족의 한 씨로서 존재하는 데 내가 태어나고 생활했던 한국의 자연과 한국인의 정신이...나를 나타 내는데 동이이라는 것을 들고 나오지 않으면 서양의 것과 대립하는 데 당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라고 했다. 이는 서양적인 것을 배웠지만 한국적인 것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의미를 담은 것으로 해석된다. 이런 생각이 그의 건축언어로 표현됐다는 것이 후배 건축가들의 일반적인 평가다.

<참고문헌>

- 서울&(2017), 안준석의 좋은 건축 나쁜 건축 이상한 건축, 허튼 간섭에 괴물로 변해버린 김- 중업의 유작 송파구 올림픽공원 내 상징물 ‘평화의 문’
- 조현신 국민대 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원 교수(2020), 올림픽 공원의 세 가지 조형물, 스포츠서울
- 홍승조(2000), 김중업 건축에서의 지역주의적 표현기법에 관한 연구, 경기대 건축공학과 대학원
-정인하(2003), 시적울림의 세계, 시공사

[문화지평]

서울시비영리민간단체(도시문화콘텐츠연구·답사‧아카이브 전문단체)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2016), 역사도시 서울답사(2017), 서울 구석구석 톺아보기(2018), 2천년 역사도시 서울 진피답사(2019), 서울미래유산 시장 관광자원화 아카이빙(2019), 서울 첫 종교건축물과 주변 근대 건축물 답사‧아카이빙(2020), 물길 따라 점·선·면으로 잇는 서울 역사(2021), 김중업과 김수근, 현대건축 1세대 궤적을 쫓아서(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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