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서울의 랜드마크·연극의 산실을 가다 [문화지평 답사 아카이브]

문화지평l승인2021.12.06l수정2021.12.06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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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지평은 서울시 건축문화활성화사업 ‘김중업과 김수근, 현대건축 1세대 궤적을 쫓아서’를 진행했다.

[미디어파인 칼럼=김중업과 김수근, 현대건축 1세대 궤적을 쫓아서] 문화지평은 김중업과 김수근의 건축유산을 둘러보는 서울시 건축문화 활성화사업을 수행했다. 이번 사업은 도시인문콘텐츠·디지털 헤리티지 아카이빙 전문단체인 문화지평이 서울시 건축기획과의 후원으로 ‘김중업과 김수근, 현대건축 1세대 궤적을 쫓아서’란 주제로 진행했다. 3회 차 답사는 김중업의 드라마센터와 삼일빌딩, 도큐호텔(현 단암빌딩) 등을 찾아 답사했다. 답사는 7월31일 오전 8시30분 전상봉 해설사 해설로 지하철4호선 명동역에서부터 시작했다.

동랑의 주문에 응답한 김중업 작품 ‘드라마센터’

▲ 중구 소파로 138에 있는 드라마센터(현 남산예술센터)는 동랑 유치진의 주문에 의해 김중업이 설계한 우리나라 연극의 산실이다.

답사팀은 명동역에서부터 소파로를 따라 남산 방향으로 거슬러 올랐다. 중구 소파로 138에 있는 드라마센터(현 남산예술센터)를 보기 위함이다. 드라마센터는 1962년 동랑 유치진이 설립한 극장으로 설계는 김중업이 맡았다. 우리나라 연극의 논할 때 빠지지 않는 인물이 동랑이다. 그는 시인 청마 유치환의 형이다.

동랑은 1905년 경상남도 통영에서 태어났다. 통영공립보통학교, 도쿄 도요야마(풍산)중학교, 도쿄 릿쿄대학 예과를 거쳐, 영문과를 졸업했다. 롤랑의 ‘민중예술론’을 읽고 연극에 뜻을 두고 귀국해 극예술연구회를 조직했다. 고골리의 ‘검찰관’에 출연하는 것을 시작으로 희곡·창작·연기·연출·평론 등 다방면에서 활약했다.

일제 강점기인 1934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학생예술좌의 창립을 후원해 ‘소’를 초연했다. 극작가로 등단한 것은 희곡 ‘토막’부터였다. 이후 극예술연구회 시기(1931~1939)에 70여 편에 달하는 연극비평과 희곡비평, 시론, 연극계결산, 희곡창작법과 영화계에 대한 조언 등을 발표했다.

1930년대 초중반에 발표한 작품들은 식민지의 농촌 현실을 날카롭게 묘사해 카프와 같은 경향파적 특성을 보였다. 이 때문에 카프 문인들로부터 동반자 작가로 평가 받기도 했다. 초기에는 계몽적 한계는 엿보이나 진보적인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한 성향이 잘 드러난다는 평을 받았다.

그러나 1940년 12월 조선연극협회 이사에 취임하면서 일제에 협조해 친일파로 분류됐다. 태평양 전쟁 시기에 조선총독부의 지원으로 친일 연극을 다수 공연했다. 1942년 발표한 일진회 회장 이용구의 생애를 찬양한 작품 ‘북진대’가 대표적이다. 일본의 만주 침략을 긍정적으로 묘사한 희곡 ‘흑룡강’을 썼다. 친일 작품을 연출하고 친일 수필도 발표한 기록이 있다. 1944년에는 어용 문인 단체인 조선문인보국회의 소설·희곡부 회장이 됐다.

해방이 되자 은둔생활을 하다가 1947년 한국무대예술원 초대원장으로 취임했다. 이번엔 우익 연극계에서 활동하며 반공 작품을 공연했다. 1960년 대 초 동국대에 연극영화학과를 창설해 초대 학과장을 맡으면서 강단에 섰다. 1962년에는 드라마센터를 건립해 한국연극연구소와 연극학교, 연극아카데미 등 부설기관을 만들었다. 서울시문화상과 예술원예술상을 수상했다. 문교부가 주는 문예상, 3·1연극상을 받았다.

동랑은 드라마센터를 재단법인 한국연극연구소로 출발했다. 동랑이 소장을 하고 사무국장에 신태민, 극장장 이해랑, 아카데미원장 여석기 등으로 진용을 갖췄다. 1962년 4월 12일 셰익스피어 작·여석기 역·유치진 연출 ‘햄릿’을 개관 기념작으로 무대에 올렸다.

▲ 드라마센터 극장 초기 스케치와 평면도, 리모델링 후 내부 모습.

드라마센터는 지상 4층이며 건축면적은 1,120.5m²이다. 극장은 원형무대와 양편에 사이드스테이지가 있고 소극장 전체가 무대로 구성되어 있는 점이 특징이다. 객석 뒤의 원형무대는 그리스 야외극장의 무대를 본뜬 것이다. 성당의 성가대 무대에서 힌트를 얻었다. 전면에는 중세기의 동시무대 형식을 본떠서 만든 관객석 가운데까지 돌출한 무대가 있었다. 주무대는 근대극의 무대형식이다.

극장의 또 다른 특색은 연기자들이 객석 밑에서 드나들게 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배우가 관객 속에서 솟아나오고 관객들이 연극에 완전히 몰입한 가운데 연극이 진행될 것을 의도한 연극적 필요성에 따라 고안된 것이다.

건축사적으로는 동랑의 주문에 의해 김중업이 설계한 연극전문공연장이란데 큰 의미를 지닌다. 당시에는 모든 연극인이 좋아하던 극장이었다. 척박하던 시절 수많은 작품들이 드라마센터 무대에 올려지면서 가난했던 많은 연극인들에게는 '고향'과 같은 장소였다고 건축가 고 정기용은 추억한다.

정기용은 “제약이 많은 작은 대지, 그것도 암반으로 에워싸인 땅에 당시에 건축한다는 것은 너무나 버거운 문제였다. 무대공간에서 사이드 스테이지와 백 스테이지가 충분히 마련되지 못한 흠은 있지만 그런대로 무대를 객석으로 돌출시키고 객석공간을 반원형으로 에워싸면서, 전체 공간의 분위기는 연극에 몰입하기에 적절하고, 관객들은 배우들의 연기에 빠져들기에 좋은 공간의 원형을 가지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연중무휴 공연을 내걸고 출발한 드라마센터는 관객의 부족으로 재정난에 허덕이면서도 한국연극의 중흥을 위하여 공연활동을 계속 벌이는 한편 아동극지도자 강습, 초등학교 및 중고등학교 연극콩쿠르, 대학연극, 직장연극서클, 농어촌연극 등 5개항으로 된 ‘연극개발 3개년계획안’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공연활동은 재정적 기반의 취약성과 연기진의 대거 이탈로 1963년 1월 막을 내렸다. 공연작품 6편, 총 공연횟수 232회, 동원관객수 7만여 명을 기록하고 자체 공연을 중단하고 대관극장으로 변모했다. 그러나 높은 대관료 책정으로 비난을 받았고 현대극운동의 진원지가 된 것은 1969년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다.

서울예술전문대학이 설립되면서 드라마센터는 학교교육공간으로 활용됐다. 세월이 흐르면서 건물은 노후화됐고 여러 가지 새로운 요구가 생기면서 전면적인 개보수를 할 수 밖에 없게 됐다. 새로운 요구에서 중요했던 것은, 연극공연만이 아니라 음악공연 등 다양한 공연형태들을 소화하는 것이었다. 또 다른 하나는 객석수를 600~700석 정도로 늘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객석도 무대가 될 수 있도록 토털 시어터 개념을 극장 전체에 적용하는 것이었다.

다만 기존 골격을 그대로 유지하고 어떠한 새로운 면적도 증가할 수 없는 범위 내에서만 작업해야 한다는 제약조건이 있었다. 전면 개보수를 거친 현재의 드라마센터는 명실상부하게 여러 종류의 공연을 올릴 수 있게 되었고 그에 도달할 수 있도록 건물전체가 속속들이 개보수됐다.

현관, 로비, 화장실, 계단실, 무대, 프로세니움, 영상실, 조명실, 객석배열, 지하연습실, 끝으로 가장 중요한 천장부분까지 개조됐다. 기존의 목조트러스 사이에 철골보를 걸어서 그것을 지지기반으로 캐트워크, 설비 시설 등, 연극보조에 필요한 장치들을 갖췄다.

정기용은 “공연장 건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건축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숨어있으면서 연출자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지원하는 인프라스트럭처다. 연극공간이란 어떤 연극이 오를지 모르는 불확정적 공간이어야만 한다. 따라서 공연을 지원하는 모든 장치도 숨어있을수록 좋다. 어떻게 보면, 공연공간을 섬세하게 파악하는 것이야말로 건축의 본질에 다가서는 것일 수 있다”고 개보수 관련 소회를 남겼다.

드라마센터는 최근까지 연극아카데미가 발전한 서울예술대학의 실습실로 사용됐다. 그러다 2001년 서울예술대학이 안산으로 캠퍼스를 이전하면서 예술체험 전문공간으로 쓰이게 됐다. 드라마센터 개관은 국립극장과 함께 연극전용무대의 확보라는 면에서 의미가 있었다. 사실주의적이던 명동국립극장(현 명동예술극장)과는 달리 현대적 극장구조를 갖춰 현대극 실험에 알맞은 무대라는 점이 높이 평가됐다. 또 부설 연극아카데미가 연극학교를 거쳐 서울예술대학교로 승격됨으로써 연극계뿐 아니라 예술계 전반에 걸쳐 수많은 인재를 양성했다.

드라마센터를 거쳐 소파로를 따라 오르면 힐튼호텔 앞 도동삼거리가 나온다. 도동은 이 지역에 복숭아나무가 많아서 붙은 옛 지명이다. 이곳에서 남대문 방향으로 내려가는 길은 소월로다. 서울 힐튼호텔은 또 한명의 현대건축 1세대 건축가 김종성의 작품이다.

김종성은 1978년 초에 미국 시카고에서 서울 힐튼 호텔 설계를 시작했다. 부지가 남산에서 예전 대우빌딩이자 현 서울스퀘어 방향인 서쪽으로 12미터 정도 내려가는 경사진 형태였다. 경사를 활용해 방문객이 대지의 높은 쪽에서 호텔 로비로 들어서도록 설계했다. 입구가 건물 내부보다 더 높고 로비에서 아래층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구조다.

김종성은 “설계 시 로비와 로어 로비, 그리고 큰 오프닝을 뚫어서 2층까지 연결하면 가슴을 솟아오르게 하는 익사이팅한 공간을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2층 스카이라이트(Skylight, 천장에 낸 채광창)까지 연결하는 디자인에 집중적으로 노력을 기울였다. 결과는 나로서도 크게 만족한다. 지하 1층에도 자연광이 들어오기에 힐튼 인터내셔널 임원진이 ‘지하 1층’이 아닌 로어(Lower) 로비라고 부르자고 제안한 이름도 타당하다고 생각한다”고 술회했다.

도큐호텔로 출발한 김중업의 단암빌딩

▲ 구 도큐호텔 단암빌딩은 김중업이 1968년 설계하고 현대건설이 시공해 1971년 사업을 시작했다. 단암빌딩 앞에서 해설을 하고 있는 전상봉 해설사.

힐튼호텔을 지나 남대문에 이르면 지금은 단암빌딩으로 리모델링한 구 도큐호텔이 기운차게 서 있다. 서울의 남쪽 관문 남대문은 또 하나의 서울의 랜드마크다. 이런 상징적인 곳을 오랫동안 지키고 있는 건축물이 있으니 바로 현대건축의 거장 김중업이 설계한 단암빌딩(구 도큐호텔)이다. 숭례문 바로 곁, 남대문로에서 남산으로 올라가는 자락에 있는 고층 건물이다.

1956년 프랑스에서 서울로 돌아온 그는 김중업건축연구소를 개소해 주한프랑스대사관, 부산대학교 본관(현 인문관) 등을 설계한다. 김중업은 그간 작품의 빼어난 조형과 한국 건축에서 가지는 선구자적 지위로 회자되어 왔다. 도시와 사회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중소기업은행 본점, 갱생보호회관(현 안국빌딩), 삼일빌딩 같은 서울 도심 빌딩들을 설계해 우리나라 고층 건물 시대를 열었고 지방 도시의 방송국, 예술회관 등도 그의 손을 거쳤다.

구 도큐호텔 단암빌딩은 김중업이 1968년 설계하고 현대건설이 시공해 1971년 사업을 시작했다. 호텔로 지어져 오랫동안 쓰였기에 남대문시장 상인 중에는 아직도 이곳을 도큐호텔로 부르는 이들이 있다.

내수 자본 기반이 빈약했던 당시 외국 자본을 적극적으로 유치하기 위해 외국인 직접 투자 방식이 활발했는데 도큐호텔도 한국이화진흥주식회사(현 단암산업)와 일본도큐전철이 합작해 만들었다. 말이 합작이지 무려 98.8%에 이르는 일본 자본이 투입됐다. 일본 자본에 숭례문 옆 고층빌딩이라는 이유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약 12년 간 호텔로 운영되다 폐업했다. 이후 단암빌딩으로 이름을 바꾸고 임대 오피스 빌딩으로 쓰고 있다.

인도까지 뻗은 웅장한 캔틸레버 캐노피와 그 아래 넓은 계단이 특징적인 입구에 두 개의 회전문이 있다. 1층에 상가가 있고 2층부터 26층은 모두 똑같이 생긴 사무실 층으로 단순한 구성이다. 최초 설계에서 김중업은 단 2개의 기둥으로 89미터에 이르는 건물 전체를 지탱하는 캔틸레버 구조를 계획했으나 당시의 시공 기술로 이를 구현하기는 어려웠다.

사방에 8개의 기둥을, 각 면마다 2개씩 건물을 둘러 가며 배치하는 구조로 바꾸었는데 정방형의 간결한 건물에서 강렬한 디자인 요소가 된다. 그러나 서산부인과 건축과 주한프랑스 대사관에서 보여줬던 김중업의 관능적 곡선과 표질 조형의 언어는 규모가 커짐에 따라 다소 상실되어 감을 알 수 있다.

김중업이 설계한 유유제약 안양공장(현 김중업건축박물관)에도 바깥에서 건물 몸체를 붙잡고 서 있는 노출된 세로 기둥을 볼 수 있는데 이 모습과도 비슷하다. 7개의 엘리베이터와 계단, 화장실, 덕트 등이 위치한 코어가 중앙에 있는 정방형의 평면이다. 외부의 기둥이 구조를 모두 담당하므로 사무실 내부에는 기둥과 벽이 없이 넓다. 사방이 유리창으로 되어있어 서울역, 명동, 인왕산, 북한산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 리모델링한 단암빌딩의 내외부.

단암빌딩은 2018년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단행했다. 노후화된 부분을 보수하고 상아색 노출콘크리트로 마감됐던 외벽에 검은빛 테라코타 패널과 유리, 알루미늄 시트를 입혔다. 건물의 얼굴과도 같은 로비층도 새 옷을 입게 됐다. 오래된 샹들리에가 걸려있고 곡면 천정의 중후했던 로비가 외관처럼 직선적이고 날렵한 느낌으로 재탄생했다.

역사적인 건물인 만큼 재료의 선택에 신중을 기했는데 바살티나 무늬의 포스아트 내장재로 벽을 감쌌다. 포스아트는 포스코강판이 최초로 상용화한 신개념 건축자재로 포스코의 강재 표면에 다양한 이미지를 자유롭게 프린팅할 수 있다. 포스아트 중에서 이번에 쓴 포스마블은 천연 대리석 무늬를 인쇄한 독특한 재료다. 천연 대리석의 느낌을 구현하면서도 그에 비해 저렴하고 시공과 보수가 용이하다.

인조 대리석에서 문제가 되는 라돈을 걱정할 필요가 없고 이후 재활용의 가능성도 큰 친환경 재료다. 또한 무늬나 가공을 위한 별도의 금형 제작이 필요 없이 맞춤 인쇄가 가능하다. 단암빌딩의 바살티나 벽은 오돌토돌한 표면의 질감과 그레이톤의 색상이 특징적이다. 자칫 차갑고 딱딱할 수 있는 스틸의 이미지에 건축 내장재로서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

빌딩 밖으로 ‘정초定礎1968.5.15’라는 머릿돌이 보인다. 건물의 입면을 단순화한 그림을 건물의 공식 로고로 쓰고 있는데 바로 밑에 ‘since 1970’이라고 병기했다. 준공 당시 만든 건축모형을 로비 한 쪽에 전시해놓았다. 건축도면도 보관하고 있다. 한 번도 바뀌지 않은 건축주가 건물에 갖는 자부심과 애정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진정한 서울의 대표빌딩

▲ 63빌딩이 세워지기 전까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빌딩으로 서울의 랜드마크였던 삼일빌딩.[사진=SPACE]

‘삼일빌딩’은 김중업의 업적인 동시에 시그램빌딩과의 형태적 유사성으로 인해 모방작이라는 불명예를 같이 지닌 건축이다. 뉴욕에 지어진 시그램 빌딩과는 달리 삼일빌딩이 지어질 당시 종로구 관철동에 고층빌딩은 존재하지 않았다. 매일경제 신문 1970년 2월17일자 경제3면에 따르면 지하철 1호선이 들어설 경우 탑골공원 앞에 지하철역이 마련돼 교통 요지가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제3한강교와 도심을 잇는 남산터널도 이곳을 경유하게 돼 교통망이 삼일로를 중심으로 형성될 것이기 때문이다.

삼일빌딩은 지역을 대표하는 초대형 건물로 만들려는 김두식 사장(삼미그룹의 모기업 대일목재 사장)의 의지는 강력했다. 그의 계산대로 삼일로 빌딩은 랜드마크 위치를 차지하는 초고층 빌딩이 되었던 것을 넘어서 해방 후 20여년 만에 설계에서부터 시공까지 모두 국내 기술진에 의해 건설된 대규모 건물이 되었다. 그런 연유로 한국정부의 정책 성공과 서울의 외형적 경제성장을 보여주는 정부의 해외홍보물 및 교과서 등에 수시로 등장하는 자랑이었다.

김중업의 대표작으로는 주한프랑스대사관이 강하게 각인돼 있는 상황. 김수근이 공간사옥이라면 김중업은 프랑스대사관으로 한국 현대건축의 쌍벽을 이루던 시대였다. 프랑스대사관 이후 10년 뒤인 삼일빌딩(구 삼일로빌딩)은 김중업의 커리어에 또 한 번의 큰 획을 긋는다. 준공 당시 서울에서 최고층 건물이었기에 한동안 대한민국의 경제성장과 기술발전을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작동했다.

삼일빌딩은 김중업의 경력을 나누는 분기점으로서 의미가 크다. 광주대단지 사건 필화로 인해 프랑스 망명길에 오른 것이 삼일빌딩 전이었다. 따라서 삼일빌딩은 그의 전반기 경력을 마감하는 시점이다. 그러면서도 이 건물은 그의 후반기 경력을 열어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여기서부터 유리 커튼월이 적극 사용됐기 때문이다.

삼일빌딩은 단순성, 투명성, 비례미, 개방성, 수직성, 경량성 등을 고려해 근대건축의 기능주의적 합목적성을 중시한 건축으로 평가받는다. 과도한 유리사용으로 인해 내부 근무환경의 열악함을 초래할 수 있다는 논쟁이 없었던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김중업은 착색유리를 외피로 선정한다.

삼일빌딩 건축 에피소드 몇가지를 소개한다. 당초계획에서 김중업은 높이를 140m로 생각했으나 120m지점에서 상당한 풍압이 걸려 건물 높이를 115m로 낮췄다, 이에 따라 김중업은 입면의 비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창의 폭을 줄인 것이다. 건물의 높이를 줄이기 위해 철골에 구멍을 뚫어서 닥트시설들이 관통하도록 했다.

건축주인 삼미그룹은 철강회사 이미지를 건물에 입혀주길 원했다. 그래서 외피에 상당한 신경을 썼다는 후문이다. 아울러 도로명이 삼일로라서 31층을 요구했다. 삼일로란 이름은 삼일빌딩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삼일 독립운동을 기리기 위해 이미 오래전에 지어졌던 이름이었다. 그러나 삼일빌딩이 갖는 강력한 랜드마크 성격 때문에 아직도 많은 이들이 삼일로가 삼일빌딩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고 있다.

삼일빌딩은 건축사사무소 원오원아키텍스와 정림건축종합건축사사무소의 디자인을 바탕으로 리노베이션 공사를 했다. 공사 과정에서 김중업 건축의 유산과 대한민국 현대화의 상징성이 설계자들에 의해 최대한 존중됐다는 후문이다. 1층 로비 기둥에 흔적을 남겼다. 하나의 볼거리다.

<참고문헌>

-한국 근·현대 연극100년사 편찬위원회(2009), 한국 근·현대 연극 100년사, 집문당
-김숙현(2005), 1970년대 드라마센터의 연출 특성 연구, 동국대학교 박사논문
-
포스코뉴스룸(2020), INNOVILT FANTASIA 시리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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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성(2013), 1960년대 강북 고층업무시설의 외피형성에 관한 연구, 경희대학교 석사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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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2021), 1971년 10월호 : <김중업 건축전>의 삼일로 빌딩, 김현섭 고려대 건축과 교수

[문화지평]

서울시비영리민간단체(도시문화콘텐츠연구·답사‧아카이브 전문단체)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2016), 역사도시 서울답사(2017), 서울 구석구석 톺아보기(2018), 2천년 역사도시 서울 진피답사(2019), 서울미래유산 시장 관광자원화 아카이빙(2019), 서울 첫 종교건축물과 주변 근대 건축물 답사‧아카이빙(2020), 물길 따라 점·선·면으로 잇는 서울 역사(2021), 김중업과 김수근, 현대건축 1세대 궤적을 쫓아서(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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