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지평은 서울시 건축문화활성화사업 ‘김중업과 김수근, 현대건축 1세대 궤적을 쫓아서’를 진행했다.

[미디어파인 칼럼=김중업과 김수근, 현대건축 1세대 궤적을 쫓아서] 문화지평은 김중업과 김수근의 건축유산을 둘러보는 서울시 건축문화 활성화사업을 수행했다. 이번 사업은 도시인문콘텐츠·디지털 헤리티지 아카이빙 전문단체인 문화지평이 서울시 건축기획과의 후원으로 ‘김중업과 김수근, 현대건축 1세대 궤적을 쫓아서’란 주제로 진행했다. 4회 차 답사는 김중업과 김수근의 건축유산을 모두 볼 수 있는 남소문동천 물길을 따라서 걸었다. 답사는 8월21일 오전 8시30분 지하철6호선 버티고개역에서 시작했다.

2017년 3월 현대건축 1세대 김중업의 60년대 작품 구 서산부인과(아리움 사옥) 건축물에 대한 문화재 등록 신청에 따른 관계전문가 현지조사였다. 이를 토대로 문화재 등록 여부를 검토하는 것이 목적이다. 신청인은 건물주인 아리움 정인훈 대표. 서울시 중구 을지로7가 11-6번지에 있는 지하 1층, 지상 5층, 연면적 574.92㎡, 1967년에 건축한 철근콘크리트조 서산부인과에 대한 문화재 등록을 검토해 달라는 민원을 넣은데 따른 것이다.

정 대표는 보존관리 및 활용에 대해 원형 복원 후 아리움 사무공간 및 문화공간, 카페 등으로 활용하겠단 계획을 덧붙였다. 이에 따라 관련 문화재위원 2명은 현지조사를 통해 의견을 내놨다. A위원은 “대표적 현대 건축가의 작품으로서의 설계와 시공 초기의 형태가 비교적 온전하게 보존돼 있으며, 노출 콘크리트 구조와 실내외의 조형성 측면에서 건축사적 기록물로서의 가치가 충분하다고 사료된다”는 의견을 냈다.

특히 “건축 허가 당시의 도면이 완전하게 보전돼 있으며 아울러 건축허가통지서와 공사 시방서 등이 함께 보존돼 있어서 등록가치가 높다고 판단된다”고 덧붙였다.

B위원 역시 “광복 후 한국 현대 건축이 부르탈리즘(구조와 재료를 솔직‧정직하게 표현 미학적 측면을 강조한 건축사조)으로 대표되는 세계 건축계의 흐름과 맥을 함께하는 몇 안 되는 건축물 중 하나로 완성도와 함께 희소성이 매우 높은 건물이고 내부는 용도의 변화로 원모습이 소멸됐지만, 외관은 신축 당시의 모습이 온전하게 보존돼 당시 국내건축기술과 건축기술의 한계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건축”이라고 보고했다.

또 “소유주가 보존하고 있는 도면은 동시대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 중 원 도면이 남아있는 몇 안 되는 자료로 가치가 매우 높은데 청사진의 속성 상 빠르게 탈색되어 원 가치가 상실될 우려가 있으므로 등록문화재로 등록 후 보존처리를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세계건축 흐름과 맥 함께하는 귀한 작품”

▲ 김중업이 1967년 건축한 구 서산부인과 옛 모습(좌)과 현재 모습 비교(현 아리움 사옥).

C위원은 “1965년 고 김중업이 설계한 서산부인과 병원 건물로서 산부인과 병원이라는 특징을 살려 ’어머니의 자궁’을 모티브로 평면계획을 했다. 외관에도 발코니를 곡선으로 처리했고 발코니 지지 구조체를 원형 강관을 사용해 곡선과 조화되는 구조체를 만들었다. 수직이동을 위한 구조체는 계단이 아닌 경사로 하였고 미끄럼 방지를 위해 콘크리트에 홈을 설치하는 방식을 택했다. 김중업의 설계특징이 잘 나타나는 건축물로 원형 또한 잘 보존되어 있어 문화재로 등록해 보존할 필요가 있다. 발코니부와 경사계단 원형 최상층의 지붕은 원형을 보존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 문화재 등록 가능성을 높였다.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는 이를 토대로 같은 해 3월 28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제3차 근대문화재분과 회의를 열어 문화재 명칭은 ‘서울 구 서산부인과 병원’으로 결정하고 출석위원 6명 모두 문화재 등록을 찬성했다.

서산부인과 건물은 1965년에서 1966년 사이에 김중업에 의해 설계됐고 1967년에 완공된 건축물이다. 현재는 아리움 사옥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1995년 9월부터 아리움 사옥의 소유주인 정인훈 대표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 인쇄출판 관련된 일에 이용되고 있다.

비교적 처음 건축된 구조와 형태가 잘 유지되고 있으나 일부 현관 입구, 창호, 옥탑층, 보일러실, 물탱크실 등 건축 구조의 변경이 있었다. 건축물 위치는 광희문과 퇴계로를 사이에 하고 있으며 퇴계로와 을지로가 만나는 모서리에 위치하고 있다. 건축물 후면에는 한양도성 성곽이 붙어있다.

김중업 건축설계의 특징 잘 표현

▲ 김중업의 조형언어가 철근콘크리트의 물성을 극대화해 구현된 현대건축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 구 서산부인과의 현재 모습과 문화지평 답사팀.

건축물 특징은 당시에 잠시 유행했던 노출 콘크리트 구조의 야수주의적 건축양식을 띠고 있으나 공간 계획이나 외관 형태는 조형성이 극도로 강조되어 표현됐다. 원래 산부인과 병원으로 설계됐고 김중업은 평면 계획의 의도를 여성의 신체에서 끄집어낸 것으로 설명했다는 기록이 있다. 실내외의 공간 구성이 상당히 자유롭고 유기적인 것이 특징이다.

건축 내부공간 계획과 외부 입면은 건축설계 당 시대에 유행하였던 노출 콘크리트 패턴이 대표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건축물 규모는 크지 않지만 심미적 느낌을 주는 공간 계획과 구조 계획이 특징적이고 김중업 설계의 특징이 잘 표현돼 있다.

내부공간의 분할은 원형의 벽선으로 비교적 간단하고 짧게 구성돼 있어서 실내에서의 활동이나 이동, 소통이 비교적 안정적이고 용이하도록 계획된 설계라는 평가다. 병원 건물로 설계됐기 때문에 층간 이동은 경사로(ramp)를 이용하도록 했다. 계단이 없는 구조며 경사로 폭이 상당히 좁아 건물이 건축될 당시 병원 구조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김중업의 조형언어가 철근콘크리트의 물성을 극대화해 구현된 현대건축의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부정형의 작은 필지를 김중업의 건축언어로 소화해낸 이 건물은 을지로 동쪽 끝과 퇴계로의 동쪽 끝이 만나는 접점에 위치해 있어 서울외곽에서 도성 안으로 진입하는 경계의 랜드마크 역할을 하고 있다.

건축 당시에 비교해 부분적인 구조 변경과 변형이 있었으며 특히 노출 콘크리트로 건축됐던 초기 건축물의 외벽이 수차례 페인트로 도색됐다. 주출입구의 계단의 재료와 형상, 건물 창호 대부분이 바뀌었다. 또한 중요한 의장적 특징을 구성하고 있는 계단실의 전면 창호는 신축 당시에는 메탈창호였으나 현재는 알루미늄 새시로 교체됐다.

현 소유주가 20여 년 전 건물을 구입하면서 전 주인으로부터 인수받은 청사진 도면을 잘 보존하고 있어서 원형 복원은 물론 유지관리를 위한 중요한 근거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다만 소유주는 원형 복원을 희망하고 있지만 이 문제는 등록문화재 등록 후 논의할 문제로 2017년 당시는 논외가 됐다.

신축 당시의 모습이 잘 보존돼 있는 외관에서 인상적인 부분은 매우 가는 기둥으로 지탱되고 있는 돌출된 외부 발코니다. 신축된 지 50여 년이 지난 시점까지 하자 없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발코니를 지탱하는 가는 기둥이 철근콘크리트가 아닌 철제기둥(주철로 추정됨)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이 같은 건축사적 특징 때문에 당시 문화재 위원들은 “김중업이 설계한 건축물 중 원형이 보존된 건물이 많지 않으며 특히 서울지역 도심부에 남아있는 유일한 건축물로 문화재로서 지정될 가치는 충분하며 다른 근현대기 건축물과 비교해도 그 가치가 높다고 판단된다”며 “문화재로 등록해 보존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소유주인 아리움 정 대표가 난색을 표명하며 이의를 제기했다. 2017년 4월 문화재청이 ‘서울 구 서산부인과 병원’ 문화재 등록을 예고하자 정 대표는 “신청인 의견 미반영 부분에 대한 해결이 없으면 본 신청인은 문화재 등록을 철회할 것을 밝힌다”는 이의제기를 했다.

정 대표는 “문화재등록신청서를 서울시로 보낸 이후, 문화재위원회(서울시, 문화재청)가 현장에 나오기 전에만 전화 연락을 받았을 뿐 등록신청 내용에 관한 문화재청 직원의 안내나 협의, 문화재위원회 개최 결과, 등록 예고 고시에 따른 사전 안내 등 어떠한 내용도 통보받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또 “어떤 과정의 결과를 언론 기사를 통해 보고, 문화재청의 홈페이지에서 보도자료와 문화재위원회 회의 결과를 봐야 하는 현재의 문화재 등록 과정은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보이며 자발적인 보존을 통해 등록을 유도해야 할 행정기관의 처리 방식이 이렇다고 하면 사유재산을 가진 소유주들의 등록 신청은 절대로 확산되기 어려울 것”이란 이유를 들었다. 이와 관련 근대문화재분과는 5월 대전에서 회의를 열고 문화재 등록을 보류하기로 결정했다. 김중업의 건축이 문화재가 될 수 있었지만 서울미래유산에 머물러야 하는 아쉬운 순간이었다.

구 서산부인과 앞으로는 남산 국립극장에서 발원한 남소문동천이란 옛 물길이 흐르고 있다. 모두 도로로 복개돼 있지만 국립극장, 장충단공원을 지나 한 지류는 훈련원공원을 지나 오간수문으로 빠지고 또 한 지류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 뒤 이간수문으로 흘러나가 청계천과 합수한다.

골고다 언덕 구원의 길 구현 ‘경동교회’

▲ 같은 시기에 지어진 다른 교회들과는 달리 기독교 문화를 교회건축을 통해 표현하는 새로운 시도를 한 교회라고 평가 받는 경동교회.

남소문동천을 거슬러 올라가면 김중업에 이어 현대건축의 거장 김수근의 작품이 여럿 나온다. 그중 하나가 경동교회다. 한국 초기 개신교 교회는 교인들 주택에서 시작됐다. 소래교회, 정동감리교회, 새문안교회 등이 대표적이다. 규모가 큰 민가를 기능에 맞게 고쳐 사용했는데 초가가 대부분이었다. 최초 기와 교회는 언더우드 선교사의 사택을 교회로 사용한 새문안교회다.

교회 대부분은 내부에 막을 쳐서 남녀의 자리를 구분했다. 이것은 유교의 영향 때문이었다. 이후 교세가 확장되자 선교사들은 한옥을 버리고 서양식교회를 짓기 시작했다. 개신교의 첫 양식교회는 서울 정동감리교회다. 1885년에 착공되어 1898년에 준공됐다. 고딕 양식을 단순화시켰다. 한국에서의 초기교회는 건축의 질 보다는 예배 공간 확보와 십자가만 높이 세우기 바빴다. 그러다가 여유가 생기면 종탑도 세웠다. 서양 중세 교회양식을 모방한 교회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겼고 건축 형태도 무질서했다.

그중에서도 하늘 높은 신앙을 위해 십자가와 종탑이 필수적 건축구성요소가 됐다. 이런 현상은 지역이나 교파에 상관없이 비슷했다. 그 이유는 먼저 교세의 양적인 팽창에 따라 짧은 시간에 많은 건물이 지어졌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교회건축을 주도한 성직자와 지도급 신도들의 건축양식에 대한 인식 부족이 원인이었다.

60년대 들어서면서 한국교회는 많은 자성과 함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성찬 예식을 더욱 상징적으로 지키고 세례도 죄 용서의 의식이라기보다 교회 공동체에 가입하는 의미로 해석하는 신학이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기를 지나고 지어진 경동교회는 새로운 교회건축을 인식하게 만든다. 즉 외부 형태는 도시 속에 고립된 섬의 형태를 보이지만 옥상과 지하에 들어선 교제 공간을 통해 개신교만의 문화적 공간을 만들고자 했다. 비록 성당 건축 모습을 보이지만 문화를 생각한 공간 활용 측면에서는 교회건축 양식의 새로운 면을 보여 주는 예로 평가받는다.

경동교회는 1945년 12월에 설립됐다. 1958년에 교회를 지었고 1981년에 새 교회를 완공했다. 외부 모습은 추상형으로 기도자들의 하나 된 모습을 나타내며 내부는 카타콤의 의미를 표현하고 있다. 철근 콘크리트 라멘조 구조로 지하 1층, 지상 3층으로 되어 있다. 설계자 김수근이 의도한 설계 개념은 교회가 ‘예배의 장- 만남의 장- 축제의 장’으로서 의미를 살리고 교회의 선교적 사명을 나타내도록 하는데 초점을 맞췄다.

경동교회는 예배만 드리는 공간이 아닌 예배와 교육, 봉사, 친교가 골고루 이루어지는 공간 역할의 강조했다. 예배당 지붕 옥외무대는 예배와 만남과 축제의 장을 조화롭게 연결되도록 만들어졌다. 이는 하늘을 향해 열려있는 교회를 강조한 것이다. 도로에 접한 교회 건물은 투박한 붉은 벽돌을 사용해 인간의 절박함, 고민, 순수함들 나타내려 했다. 아울러 도시 속의 거대하고 견고한 ‘신앙의 성’ 같은 형상을 보여준다.

경동교회의 본당건물은 교회당 외형과 내부에 다양성 속에 일치를 나타내는 기독교의 에큐메니칼 정신을 강조하고 있다. 교회의 메인타워는 하나님 나라가 역사의 현장에 임해오는 것을 기원하는 모습을 나타냈고 교회당 내부는 교회가 지니는 다양한 측면을 조화시켰다.

교회에 들어오면 제단 위의 하나의 십자가와 마주치며 늘 신 앞에 모이는 것을 의미하며 예배가 끝나고 나갈 때는 여러 가지 색깔 모양의 십자가 형상을 그린 스테인드글라스에 마주 서며 경건한 공간 건축을 유도하고 있다.

예배 공간을 둘러싸고 있는 전체 벽면은 수직선적인 측면과 수평선적 측면의 조화를 표현하고 있다. 제단 뒷면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향한 수직선을 높게 하고 그 꼭대기는 하늘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을 하나님의 은총과 영광의 상징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또한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이어놓는 십자가를 그 벽에 두었고 천정의 가로보를 두어 수평선적 측면을 최대한 살리려고 한 것을 볼 수 있다. 교회 창문에 있는 스테인드글라스에 새겨진 십자가가 뜻하는 것은 2000년간 교회의 선교를 위해 십자가를 진 사람들의 후계자로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역사의 현장으로 나가는 것을 뜻하고 있다.

경동교회는 특이하게도 예배당 정문이 건물 앞에 위치하고 있지 않다. 정확히 말하면 교회 옆면에 위치한다. 이것은 골고다 언덕을 상징하는 벽돌 계단을 통해야 예배당 정문에 도착한다는 의미를 주기 위한 건축으로 볼 수 있다.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랐던 것처럼 교인들도 한 계단 한 계단 밟으며 명상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설계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예배당에 들어서면 마치 카타콤에 들어온 느낌을 받는다. 내부를 동굴처럼 둥글게 설계하고 노출콘크리트로 마감 지하무덤(카타콤)의 이미지를 느끼게 한다. 이것은 로마제국으로부터 박해받는 가운데에서도 카타콤에서 은신하며 예배를 올렸던 기독교 정신을 되살리기 위한 건축으로 볼 수 있다.

이런 형태의 교회건축이 지어질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담임인 여해 강원룡 목사와 경동교회가 가지는 독특한 성격 때문이다. 강 목사와 경동교회는 한국 개신교의 여러 교파 가운데 진보적인 그룹에 속한다. 그들이 추구해 온 신앙은 역사의 현장 속에서 교회는 무엇인가 라는 물음과 그 물음에 대한 응답이었다. 이런 생각은 당시 한국 교회의 프로토 타입을 찾고 있었던 김수근의 생각과 부합됐다고 볼 수 있다.

김수근은 이미 마산 양덕성당을 지었기 때문에 이를 바탕으로 대지조건과 건축주의 요구에 맞게 성당을 변형한 경동교회를 건축하게 된다. 경동교회는 도시 맥락과는 완전히 단절된, 오히려 차별성이 강조되는 형태의 건물이다. 교회의 옥상 채플은 공간건축에서 제안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교회 측에 의해 매우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진 개념의 공간이다.

이것을 보고 당시 경동교회의 담임인 강원룡 목사는 “두 가지 의미, 즉 인간과 하나님,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자연의 관계와 아울러 전피조물과 함께 드리는 예배와 축제를 뜻한다”고 받아들였다.

김수근에 따르면 “인간끼리의 친교만을 강조하는 교회, 신성(神性)을 잊고 있는 교회에서 인성(人性)보다는 신성을 먼저 느끼고 그다음에 다시 인성을 느끼는 것”이 종교건축의 가장 중요한 사항이라고 했다. 이처럼 경동교회는 같은 시기에 지어진 다른 교회들과는 달리 기독교 문화를 교회건축을 통해 표현하는 새로운 시도를 한 교회라고 평가 받는다. 특히 성당 양식의 변형과 적용, 불교적 색채까지 함유한 교회건축으로 80년대 한국 개신교 교회건축의 일면인 신고딕양식의 건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페인트에 덧입혀진 노출콘크리트 ‘자유센터’

▲ 페인트칠 등 여러 손상들에도 불구하고 원형을 유지하면서 여전히 인상적인 건물로 남아있는 김수근의 자유센터.

경동교회에서 신라호텔을 지나 남산방향으로 오르다 보면 왼편에 한국자유총연맹이 들어서 있는 건축물이 나온다. 이는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해 1963년 건립된 ‘자유센터 아시아 반공연맹’(이하 자유센터)으로 더 잘 잘린 곳이다. 대한민국 건국 이래 처음으로 지어진 본격적인 국가적인 기념비였을 뿐 아니라, 근대건축의 어휘를 구사해 집단적 가치와 이데올로기를 표상하고자 한 구조물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자유센터는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제3공화국 정부 들어서 최초로 시도된 대규모 공공 건축물이었다. 아울러 냉전 시대에 반공국가 대한민국의 위상을 과시하려는 목적에서 지어진 동시대의 상황을 증언하는 건축물이기도 하다.

 

1954년 6월에는 반공운동을 국제적으로 발전시키자는 취지로 진해에서 ‘아시아반공연맹’의 창립회의가 열렸다. 1962년 5월 제2차 임시총회에서는 교육연구기관인 ‘자유센터’를 서울에 설치키로 하고 자유센터를 본부 청사로 건립한 것이다. 1962년 11월에는 국가 보조금 1억원과 와 국민 모금 1억5000만원으로 공사에 착수했다. 국가 보조금은 박정희가 기업들에게 거둔 돈이다.

▲ 김수근의 자유센터 초기 스케치.

1963년 완공된 자유센터는 세 개의 시설로 이루어진 복합 시설(complex)로 처음에는 자유센터 본관과 17층의 숙소(국제자유회관: 현 반얀트리호텔), 국제회의장으로 계획했다. 그러나 그 중 국제회의장은 자금 부족으로 짓지 못했다. 1964년 8월 15일에 개관했지만 숙소인 국제 자유회관은 재정난으로 골조만 지어진 채 방치되었다가 관광공사에 팔려 호텔로 용도 변경돼 문을 열었다. 1969년에는 218실 규모의 타워호텔이란 이름으로 개관했다. 호텔이 17층인 것은 6.25 참전국이 16국인 데다 우리나라까지 합쳐 17이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유센터는 당시 국내 최대 규모의 건축 공사에 해당했다. 당시 한국의 건설 기술 사정은 몹시 열악했다. 대형 노출 콘크리트 구조물을 지어본 경험이 일천했다. 국내 시멘트가 아닌 일제 시멘트를 수입해 사용했다. 콘크리트를 성형하기 위한 거푸집 재료에도 수입 목재가 사용됐다. 이미 노출 콘크리트로 워커힐 힐탑바를 지은 바 있는 김수근은 기술자들을 가르쳐가며 어렵고 생소한 공사를 이끌어 갔다고 한다.

자유센터의 노출 콘크리트가 지닌 솔직하고 힘찬 표면의 재료미는 지금은 회색빛 도는 옅은 녹색계 페인트로 피복되면서 본래의 야성적 질감을 상실했다. 후면의 입면에 원래 없던 아치

형 창틀을 비롯한 유리 창호의 부착은 원래의 조형성을 대폭 훼손시켰다는 지적을 받는다. 천장 표면은 군데군데 얼룩이 끼어 퇴락한 티가 역력하다. 외부 공간 역시 자동차 극장으로 사용되는가 하면 이승만의 동상이 세워지는 등 많은 곡절이 있었다. 이런 여러 손상들에도 불구하고 자유센터는 원형을 유지하면서 여전히 인상적인 건물로 남아있다.

<참고문헌>

- 문화재청(2017), 2017년도 제4차 근대문화재분과위원회 회의록
- 문화재청(2017), 2017년도 제3차 근대문화재분과위원회 회의록
- 문화재청(2017), 등록문화재 등록 예고문(문화재청 공고 제2017-159호)
- 문화재청 홈페이지(2017), 등록문화재 등록예고('구 조선식산은행 충주지점' 등 3건) 이의제기
- 이효중(2007), 한국 개신교 교회건축 문화 연구-1980, 90년대를 중심으로, 성균과대 일반대학원 비교문화협동과정 비교문화전공 박사논문
- 강혁(2012), 김수근의 자유센터에 대한 비평적 독해(건축역사연구 제21권 1호 통권80호), 경성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문화지평]

서울시비영리민간단체(도시문화콘텐츠연구·답사‧아카이브 전문단체)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2016), 역사도시 서울답사(2017), 서울 구석구석 톺아보기(2018), 2천년 역사도시 서울 진피답사(2019), 서울미래유산 시장 관광자원화 아카이빙(2019), 서울 첫 종교건축물과 주변 근대 건축물 답사‧아카이빙(2020), 물길 따라 점·선·면으로 잇는 서울 역사(2021), 김중업과 김수근, 현대건축 1세대 궤적을 쫓아서(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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