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로 통에 남겨진 김중업·김수근의 흔적 [문화지평 답사 아카이브]

문화지평l승인2021.12.12l수정2021.12.12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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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지평은 서울시 건축문화활성화사업 ‘김중업과 김수근, 현대건축 1세대 궤적을 쫓아서’를 진행했다.

[미디어파인 칼럼=김중업과 김수근, 현대건축 1세대 궤적을 쫓아서] 문화지평은 김중업과 김수근의 건축유산을 둘러보는 서울시 건축문화 활성화사업을 수행했다. 이번 사업은 도시인문콘텐츠·디지털 헤리티지 아카이빙 전문단체인 문화지평이 서울시 건축기획과의 후원으로 ‘김중업과 김수근, 현대건축 1세대 궤적을 쫓아서’란 주제로 진행했다. 5회 차 답사는 김중업의 세실극장, 기업은행 본점, 구 명보극장, 김수근의 오양빌딩, 세운상가 등을 찾아 답사했다. 답사는 8월28일 오전 9시 김태휘 해설사 해설로 세실극장 옥상인 세실마루부터 시작했다.

명동극장 사라지자 공연장으로 용도 탈바꿈

▲ 성공회서울주교좌성당 별관은 일명 세실극장이라고 불리는데 옥상 세실마루를 개방했다. 사진은 세실극장 입구에서 김태휘 해설사가 건축문화답사 설명을 하는 모습.

세실극장 옥상을 공개한 줄 몰랐다. 시민들에게 내어 준 아주 좋은 공간이다. 서울 시청 일대 풍광을 조망하기 적합하고 무엇보다 성공회서울주교좌성당을 가까이서 볼 수 있어서 감회롭다. 세실마루 아래는 김중업이 설계한 세실극장이다.

세실극장은 성공회주교좌성당 별관으로 1973년에 처음 구상됐다. 당시 성공회는 군사 정권의 탄압을 받아 사제들이 잇따라 연행되고 예배까지 방해받는 등 사회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또 자립을 위해 재정을 확충할 필요성이 있었다. 이에 따라 성공회는 별관을 지어 임대료 수입을 얻고자 했다. 그래서 당시 유신체제에 반대해 프랑스에 추방당해있던 건축가 김중업에게 건물 설계를 의뢰했다.

1950년대와 60년대에는 사람 이름으로 회사를 설립할 수 없었다. 그러나 당시 김중업은 그의 이름으로 설계사무소를 차린만큼 능력을 인정받은 건축가였다. 5.16군사쿠데타 이후 박정희 대통령이 그를 청와대로 불러 김중업에게 함께 국가 개발을 할 것을 제안했지만 김중업은 거절했다. 이후 광주대단지 사건으로 1971년 프랑스로 추방당하게 된다.

그는 프랑스에서 머물면서 설계 작업을 계속했다. 세실극장이 있는 성공회 별관 건물의 설계도 그런 과정 속에서 이루어지게 됐다. 도면을 우편으로 받아서 한국의 김중업설계사무소 직원이 감리와 건축을 했다. 그러나 설계사무소의 자료가 많이 소실됐고 특히 세실극장 자료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김중업의 처남이었던 안병의가 세실극장 현장에서 감리와 건축을 지휘했을 것이라고 추측이 있다.

▲ 세실극장 입구 계단에서 문화지평 답사팀이 단체사진을 찍는 모습.

대한성공회 이재정 신부는 “초기 설계는 7층 건물의 팔각정으로 덕수궁과도 조화롭게 설계됐다. 하지만 성공회에서 이 설계도를 가지고 서울시에 허가를 득하고자 했을 때, 서울시는 이를 불허한다. 덕수궁 옆 고도제한이 그 이유였다. 당시 정부에 의해 추방당해있던 김중업의 설계였기 때문에 이런저런 핑계로 건축 자체를 방해하고 설계를 변경할 것을 요구했었던 것으로 추측한다”고 말한다.

처음 구상했던 건물 용도는 시청 주변 대기업들이 주주총회 등을 할 수 있는 회의장이었다. 그러나 이재정 신부는 건축 과정 도중 명동 국립극장이 없어진다는 소식을 듣고 이 공간을 복합문화공간으로 이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 공간을 문화공간으로 사용하면서 일종의 문화사업 투자 개념으로 할 것을 제안했다.

극장으로 운영하게 되면 사무실 공간보다 임대 수입이 떨어지기 때문에 당시 성공회 운영위원회의 반대가 심했다. 그러나 당시 교무국장인 이두성 국장과 이천만 초대 대한성공회 주교를 설득해 공연장으로 사용을 허락받아 성공회의 ‘구세실’ 주교의 이름을 따서 ‘세실극장’이라고 지어졌다.

동·서를 축으로 해서 서쪽에 8각형 사무실(5층)이 놓이고 동쪽에 이보다 낮은 층고의 극장 무대가 배치된 것은 기존의 경사진 대지를 반영한 결과다. 서쪽의 사무실이 8각형으로 된 것은 성공회성당의 라틴크로스(세로 길이가 가로길이보다 긴 십자형 평면)에 조화시키기 위한 의도다. 김중업은 원래 16각형으로 계획했었으나 공사 도중 지금과 같이 8각형으로 된 것이다. 극장의 남쪽 벽이 예각으로 꺾인 것은 인접한 덕수궁 돌담과 조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한편 1976년 4월 19일에 세실극장이 개관함으로써 한국의 소극장운동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세실극장은 전속 극단 없이 민간이 대관 전용 극장으로 개관한 공연장이다. 연극뿐 아니라 전통, 무용, 음악 등 다양한 공연을 펼칠 수 있는 최초의 민간 공연장이었다. 개관 당시 세실극장은 총면적 약 315㎡(95.4평), 좌석수 312석, 입석 50석 규모로 지었다.

세실극장은 한국 연극문화는 물론 시대적 현대사, 건축‧문화예술의 가치를 간직하며 명맥을 유지해왔다. 그러나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지난 2018년 1월 폐관했다. 서울시는 42년 역사의 세실극장을 문화자산으로 보전하고 그 기능을 유지하기 위해 민‧관 상생의 ‘문화재생’을 통해 2018년 4월 세실극장을 재개관해 운영 중이다. 시가 장기임대하고 극장을 운영할 비영리단체를 선정해 재임대하는 방식이다.

세실극장은 지난해 옥상을 도심 속 시민휴식공간으로 개방했다. 총 566㎡ 규모 세실극장 옥상에는 벤치와 그늘막, 녹지 공간이 곳곳에 조성됐다. 지상에서 옥상으로 바로 이어지는 엘리베이터도 만들었다.

세실극장 옥상에서 바라보면 오른쪽으로는 덕수궁이, 왼쪽으로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멋진 대한성공회 성당이 눈앞에 보인다. 정면에는 세종대로와 서울시청, 서울도시건축전시관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세실극장 옥상 시민휴식공간 개방은 서울시의 ‘정동 역사재생활성화사업’의 하나로 이뤄졌다. 이 사업은 정동이 품은 대한제국(1897년~1910년)의 역사성과 장소성을 회복하고 정동 일대를 명소화해 지역의 가치를 알리고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다는 취지다.

생전 김중업은 세실극장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 작품은 내가 한국서 가장 아끼고 싶은 성공회대성당과 더불어 한 쌍을 이루어 길이 남기고 싶은 심정에서 충심으로 제작했다. 어떠한 고사(高師)한 보물이기보다는 알뜰한 한 알의 구슬을 만들고자 한다. 귀해서가 아니라 싱싱하고 멋이 있기에 또한 누구나가 손에 만져보고 싶고 호주머니에 넣어 흐뭇해 보일 수 있도록…. 그렇기에 이 작품은 선뜻 눈에 들어 아름답고 깨끗하여 좀처럼 잊히지 않을 인상을 지녀야 하고 구석구석이 짜여서 쓰면 쓸수록 정이 붙어야 한다. 건축물이란 한낱 실용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창조해 내는 예술작품이기에….”

을지로 재개발의 산물 중소기업은행 본점

▲ 김중업이 설계한 중소기업은행 본점은 ‘을지로 2가 16-17지구 재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들어섰다.

‘중소기업은행 본점’은 ‘을지로 2가 16-17지구 재개발 사업’으로 들어선 3개 건물 동(棟) 중 하나다. 과거 대한주택공사는 장교동과 을지로 2가에 빽빽하게 들어서 있던 낡은 한옥과 좁은 골목을 헐어내고 재개발을 추진했다. 이를 위해 1983년 3월 현상설계를 통해 재개발 안을 공모했다.

그러나 당선작 없이 현암빌딩, 장교빌딩(쁘렝땅 백화점), 중소기업은행 본점 등 세 개 빌딩으로 단지를 조성했다. ‘중소기업은행 본점’은 재개발되기 전 이 일대 골목에서 느낄 수 있었던 정취를 살리면서 재생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1층 부분을 필로티로 처리해 전면의 을지로 거리와 후면의 장교마당을 자연스럽게 연결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기법은 건물의 앞뒤를 활기찬 공간으로 만들 뿐만 아니라 을지로와 중앙광장 사이의 보행자 동선을 연결시켜 은행으로 사람들을 흡입하도록 하는 효과도 가져온다. 지하층 부분에는 김중업의 다른 작품에서도 자주 보이듯 연못이 딸린 정원이 만들어져 있다. 건축과 조경을 전공한 김태휘 해설사는 자신도 비슷한 형태의 정원을 만들어 본 경험이 있다고 했다. 그도 프랑스에서 공부를 해선지 알게 모르게 일정 교감을 갖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본다.

건물은 동서로 긴 대지 여건으로 인해 길어진 평면의 양측에 코어를 뒀다. 이를 통해 사무공간의 유효면적이 증대되도록 했다. 또 1층에 넓은 로비는 은행을 찾는 고객에게 친근함과 개방감을 갖도록 했다. 건물의 외관은 선돌의 이미지를 연상시키고 있다. 멀리서도 매우 굳건하고 당당하게 서있는 느낌을 준다.

최상층 부분을 경사지게 처리한 것은 김중업의 건축 특징 중 하나다. 전통건축의 지붕 일부분을 연상시킨다. 특히 파란색 계통의 커튼월 유리면과 검은 색 알루미늄 패널 마감은 지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깊은 인상을 주면서 각인효과를 가져온다. 특히 12층 부분을 투명한 서스펜디드 글라스로 개방해 변화를 주는 외장을 시도했다. 지하 4층, 지상 20층 규모이며 철골철근콘크리트 구조와 무량판 구조다.

중소기업은행 본점은 1980년대 이후 김중업이 한국에서 실현한 고층사무실이다. 이것은 김중업이 ‘을지로 16-17지구 현상설계’에 당선되면서 그 대가로 설계를 맡게 됐다. 김 해설사는 “ 현상설계 공모에서 김중업의 원통형 건물을 포함해 세 팀이 공동 당선되는 바람에 이들이 각각 하나씩 맡아서 설계하게 됐다. 김중업은 이 가운데 을지로 쪽에 있는 건물(현 중소기업은행 본점)을 담당했다”고 설명했다.

김중업은 이 현상설계에 참여하면서 청계천 건너편에 있는 ‘삼일로빌딩’과 이들을 연계시켜 도심 쇼핑몰을 만들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건물 설계가 세 팀으로 분산됨에 따라 이런 생각은 단지 세 건물의 중앙광장을 만드는 것으로 그치고 만다. 김중업은 이 건물을 통해 1970년대부터 발전시켜온 고층 건물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실현하려 했으나 결론적으로는 별다른 특징 없는 평범한 건물이 되고 말았다.

이 건물의 평면은 르 코르비지에가 1930년대에 파리에 설계한 ‘구세군회관’ 평면과 매우 유사하다. 삼각형의 뾰쪽한 끝이 건물 양쪽에 나있고 여기에 각종 동선시설들이 덧붙여졌다. 그리고 단면에서 볼 때 건물 상부를 경사지게 하였는데 이런 형태는 그가 이전에 설계한 여러 프로젝트에서 이미 예고되고 있었다. ‘한국교육개발원 신관’, ‘아나백화점’, ‘아나아트센터’는 이런 단면 모양이 실현된 대표적인 예다.

김중업은 사무소 건물 내부에 이런 경사처리를 함으로써 몇 가지 의도를 실현하려 했다. 먼저 경사진 부분을 부분을 통해 내부지만 특인 공간감을 주려고 했다. 두 번째는 이것을 통해 그가 당시 매우 집착하였던 온실과 태양열 방식을 형태적으로 상징하고자 했다. 이런 의도들은 ‘한국교육개발원 신관’의 계단실에서 그대로 구현된 바 있었다. 그러나 중소기업은행 본점 건물에서는 건물상부에 두꺼운 테두리가 올라서서 전체적으로 약간 둔중해 보인다.

김중업의 건축예술 훼손한 명보극장

▲ 명보극장 초기 건축 장면과 50년대부터 현재 모습까지 시대별 변화 모습.

1950년대 후반기는 한국전쟁 후 극도의 빈곤과 사회불안이 만연한 문화 부재의 암울한 시대라 할 수 있다. 당시 김형민 초대 서울시장과 전 주한 미8군 사령관인 벤 프리트 중장은 시민들에게 문화, 오락 및 휴식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국제 수준의 문화공간을 마련하기로 하고 이를 위해 건립한 것이 바로 ‘대한극장’이다. 비슷한 세워진 대표적인 극장건물로는 ‘국제극장’과 ‘명보극장’이 있다.

명보극장은 김중업의 건축으로 1957년 8월25일 임시개관했다. 공사 초기에는 명보가 아닌 명성극장이었다. 임시개관은 명보극장으로 했다. 김중업은 건축주가 비상구 등 12곳을 임의로 설계 변경해 저작권이 훼손했다고 반발했다. 그러나 시교육위원회는 9월말까지 구비하도록 하고 개관을 허용해 물의를 빚었다. 김중업은 성명을 통해 “극장 당사자 측이 건축예술가의 설계를 무시하고 황당무계한 기형적 건물을 준공시켰음은 공공연한 저작권 침해”라고 지적했다. 더구나 당국의 사용허가 없이 개관했기 때문에 폐문(閉門) 조치를 당한다. 일주일 만에 재개관했다.

1977년 영화배우 신영균에 의해 인수됐다. 1994년 ‘명보프라자’로 개명하면서 국내 최초 복합상영관으로 개장했다. 2001년 내부 개보수와 더불어 옛 명성을 되찾고자 ‘명보극장’으로 바꿨으나 대기업 복합상영관의 진출과 경쟁으로 인한 경영 악화로 2008년 4월30일 폐관했다. 2009년 복합 문화 공간인 ‘명보아트홀’로 재개관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전통과 서양건축 접목한 김수근의 ‘오양빌딩’

▲ 서울시 중구 명동9길 구 외환은행 본점 옆에 준공된 지상 6층의 오양빌딩은 한국 전통과 서양건축을 접목시켜 탄생시킨 작품이다.

답사팀은 청계천 남쪽 김중업 건축을 둘러본 후 김수근 건축 답사를 이어갔다. 을지로 입구에 있는 오양빌딩(현 쌍용빌딩)은 복잡한 명동 초입에 위치해 있어서 눈여겨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십상이다. 오양빌딩은 서울시 중구 명동9길 구 외환은행 본점 옆에 준공된 지상 6층의 건물로 지금은 쌍용빌딩이라고 한다.

오양빌딩은 김수근이 1962년에 설계하고 완공시킨 건물이다. 건물 전면이 도자기로 장식돼 있고 노출 콘크리트 기법을 사용했다. 도자기 장식은 화가, 서양화가, 판화가, 도예가로 활동한 현대 미술가 정규(1923-1971)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외벽에 한국의 도자기와 소품 등 한국적 전통을 살린 예술성이 담겨 있으며 콘크리트의 질감과 도조 장식에 의해 예술적 가치가 돋보이는 건축물로 명동을 방문하는 관광객에게 볼거리를 제공해 주고 있다.

노출 콘크리트 양식은 1960년대에 김수근이 제작한 작품의 특징으로 당시의 근대 건축물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노출 콘크리트 작품들은 그의 스승인 요시무라 준죠(일본)와 르 코르뷔지에(프랑스), 프랑크 로이드 라이트(미국)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1967년에는 미국의 BOA은행 서울지점이 오양빌딩에 입점해 송금 및 환거래 업무를 했다. 이는 국내에 진출한 외국은행으로는 다섯 번째를 기록이다. 1977년에는 쌍용프린트가 정전기가 발생하지 않는 특수 견직물을 개발해 오양빌딩에 대형 직매장을 개설했다. 오양빌딩은 원래 업무시설로 설계됐으나 현재는 쌍용빌딩이란 이름으로 임대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오양빌딩은 대지 373.6㎡, 건축 면적 259.11㎡, 연면적 1,853.06㎡로 건축됐다. 지하 1층과 지상 6층으로 구성돼 있다. 빌딩 관리는 재단법인 일주학술문화재단에서 하고 있다. 오양빌딩은 1960년대 한국의 건축 양식을 알 수 있는 건축물임과 동시에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 김수근이 한국 전통과 서양건축을 접목시켜 탄생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국적 도시상황 최초 접목한 ‘세운상가’

▲ 세운상가 앞에서 답사 마무리 사진을 찍고 있다.

세운상가는 2차 세계대전 말 전시적 목적으로 조성된 소개공지대 위에 세워진 한국 최초의 도시건축 프로젝트였다. 중구청 이을삼 계장이 작성 한 ‘중구청 행정연구서’의 ‘대한극장~청계천 4가 간 계획도로 정비방안’을 위한 제안을 시작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조국근대화, 김현옥 서울시장의 불도저식 추진력 그리고 건축가 김수근의 새로운 도시건축에 대한 실험정신이 결합한 작품이다.

건축가 윤승중은 당시 ‘공중 보행 데크’, ‘인공대지’, ‘아트리움’, ‘지상 자동차 공간’, ‘도시단위와 선형블럭’의 도시․건축적 계획원칙을 토대로 세운상가를 설계했다고 한다. 또한 비평가들은 세운상가의 건축 언어에 대해 르 코르뷔지에의 ‘유니테 다비타시옹’에서 등장 한 필로티와 시설의 복합화, 스미슨 부부의 ‘골든 레인 주거단지’의 핵심 개념인 공중가로와 유사하다고 평하기도 한다.

세운상가가 건설될 당시 해외에서는 새로운 도시계획과 건축적 경향이 두각을 드러낸 시기였으며 1960년대 말은 신문, 잡지 등을 통해서 이러한 해외의 새로운 도시건축 패러다임이 자연스레 유입됐던 시기였다. 세운상가는 동시대 세계적 흐름으로 형성된 새로운 도시계획과 건축적 경향을 1960년대 말 한국적 상황 속에서 직간접적으로 프로젝트에 반영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세운상가의 건축적 특징을 동시대 새로운 도시계획과 건축적 경향을 통해 분석해보면 우선 세운상가 건설 당시 계획원칙 자체가 외국의 새로운 경향을 그대로 수용 했다기보다는 당시 한국적 도시적 상황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했다는 점을 파악할 수 있다.

도시건축적 어휘를 한국적 상황에 맞게 변형하거나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했다는 점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건설사, 서울시, 건축가 간 상호 이해관계가 어긋나 제대로 구현되지 못했지만 세운상가는 그 자체가 1960년대 한국의 도시적 상황을 이해한 상태에서 동시대 새로운 도시계획과 건축적 경향을 통합적으로 적용한 최초의 건축물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세운상가는 퇴계로에서 을지로와 청계천로를 거쳐 종묘 앞에 이르는 길이 1km의 남북 축을 따라 들어선 20세기 한국 근대사가 남긴 ‘콘크리트 유적’이다. 세운상가의 이름은 김현옥 시장이 ‘세계의 기운이 이곳으로 모이라’라는 의미에서 지었다고 한다. 세운상가는 세운, 현대. 청계, 대림, 삼풍, 풍전(호텔), 신성, 진양상가를 통칭한다.

1967~72년에 걸쳐 완공됐으니 길게는 54년 된 건축물이다. 지금은 호텔로 리모델링된 삼풍상가를 지나면 본격적인 전자상가가 시작되는 대림상가로 들어서게 된다. 1960~1970년대 전자전기 의류 잡화 등 식료품을 제외한 거의 모든 소비재를 취급하며 백화점이 무색할 정도로 번성했다. 상가계단을 아래위로 오르내리며 체험할 수 있는 거대 상가군의 독특한 구조는 물론 을지로 인쇄소 거리, 청계천로 공구상가, 종로의 노점거리도 서울의 축을 따라 걸을 수 있다.

세운상가는 최초의 주상복합아파트라는 타이틀도 가지고 있다. 세운, 현대, 청계, 대림, 삼풍, 풍전(호텔), 신성, 진양상가 차례로 건립됐다. 종로에서 남산 방향으로 축 형태로 세워졌다. 세운상가 프로젝트는 당시로서는 매우 선진적인 계획이었다. 다만 당시 우리나라의 사회적, 경제적 상황이 미흡해 결과적으로 실패한 사례로 평가되고 있다. 김수근은 보행자데크, 입체 도시, 보행자몰 등의 개념을 넣어 추진한 것이 세운상가였다.

세운상가와 관련한 일화 한 가지를 소개한다. 일제강점기 말 일제는 미군의 폭격을 두려워했다. 그들은 식민지 한반도를 자기들의 땅으로 여기고 본토와 동일한 전쟁 준비를 했다. 그래서 도시가 폭격에 이은 화재에 소실되는 것을 막기 위해 길이 1km, 폭 50m의 공터를 만들었었다. 그것이 바로 세운상가가 세워진 소개지(疏開地)다. 한국전쟁 이후 이 공터에는 판자촌이 형성됐다. 종3 지역은 당시 전쟁의 여파로 살기 힘들었던 여성들이 생계를 위해 모여들면서 사창가가 형성됐다. 이는 1968년 세운상가의 준공이 완료될 때까지 남아 있다가 서울시 김현옥 시장의 ‘나비 작전’으로 사라졌다. 나비작전이란 성매매를 위해 찾아오던 사람들을 ‘나비’에 비유해 그들을 집중적으로 단속한 정책이다.

세운상가를 설계할 당시 김수근은 설계에 대한 기본조건 및 계획원칙을 정했다. △3가와 4가 사이 거리가 약 500m로 블록 단위로서 너무 큼→중간에 접근도로 혹은 분배도로 수준의 자동차 통로 필요 △대상지가 3가와 4가 사이의 종로, 을지로, 충무로, 퇴계로와 접해 있으나 1가와 3가 사이 지역보다 낙후→이 지역을 활성화하는 계기 및 거점이 되어야 함 △전통적인 상업 중심인 종로거리와 의상 및 패션의 중심인 충무로를 양단에 접하고 있으며, 인근에 광장시장, 동대문시장, 인현시장, 방산시장이 있음→연계되어 그 관계 속에서 새로운 보행축의 성격이 정해질 수 있음 △총 1km라는 거리는 보행 가능함으로 입체화하여 인공데크로 연결한다면 활기 있는 새로운 상업중심의 거리로 유도 가능 △인공데크, 보행자몰, 공중광장, 인공대지 등의 개념을 도입하여 입체적 복합기능을 갖는 도시적 건축 지향 △보행자몰의 주동선이 될 1km를 관통하는 공중데크를 3층 레벨에 설정하고 지상은 자동차 통로와 주차공간으로 할애 △평균 용적률이 120%정도이나 장차 도시의 입체화를 목표로 하여 총용적률을 300%로 설정, 도로를 제외한 순 용적률을 약 500%로 설정 △용적률을 높이기 위해 일부 업무기능 수용. 하지만 상층부에 중소규모의 주거를 적극 도입. 상층부 주거환경을 보장하기 위해 햇빛, 통풍 등에 유의 & 옥상정원 등을 계획 △주변 도시풍경과의 조화를 위해 8층 이내로 한정. 다만, 종로, 을지로, 퇴계로와 만나는 부분은 타원형으로 고층화→시각적 변화와 공간 확보 △프로젝트를 도시 개발의 일반해적인 차원으로 이끌어 감 등이다.

이 계획에서 중요한 것은 당시의 건축에서 새로운 개념이었던 기반시설(인프라스트럭처)의 도입이다. 여기서 인프라란 경제 활동의 기반을 형성하는 기초적인 시설과 시스템으로 도로, 항만 등을 말한다. 자동차 전용도로 및 보행전용도로, 보행자를 위한 상가 거리 등은 단순히 세운상가의 건립이 하나의 건축물로써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도시 체계 속에서 유기적인 건축물로 작용하기를 목적하고 계획됐단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새로운 건축의 경향은 1922년 르 코르뷔지에가 밀집화 된 도시부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발표한 도시계획의 원리인 ‘300만 명을 위한 도시계획’에서부터 시작된다. 세운상가는 김수근도 르 코르비지에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건축물인 셈이다.

<참고문헌>

- 이용재(1984), 김중업의 작품형식에 관한 분석적 연구, 명지대 석사논문
- 정인하(1998), 시적울림의 세계-김중업건축론, 시공문화사)
- 이두호(2010), 세운상가에 대한 도시·건축적 재해석, 경기대 석사논문 

[문화지평]

서울시비영리민간단체(도시문화콘텐츠연구·답사‧아카이브 전문단체)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2016), 역사도시 서울답사(2017), 서울 구석구석 톺아보기(2018), 2천년 역사도시 서울 진피답사(2019), 서울미래유산 시장 관광자원화 아카이빙(2019), 서울 첫 종교건축물과 주변 근대 건축물 답사‧아카이빙(2020), 물길 따라 점·선·면으로 잇는 서울 역사(2021), 김중업과 김수근, 현대건축 1세대 궤적을 쫓아서(2021)

지자체‧기업‧단체 인문역사답사‧강연 진행

문화지평  moonwhajipyung@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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