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배트맨 영화라면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다크 나이트’ 트릴로지를 제외하면 팀 버튼의 ‘배트맨 2’(1992)가 최고로 평가받는다. 겨울날 고담 시 귀족 집안에서 오스왈드(대니 드 비토)가 태어나지만 돌연변이인지라 부모가 하수구에 버린다. 그는 고담 지하 깊은 곳에서 펭귄들과 33년을 보낸다.

대기업을 운영하는 맥스(크리스토퍼 월켄)가 뒤에서 시장을 조정하고 있다, 시장이 맥스를 선전해 주는 행사가 열릴 때 오스왈드와 부하들이 나타나 난동을 부리고 맥스를 체포해 간다. 오스왈드는 이제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와 떳떳하게 살고 싶다며 그걸 도와달라고 하고 맥스는 제안을 받아들인다.

맥스는 여론 조작을 통해 시장을 탄핵하고 오스왈드를 스타로 만든 뒤 새로 선거를 치러 오스왈드를 시장 자리에 앉히려 한다. 맥스는 여비서 셀리나(미셸 파이퍼)를 폭행한다. 그러나 그녀는 밤거리 고양이의 정기를 받아 나약하던 모습에서 탈피, 강인한 정신력과 체력을 갖춘 캣우먼으로 거듭난다.

펭귄은 캣우먼에게 연합해서 배트맨(마이클 키튼)을 물리치자고 연합전선을 제안하고, 그녀는 받아들인다. 겉으로 보면 배트맨 대 오스왈드+캣우먼+맥스의 대결 구도이지만 그렇게 녹록한 내용이 아니다. 이 영화는 전술한 네 명의 주인공 외에 시장, 그리고 고담 시(민), 그리고 지하 세계로 이뤄진다.

대부분의 인물은 이중적이다. 재벌 브루스 웨인은 셀리나와 적당히 즐기고 싶기도 하고, 고담의 균형과 발전에 이바지하고 싶다. 하지만 밤이면 박쥐 가면을 써야 하는 자신의 현실에 대해 고뇌한다. 왜 정상적인 치안은 이다지 약하기만 한 걸까? 그에 비교하면 오히려 오스왈드가 당당하다.

그는 맥스에게 “우리는 둘 다 괴물이라는 공통점을 갖췄다. 그런데 너는 존경받고 난 아니라는 비극적 아이러니에 처해 있다. 나도 너처럼 위에서 태어났지만 지하에 오래 숨어 살았다 이제 나갈 때이다. 너처럼 존경받고 싶고 내가 누구인지, 내 부모와 이름을 찾고 싶다.”라고 그동안의 한을 털어놓는다.

또한 배트맨과 다툴 때 “가면을 쓰고 다니는 주제에 뭘 솔직한 걸 원해?”라고 핀잔을 준다. 바로 배트맨의 결정적인 핸디캡을 꼬집는 것이다. 외면으로만 따진다면 오스왈드가 가면을 써야 한다. 그는 기형인 손을 가리기 위해 장갑을 끼고 땅 위로 올라오지만 곧 벗는다. 자신의 외모에 대해 당당하다.

셀리나는 핍박 받고 불평등한 대우를 받는 이 시대 여성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그녀는 분명히 보좌관이라고 주장하지만 모든 남자들은 그냥 여비서로 치부한다. 바로 능력 위주로 평가하지 않고 성별로 구분 짓는 이 사회적 편견의 음지에 내팽개쳐진 여성이다. 그래서 그녀의 기본 권리는 일탈로 회복된다.

높은 도수의 안경과 전형적인 오피스 복장 벗어던지고 파격적인 고양이 패션으로 규정과 관습의 틀을 깨뜨린다. 그녀는 웨인을 좋아하지만 배트맨에 대해서는 경쟁적, 배타적이다. 배트맨이 정의를 추구한다지만 결국 그 역시 떳떳하게 정체를 밝히지 못하는, 캣우먼과 별다를 바 없는 밤의 나그네이기에.

웨인이 기사도와 신사도를 가장한 기존 봉건적 남성상을 의미한다면 맥스는 자본주의로써 시대를 지배하는 신흥 부르주아지 귀족이다. 그는 산업 폐기물 몰래 버리는 등 비도덕적이고 불법적인 일을 은폐하면서 돈을 버는 일이라면 가리지 않았다. 시장이라는 권력에 정치 자금을 대며 조종했기 때문이다.

시장은 우유부단한 철새형 정치인이다. 처음에는 시민을 위한 정치를 펴겠다는 나름의 정치 철학을 갖고 등장했지만 현실의 벽 앞에서 자신의 무능을 깨닫고 자본에 굴복했다. 우리나라에서 예전부터 지금까지 흔하게 볼 수 있는 정치인의 데자뷔이다. 고담은 ‘바보들의 도시’라는 뜻의 뉴욕의 별칭이다.

고담 시민들은 맥스의 프로파간다에 속아 그나마 고담을 지키려는 마지막 양심이 남아 있던 시장을 축출하고 오스왈드를 그 자리에 옹립하려 한다. 고담 시 자체가 악이고, 시민들은 그것을 구성하는 구조주의의 일부분일 따름이다. 언더그라운드의 범죄자들은 비록 주류에서 밀렸지만 양심은 남아 있다.

맥스와 관계가 틀어진 오스왈드가 최후의 테러로 시의 모든 아이들을 유괴하라고 하자 한 부하가 “그럴 필요까지 있냐?"라고 반발한 시퀀스가 말해 준다. 그 소외자들은 정치가와 자본가 등 기득권 세력이 결탁한 자본주의의 기세에 밀려 쓰레기처럼 하수구로 버려진 빈민층을 의미한다.

서양인에게 고양이의 생명은 9개로 알려졌다. 낮과 밤의 이중생활에 고뇌하고 회의하던 웨인은 마지막에 캣우먼 앞에서 가면을 찢고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만 셀리나는 끝까지 제 얼굴을 감춘 채 “이제 더 이상 내가 누구였는지 생각나지 않는다.”라고 말하며 떠나 배트맨 대신 밤을 방황한다.

마냥 뷰티에 머물렀던 그녀는 고양이 가면을 씀으로써 내면에 잠재되어 있던 비스트를 깨어나 양면을 겸비한 제2의 배트맨이 된 것이다. 바로 여성의 자립니다. 버튼이 더 이상 ‘배트맨’ 시리즈를 연출하지 않은 것은 배트맨이 가면을 찢은 것으로 충분히 설명된다. 버튼의 ‘배트맨’은 더 이상 있을 수 없다.

귀족 돌연변이 오스왈드와 재벌 맥스의 관계는 바로 이 자본주의 사회의 비극적 아이러니이다. 그래서 펭귄의 무기가 항상 우산이라는 건 블랙 코미디이다. 과연 사람들은 사회적 겉모습이 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가, 아니면 가면(페르소나) 뒤에 감춘 내면의 자아가 진짜인가? 플라톤의 침대와 동굴이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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