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곽재용 감독이란 이름은 ‘엽기적인 그녀’(2001, 488만여 명)와 ‘클래식’(2003, 154만여 명)으로써 한때 국내 로맨틱 코미디의 간판 격이었지만 그게 전부였다. 이후 매 작품마다 기대는 주지만 번번이 그걸 무너뜨리는 대명사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번의 ‘해피 뉴 이어’는 다르다.

예전보다 발랄함은 떨어지지만 원숙함이 있다. 과감함은 부족하지만 안정감이 크다. 뫼비우스의 띠에서 아르키메데스의 나선으로 변화했다. 서울 한복판 EMROSS 호텔. 캡틴 소진(한지민)은 15년째 고교 동창생 승효(김영광)의 프러포즈를 기다리다 지쳐 자신이 먼저 고백할까 망설이고 있는 중이다.

그녀의 고교생 남동생 세직은 수영 선수인데 같은 같은 학교 남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인 아영에 대한 마음을 숨기고 있다. 소진은 동창 모임에 참석해 승효와 술을 마시다가 그로부터 할 말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설레지만 피아니스트 영주(고성희)와 엠로스에서 결혼한다는 말에 애써 실망감을 숨긴다.

엠로스 대표 용진(이동욱)은 선친에게 사랑을 못 받았다는 콤플렉스를 지녔지만 물려받은 호텔만큼은 잘 지키고 싶다. 집의 보일러가 동파되자 호텔 스위트룸에 투숙한다. 그런 그의 방을 정리하던 비정규직 하우스키퍼 이영(원진아)을 만난다. 그녀는 뮤지컬 배우의 꿈을 갈무리한 채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다.

택배 일을 하며 공무원 시험을 준비해 왔지만 5번째 떨어진 재용(강하늘)은 연인으로부터 이별 통보를 받자 되는 일 하나 없는 인생을 정리하기 위해 하숙방을 빼 엠로스에 투숙한다. 연말을 보낸 뒤 투신하려는 것. 그러나 우연히 모닝콜 여직원과 통화를 한 뒤 하루 더 생명을 연장하겠다고 마음을 바꾼다.

재용의 방을 청소하던 이영은 구깃구깃한 그의 유서를 발견하고 용진에게 보고한다. 호텔에는 비상이 걸리고 어떻게든 그의 투신을 막기 위해 여러 가지 해프닝을 배치해 둔다. 오랜 무명 끝에 전성기를 맞은 가수 겸 DJ 강(서강준)은 함께 고생해 온 매니저 상훈(이광수)과의 계약 기간 만료를 앞두고 있다.

가진 게 없는 상훈은 큰돈으로 강을 흡수하려는 거대 기획사의 물량 공세에 속수무책일 따름. 괴롭지만 보낼 마음의 준비를 한다. 엠로스 도어맨 상규(정진영)는 호텔에 들어오는 첫사랑 봉영(이혜영)을 40년 만에 만난다. 그녀는 캐서린으로 개명을 하고 나름대로 상류 사회에서 살고 있었다.

젊은 시절 상규가 실수로 감옥에 들어가는 바람에 불가항력적으로 헤어졌고, 이후 각자 결혼했지만 사별하고 현재는 둘 다 혼자이다. 둘은 옛 추억을 더듬으며 황혼의 낭만을 즐기고, 캐서린은 늦게나마 인연을 다시 시작하자고 하지만 상규는 아내의 영혼이 허락해 줄지 모르겠다며 망설이는데.

등장인물이 많아 처음에는 집중과 적응이 쉽지 않지만 결코 짧지 않은 러닝 타임(138분)이 흘러갈수록 빠져들게 된다. 세상에는 수많은 만남과 다양한 종류의 사랑이 있지만 결국 ‘이루어질 것은 이루어진다.’라는 숙명론이 이 작품의 큰 줄기이다. 아예 작정하고 이 시기를 겨냥해 만든 기색이 역력한데 그래서 더욱 아름답고 따뜻하다.

소진은 ‘정말 이 시대의 젊은이가 맞을까?’ 싶을 정도로 답답하게 ‘썸’을 타 왔다. 승효 역시도 비슷한 감정이었지만 서로 ‘지킬 것은 지키느라’ 결국 양쪽 모두 자신의 속내를 끝끝내 감춘 채 승효가 새 인연을 만났다. 진호(이진욱)는 매주 토요일 엠로스 커피숍에는 맞선을 보지만 매번 퇴짜를 맞는다.

멀쩡한 외모에 직업은 성형외과의. 정말 부족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보이는데 왜 맞선에서 성공하지 못할까? 그 이유는 참으로 답답했다. 하지만 이런 사람이 남아 있다면 아직 세상은 아름답다는 증거이다. 아직 살 만하다는. 막상 제 머리 못 깎는 소진이 승효와 진호에게 프러포즈와 맞선에서 성공하는 팁을 가르쳐 준다는 것도 아이러니.

용진은 누가 봐도 결벽증이다. 스스로 강박증 환자임을 인정하니까. 그의 강박증 중 압권은 짝수이다. 뭐든 짝수로 갖고, 이뤄져야 한다. 아마 그건 어려서 아버지의 사랑을 못 받는다고 오해했기 때문일 것이다. 외로움의 강박증. 저마다 결핍과 콤플렉스를 지녔던 인물들은 원하던 것을 이루거나 최소한 차선책을 찾는다.

이런 낙관주의적 결정론은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불편하거나 비현실적으로 비칠 수도 있다. 그러나 솔로몬 반지의 ‘이 또한 지나가리니’는 단 한 번도 어긋난 적이 없다. 소진은 하이힐의 한쪽 굽이 빠지자 다른 한쪽 굽마저 빼려 한다. 여자의 힘으로 쉽지 않을 때 진호가 홀연히 나타나 그걸 해 준다.

소진은 당당히, 편하게 걷지만 고객들 앞에서는 뒤꿈치를 들고 마치 하이힐인 양 ‘품격’을 지키려 한다. 그녀는 재용의 자살을 막기 위해 세직의 첫 키스를 그에게 ‘헌납’하게 하는 ‘만행’까지 저질렀지만 정작 자신의 감정을 끝까지 숨김으로써 제 품위를 유지한다. 물론 승효도 우정으로 그걸 모른 체한다.

“강박증 없어요?”라는 용진의 질문에 이영은 “그런 것 없어요. (모든 걸) 그냥 받아들이고 살아요.”라고 반발한다. 자꾸만 다가오는 그에게 그녀는 “제발 거기에 계세요. 제게서 신경 꺼 주세요.”라고 거부한다. 이 영화가 아름다운 것은 이영과 재용 등 이 시대 젊은이들의 고뇌를 외면하지 않기 때문이다.

비정규직부터 실업 문제, 그리고 모든 기업의 직원에 대한 가치 판단 문제까지 바람직하게 상생하는 고용의 숙제에 대한 질문은 진지하다. 마지막까지 깜짝 놀랄 만한 카메오들이 등장하는 가운데 강하늘이 특유의 귀엽고 순박한 캐릭터로 재미를 보장한다. 대한민국의 ‘러브 액츄얼리’의 탄생. 29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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