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선과 악의 대결 구조를 그린 상업 영화의 결말은 대부분 권선징악형이나 개과천선형으로 나뉘기 마련이다. 전자는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주고, 후자는 마음 따뜻한 훈풍을 불어 준다. 일부러 다소 엉성한 손 그림 같은 스타일을 추구한 애니메이션 ‘리틀 뱀파이어’(조안 스파 감독)는 후자 쪽이다.

10살 아들을 둔 미망인 판도라는 사악한 왕자가 강제로 결호하자고 하자 망자들의 선장에게 도움을 청한다. 모자는 뱀파이어가 되어 유령선에 승선한다. 왕자는 아들을 마귀에게 제물로 바치고 판도라와 결혼하려 했었다. 마귀는 먹이를 되찾아 달라며 왕자를 몬스터 킬러 기버스로 만들어 준다.

리틀 뱀파이어 모자와 선장, 그리고 몬스터들은 바닷가 한적한 마을의 공포의 집에서 300년 동안 사람들의 눈을 피해 평화롭게 잘 살아왔다. 그런데 리틀 뱀파이어는 이제 매일 영화만 보는 것이 지겨워 또래 인간 소년들과 학교에 다니고 싶어 한다. 그러나 판도라가 그걸 허락할 리 만무하다.

그러자 한밤중 애완견 반트마투와 함께 몰래 집을 빠져나온 그는 한 초등학교 교실에 들어가 마이클이 놓고 간 수학 공책을 보고는 숙제를 대신 풀어 준다. 그리고 그 공책을 통해 편지를 주고받으며 둘은 친구가 된다. 어느덧 마이클이 공포의 집에 놀러 올 정도로 둘은 막역한 사이가 된다.

한편 300년 동안 판도라 등을 찾아다닌 기버스는 나약한 사람들을 벌레 괴물 카와이로 만들어 부하로 활용해 왔다. 드디어 새 카와이 하나가 마이클의 집에 리틀 뱀파이어가 들락날락한다는 정보를 기버스에게 전해 주고, 공포의 집에 사는 모든 몬스터들은 위기 상황에 처해 공포에 떠는데.

이 작품은 호불호가 극명하게 엇갈릴 가능성이 높다. 우선 디즈니 등 할리우드의 세련된 그림체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이 키치적 그림체가 마음에 안 들 가능성이 높다. 캐릭터는 기괴하거나 낯설고, 붓 터치는 어설프거나 풋내가 날 정도이다. 그러나 유소년 관객이라면 친숙함에 매우 반가워할 듯.

리틀 뱀파이어의 침실에서 ‘Nosferatu’라는 미장센이 보인다. 최초(1922)의 장편 흡혈귀 영화의 제목이다. 그래서 그의 외모는 ‘노스페라투’의 주인공과 많이 닮았다. 선장은 ‘캐리비안의 해적’을 떠올리면 쉽겠다. 프랑스와 벨기에의 합작이지만 프랑스 스타일보다는 할리우드 스타일에 가깝다.

애니메이션이라고 해도 나름의 배수의 메시지는 있다. 이 작품은 영생과 사랑, 그리고 정상과 비정상은 무엇인가를 묻는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비현실적인, 전설과 상상 속의 존재자들이다. 진짜 그런 괴물이 있어서가 아니라 보편적이고 흔한 인물과는 다소 동떨어진, 특별한 개체의 환유인 것이다.

그래서 뱀파이어 모자는 사람의 목을 물어뜯는 것이 아니라 병원에서 훔친 환자용 혈액으로 연명한다. 그 외의 몬스터들 역시 능력만 인간보다 특출할 뿐 행동하고 사고하는 건 별로 다르지 않다. 판도라 모자가 살기 위해 선택한 뱀파이어라는 정체성 역시 진짜 흡혈귀라기보다는 색다른 환경을 뜻한다.

과연 삶과 죽음은 무엇인가? 선장은 리틀 뱀파이어에게 “영원한 삶에는 대가가 따른다.”라고 충고한다. 몬스터들이 거리를 두자 마이클은 자신도 죽어서 몬스터가 되겠다며 몬스터들에게 죽여 달라고 애원한다. 그러나 리틀 뱀파이어가 그걸 저지한다. 아마도 실체 이원론을 말하고 싶었던 듯하다.

이 이론은 영혼과 육체가 함께 공존하면서도 서로 분리되어 있다는 이원론을 말한다. 과연 나는 내가 죽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건 플라톤의 영혼불멸설이 맞아야만 가능하다. 그리고 그걸 뒷받침하는 건 신체 이원론이다. 내 영혼이 타자가 인식하든, 그렇지 않든 불멸해야 내 죽음을 볼 수 있다.

이 작품 속의 세계는 이른바 산 자와 망자가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면서 공존할 수 있는 유토피아이다. 즉 삶과 죽음을 초월한 세상이다. 시작부터 판도라와 소년을 뱀파이어로 만드는 건 이 이야기를 이끌어가기 위함인데 사실 죽음에 대해 그토록 두려워하거나 부정적으로 여기지 말라는 함의도 담겨 있다.

‘하이랜더’ 시리즈를 비롯해 ‘트와일라잇’ 시리즈 등 흡혈귀를 소재로 한 수많은 작품들은 영생이 괴롭다는 것을 토로한 바 있다. ‘하이랜더’의 주인공 코너는 수백 년 동안 젊은이로 지내면서 사랑하는 여자를 세월에 수도 없이 떠나보낸 것을 가슴 아파하며 살고 있다. 영원하다는 건 지겹다는 것.

여기서 이야기하는 ‘영원한 것에 대한 대가’는 바로 그 지겨움이다. 그래서 리틀 뱀파이어는 공포의 집을 지켜 주는 실드를 뚫고 밖에 나갔다가 기버스에게 노출되는 위험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 사랑. 사랑은 구속이나 복속이 아니라 오히려 방생이고 배려이다. 내 사랑에는 내 희생이 뒤따른다.

왕자가 판도라를 사랑하고 말고는 그의 자유이다. 하지만 그 사랑을 표현하거나 이루려고 할 때는 반드시 판도라의 동의와 동감, 즉 같은 사랑의 감정이 필요하다. 분노나 동정 같은 감정은 일방적일지라도 상대방에 대한 쌍방향의 행위가 가능하다. 하지만 특히 사랑 같은 감정에서 일방통행은 절대 불가이다.

그건 선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인어의 자신을 향한 감정을 이용해 그동안 그녀를 뱃머리에 구속해 부려 왔다. 그런 그녀를 진실한 마음으로 자유롭게 풀어 주는 인물이 안타고니스트라는 점에서 참으로 착하고 아름다운 성선설적 구문론을 구사하는 페미니즘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오늘 개봉. 전체 관람 가.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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