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지평은 서울시 건축문화활성화사업 ‘김중업과 김수근, 현대건축 1세대 궤적을 쫓아서’를 진행했다.

[미디어파인 칼럼=김중업과 김수근, 현대건축 1세대 궤적을 쫓아서] 문화지평은 김중업과 김수근의 건축유산을 둘러보는 서울시 건축문화 활성화사업을 수행했다. 이번 사업은 도시인문콘텐츠·디지털 헤리티지 아카이빙 전문단체인 문화지평이 서울시 건축기획과의 후원으로 ‘김중업과 김수근, 현대건축 1세대 궤적을 쫓아서’란 주제로 진행했다.

9회 차 답사는 김중업이 설계한 건축물에 들어선 김중업건축박물관을 답사했다. 답사는 10월 16일 오후 3시 김태원 김중업건축박물관장의 해설로 시작했다. 이날 답사팀이 둘러본 박물관 1층은 리모델링을 앞둔 상황이어서 곧 사라질 역사적 시간의 한 층을 답사하는 기회를 가졌다. 박물관 내부 해설투어가 끝난 후에는 김태휘 역사문화해설사와 김 관장이 나란히 앉아 김중업의 건축 세계에 대한 좌담회도 이어졌다.

안양의 기원 위에 세워진 또 하나의 역사

▲ 김중업건축박물관은 그가 설계한 초기 작품 유유산업 안양공장을 리모델링한 건물에 들어섰다. 이곳은 안양이란 지명의 기원인 안양사 절터이기도 하다. 사진은 존치된 김중업 작품 4개 건물동.

김중업건축박물관은 안양에 있다. 김중업이 설계한 유유산업 안양공장을 리모델링한 건물에 들어섰다. 유유산업 공장은 그의 초기 작품이다. 공장건물에 조각 작품을 접목시키는 등 독특한 형태를 갖고 있다. 지금은 그의 작품 중 김중업건축박물관과 안양박물관, 교육관, 수위실 등 4개 동이 현존하고 있다. 이를 리모델링해 전시관과 사무동, 교육관 등으로 사용 중이다.

부지 내에는 중초사지 당간지주와 고려시대 삼층석탑 등 문화재가 있다. 4차에 걸친 발굴조사로 안양(安養)이란 지명 유래가 된 고려시대 안양사(安養寺) 명문기와가 출토됐다. 유적은 공장시설 밑에 위치해 있고 외부 대지 아래에도 묻혀 있다. 여기에 김중업의 건축유산까지 시차를 두고 수직적으로 유적들이 중첩돼 있다. 그래서 발굴과 보존, 복원이라는 정 반대의 입장이 충돌하는 곳이기도 하다.

위치는 정확히 안양시 만안구 석수1동 212-1번지 외 4필지다. 대지 면적 1만6,243m², 연면적 7,753m², 건축면적 4,283m², 건폐율 26.37%, 용적률 47.45%, 용도는 제1종 일반주거지역이다. 박물관이 들어선 부지는 과거 50년 간 유유산업이란 제약회사의 공장으로 사용되어왔다. 김중업의 건축유산이 남아 있는 데다가 2009~2010년 사이 진행된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안양사 위치와 지층, 유적이 발견됐다.

계획대지인 유유산업 부지에는 보물 4호인 중초사지 당간지주와 경기도 유형문화재 164호인 고려시대 삼층석탑이 남아있어 관련된 유적이 존재할 가능성이 높은 지역으로 평가가 받아왔다. 그리고 1959년에 지어진 건축물부터 1998년 개축한 건축물까지 다양한 시기에 걸쳐 증개축 된 19개 동의 산업 시설이 있었다.

그중 김중업이 설계한 유일한 산업시설인 사무동과 공장동 등 4개 동이 남아 있어 근대문화유산의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2007년 안양시는 유유산업으로부터 안양 공장 부지를 매입했다. 안양박물관, 김중업건축박물관을 비롯한 복합 문화예술공간으로의 활용을 계획했다.

이를 실행하기 전 2회에 걸친 문화재지표조사가 이뤄졌다. 2009년 6월 18일부터 10월 6일까지 실시된 1차 발굴조사에서 강당지와 승방지, 동회랑지, 남회랑지 등이 확인됐다. 2010년 6월 8일부터 진행된 2차 발굴조사에서는 금당지, 전탑지, 답도, 중문지 등이 추가로 확인됐다. 두 차례 발굴조사를 통해서 중초사지 당간지주가 위치한 지역이 안양의 지명유래가 된 고려 태조가 세운 안양사라는 것이 실증됐다. 아울러 중문-전탑-금당-강당-승방으로 이어지는 안양사 가람배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한편 박물관은 리모델링을 했기 때문에 과거 전시를 되짚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안양시는 김중업 선생의 유족 측으로부터 2007년부터 3차례에 걸쳐서 200여 점의 건축 자료를 기증받았다. 여기서는 작가 유품인 작가노트, 훈장, 상장, 관련 사진뿐만 아니라 작품과 관련된 설계도 CD, 모형, 필름 등이 포함돼 있다.

건축가로 최초의 작품전 개최한 이력

▲ 1957년 4월 김중업은 건축가로서는 최초 개인전이었던 ‘김중업건축작품전’을 개최했다. 연도상 당시 작품전에 출품했을 법한 부산대 본관(1956년 설계) 앞에서 포즈를 취한 김중업과 건대 도서관(현 언어교육원).

한국 건축을 대표하는 1세대 건축가 김중업은 한국 전쟁 때 부산에 머무르다 1952년 베니스에서 열린 제1회 세계예술가회의에 참석했다. 이것이 김중업에게는 새로운 기회를 가져다줬다. 세계예술가회의에서 명예위원으로 온 프랑스 파리 출신의 건축 거장 르 코르뷔지에를 만난 것이다. 김중업은 귀국을 하는 대신 파리로 건너가 르 코르뷔지에를 찾아갔다.

김중업은 그의 아틀리에에서 약 3년간 일하며 현대건축에 대한 시야를 키웠다. 이후 1956년 귀국해 서울 종로구에 김중업건축연구소를 설립한 뒤 르 코르뷔지에에게 배운 내용을 한국적 현실에 맞게 재해석했다. 김중업은 귀국 첫 해에 부산대학교본관, 명보극장, 건국대학교 도서관을 설계했다. 또 인천해무청사 등의 계획안을 진행했다. 이때 건축계는 그에 대해 “한국전쟁 후 부족한 물질적 기반 위에 세워진 한국 건축계의 한계를 넘어 모더니즘과 한국의 전통을 결합한 독창적인 작품을 선보였다”고 평가했다.

특히 김중업은 예술 기반의 건축을 추구했다. 건축가로서는 최초의 개인전이었던 ‘김중업 건축 작품전’을 개최했다. 국전 심사위원을 역임하는 등 건축가의 작가적 입지를 알리는 데 힘썼다. ‘김중업 건축 작품전’은 김중업건축연구소를 설립한 후 1년가량이 지난 시점인 1957년 4월에 열렸다. 당시 건축 작품을 전시한다는 것이 흔한 일이 아니었기에 전시 감상이 언론에 실리기도 했다.

조선일보는 4월 19일 자 4면 머리기사로 ‘신선한 현대적 감각’이란 제목의 이경성의 감상문을 실었다. 이경성은 국립현대미술관장을 지낸 미술평론가다. 이경성은 이틀에 걸쳐 상‧하로 감상을 내보내는 등 건축가의 작품전을 미술평론가가 들여다본 희귀한 기록을 남겼다. 물론 글은 매우 현학적이고 한자가 뒤섞여 문해가 쉽지 않다. 요는 한국의 근대건축이 공장에서 찍어낸 것 같이 식상하던 차에 김중업의 작품은 귀한 작품이란 것이다.

김중업 건축미학에 대한 작은 좌담회

▲ 이날 박물관 해설투어를 마치고 ‘김중업 건축미학’에 대한 작은 좌담회를 열고 그의 건축 여정을 되짚는 시간을 가졌다.

이날 박물관 해설투어를 마치고 진행한 ‘김중업 건축미학’ 좌담회에서는 그의 건축 여정을 되짚는 시간을 가졌다. 1971년에는 광주대단지 필화사건을 비판하다 중앙정보부에 의해 강제 추방돼 프랑스 파리로 떠난 ‘흑역사’를 시작으로 굴곡 많던 그의 건축 인생을 들여다봤다.

김 해설사는 “추방 직전 발표했던 ‘삼일빌딩’은 후기 대표작 중 하나로 빠르게 개발되는 서울의 모습을 상징하고 있다. 1978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김중업의 건축은 사회 구조의 변화 속에서 미래주의적 면모를 띄게 된다. 그러나 유토피아적 이상을 꿈꾸었던 그의 말년 계획안들은 대부분 실현되지 못했고 ‘올림픽 세계평화의 문’이 유작으로 남게 됐다”고 그의 말년을 이야기했다.

특히 “‘올림픽 세계평화의 문’은 한국 전통 문의 개념을 도입했으며 문 앞쪽 마당에는 괴면 두상 조각을 얹은 열주가 길게 나열되어 있다. 이는 미술작가 이승택이 제작했는데 예술가와의 협업이 돋보이는 대목”이라고 평가했다. 김중업은 주한 프랑스 대사관에서도 옛 기와 조각과 자기를 부숴 관저 외벽 장식으로 모자이크를 하는 등 한국적인 조형성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고 평했다.

사실 김중업은 미술적 재능이 뛰어났다. 평양고등보통학교시절 공부도 잘했지만 미술과 시에도 심취했다. 당시의 미술교사인 니노미야라는 일본인은 그의 미술적 재능을 인정해 교내 미술부장을 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사회적 분위기와 시나 미술에 심취하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은 집안 분위기 때문에 뜻을 펴지 못했다. 김중업은 니노미야 선생과 상의한 후 건축을 하기로 결심하고 아름다운 건축에 시를 입히는 미학을 추구했다.

1987년 11월 10일 김중업설계연구소에서 정림건축 조인철 건축사와 나눈 대담에서 그의 건축관이 폭넓게 드러난다. 아티스트적 관점에서 자신의 미적 건축관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클라이언트를 설득하고 또 설득해야 한다는 것이 요지다.

“건축가는 설득을 많이 하는 인간의 하나겠지, 설득을 하다 하다 안되면 집어치우는 수들도 많으니까. 그러니까 일단 설득을 하려고 애써요. 설득을 하려고 애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은 소위 그 사람이라든가 그 건축을 위해서 그것을 하는 거지. 그런데 그러다 보니까 어떻게 됐냐 하면 고집이 세다든지 무슨 소위 클라이언트의 말대로 안 한다든가 이제 이런 역효과도 나타나는 거지. 그런 얘기들도 나타나는 거고 일부는 사실이야. 그건 왜 그런가 하면 일단 나는 내가 만든 작품을 아끼고 또 그 작품의 이런 점을 소중히 하기 때문이야. 그래서 그런 설득이라는 것은 건축가한테는 절대적으로 요청되는 미덕의 하나겠지, 그 미덕을 버린다는 건 아티스트가 아니야! 그러니까 아티스트라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창조하는 인간이지, 창조한다는 것은 일회성의 작품을 만든다는 얘기고 말하자면 거기에 하나밖에 있을 수가 없는 거고 그걸 소중히 여기니까. 오히려 나야 클라이언트를 소중히 하는 사람의 하나지, 클라이언트를 위해서 건축을 하는 거니까”

철거로 사라져 버린 제주대 본관

▲ 1995년 철거된 한국 건축의 모더니즘을 연 제주대 본관과 모형. 모형은 김중업건축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제주대학교 본관은 김중업이 생전에 “20세기에 지어진 21세기의 건축물”이라며 “길이 남겨 두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고 할 정도로 자부심이 들어있고 아끼는 작품이었다. 김중업이 설계한 대학건축의 백미였다. 제주대학교 옛 본관 터는 바다와 인접한 들판이었고 한 때는 비행장으로 사용했던 곳이다.

1964년 설계한 이 작품은 1965년 국전(國展:대한민국 미술전람회)에 출품할 정도로 예술적 완성도가 높았다. 지금의 건축디자인과 비교해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파격적이었다. 그만큼 시대를 앞서 나간 건축물이었다. 제주대 옛 본관을 시작으로 한국 건축에 본격적인 모더니즘이 수용됐다고 할 정도다. 그래서 ‘한국 모더니즘 건축의 효시’로 불렸다. 하지만 우여곡절도 많았다.

정부 예산이 제때 내려오지 않아 공사가 늦어져 1970년에야 완공됐다. 설계 당시 정확한 건물명은 ‘제주대학 법문학부’였다. 도서관과 교수연구실, 회의실, 박물관, 학생식당, 행정실이 포함된 다기능 복합시설로 건축연면적 1900㎡에 4층 규모였다. 2층과 3층을 연결한 경사로의 기하학적인 곡선은 바다가 가지는 생명력과 제주의 역동적 이미지와 부합했다. 교수 연구실로 사용했던 3층은 마치 날아가는 비행기나 바다 위에 떠 있는 선박을 연상시켰다.

김중업은 자서전인 ‘건축가의 빛과 그림자’의 표지 앞뒤로 주한 프랑스 대사관과 제주대 옛 본관의 사진을 게재했다. 그가 사랑하는 대표작이란 의미를 담은 것이다. 그러나 바닷가에 지은 건물은 염분 섞인 해풍을 견디지 못했다. 게다가 염분이 많은 바다모래로 콘크리트 타설을 하는 바람에 철근이 쉽게 부식됐다. 한술 더 떠서 내부 공간의 잦은 변경으로 누수현상이 발생했고 붕괴 위험도 제기됐다. 1984년에는 보수공사를 통해 창틀이 아치형에서 장방형으로, 건물 외벽은 미색으로 바뀌었다.

이때부터 건물을 둘러싸고 보존과 철거 논쟁이 벌어졌고 건축계의 핫이슈로 부상했다. 건축계와 지역 문화계가 뭉쳐서 보존 운동을 전개했지만 지루한 논쟁이 3년간이나 이어지면서 붕괴위험은 더 강해졌다. 이 과정에서 대학당국은 주체적 입장을 견지하지 못했다. 건물 활용에 난색을 표하거나 보수비용도 확보해 놓지 않은 상태였다. 안전진단을 거쳐 1995년 제주대 옛 본관은 철거돼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예술성과 상징성, 역사적 가치를 모두 담은 채 돌가루가 되어버린 것이다. 한국 현대 건축의 효시, 모더니즘의 서막을 열었던 근대 건축이자 예술작품이 사라진 것이다. 이 건물과 함께 김중업이 설계한 제주대학교 옛 서귀포캠퍼스의 농학부 본관과 도서관, 그리고 수산학부 본관도 모두 철거됐다.

김중업은 생전 “근대건축계 있어서는 르 코르뷔지에의 롱샹 교회와 가드리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만이 나를 꽉 붙잡고 영락없이 사로잡았다. 작품을 빚는다는 엄청난 짓이 여간 두렵지 않다. 근대에도 이러한 벅찬 작품들이 있기에 세계는 아직도 희망을 걸만도 하지 않는가.”란 메모를 남겼다. 제주대 본관은 아마도 그에게 ‘벅찬 작품’이었을 것이다.

<참고문헌>

- 김중업건축박물관 홈페이지
- 국립현대미술관(2018), 한국 건축계의 모던보이 <김중업 다이얼로그>
- 조인철(정림건축)(1997), 기획연재-한국의 건축가-김중업. 건축사

[문화지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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