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지평은 서울시 문화본부 문화정책과 미래유산팀 후원으로 ‘동서남북 서울미래유산 만보답사’란 주제로 네 차례 답사와 아카이빙을 진행했다.

[미디어파인 칼럼=전수정의 서울 프롬나드] 도시인문콘텐츠·디지털 헤리티지 아카이빙 전문단체 문화지평(대표 유성호)은 서울미래유산을 둘러보는 답사와 아카이빙을 수행했다. 이번 사업은 문화지평이 서울시 문화본부 문화정책과 미래유산팀 후원으로 ‘동서남북 서울미래유산 만보답사’란 주제로 네 차례 진행했다. 문화지평은 이번 사업을 통해 △시 외곽 서울미래유산 자원 탐방 답사 △동서남북 시 외곽에 산재한 서울미래유산 영상·텍스트 아카이브 △서울미래유산 어반 스케치 및 온·오프 전시활동 등 다양한 아카이빙 활동을 했다. 네 차례 답사를 1인칭 시점으로 기록한다. <편집자 주>

주말 아침이면 한껏 게으름을 피우곤 했는데 오늘은 평소와 다름 없는 시간대에 휴대폰 알람 소리의 도움을 받아 눈을 떴다. 아직은 어두운 하늘이 짧아진 하루를 짐작케 한다. 허기진 몸을 다독이며 난생 처음 천호역으로 향했다. 지하철 5호선은 서울 둘레길을 걷거나 광화문 교보문고에 갈 때 종종 탑승했었으나 천호역은 처음이다. 어떻게 가는 게 이동 시간을 줄일 수 있을지 고심했으나 4호선을 타든 7호선을 타든 걸리는 시간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이럴 때면 조금이라도 더 익숙한 방법을 택하는 게 정답이라며 4호선, 5호선 순으로 갈아타는 방법을 이용했다.

오늘은 많은 것을 보는 쪽보단 많이 걷는 쪽에 가까웠다. 강동구에 존재하는 서울미래유산은 드문 드문이라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을 테지만, 서로 간의 거리가 상당했다. 한 때 1만 보 걷기를 우습게 알았으나 코로나19가 시작된 이래 행동반경이 다소 좁아져 체력 부족을 제대로 느꼈다. 특히 발바닥을 스미는 고통은 혹 내 발이 평발은 아닌지를 의심케 했다. 그래도 중간에 이탈한다거나 쏟아지는 졸음을 주체 못할 지경은 아니었으니 다행이다.

또한, 오늘은 목적한 바를 샐 틈 없이 기록하기보다는 낯섦에 시선을 드리우는 쪽에 치중했다. 앞서 나는 천호동은 처음이라고 확신했는데, 걷다 보니 여러 차례 한강을 넘나들 때 이용했던 광진교를 건너기도 했다. 서울둘레길 코스를 바지런히 따르는데 급급한 나머지 주변을 둘러볼 여유를 가지지 못했다는 걸 뒤늦게 깨달을 수 있었다. 출발 지점에서 그다지 멀지 않았던 곳에 놓인 '도미부인상'이 특히 그랬다. 참고로 서울 둘레길은 광진교가 끝나기 직전에 우회전을 한다.

광진교 초입 교명주는 미래유산감

▲ 광진교 남쪽 초입에는 도미부인상과 다리의 역사를 알려주는 교명주가 있다. 광진교 교명주는 서울미래유산감으로도 의미가 있다.

광진교 초입에 우뚝 홀로 솟은 도미부인의 모습은 왠지 어색하고도 초라했다. 이곳에 세운 이래 왠지 관리를 하지 않은 듯 고개를 들어 바라보기가 무섭게 내 눈에 거미줄이 포착되기도 하였다. 도미라는 이름은 수차례 접했지만 솔직히 이야기가 바로 기억나진 않았다. 하나의 설화에 불과하다는 생각으로 진지하게 고려치 않았던 것도 하나의 원인일 테고, 부끄럽게도 시험을 치르기 위해 암기하는 일에만 몰두한 결과 모든 걸 잊게 된 듯도 싶었다.

동상 아래 새겨진 글귀에 따르면 개루왕 시절의 인물이라고 하였으나, 개로왕이 아니겠느냐는 추측도 존재한다고 들었다. 또한, 충남 보령을 비롯하여 타 지역에서도 도미 부인을 두고 제 지역 인물이라며 유치(?) 작전을 뜨겁게 펼쳤던 게 지난 2000년대 초중반의 일이라고 하였다. 모든 것에는 유행이 존재하기 마련인지라 지금은 한 풀 관심이 꺾인 상황이라고.

20년 전이라고는 하나 그래도 2000년대다. 조금은 구닥다리와도 같은 정절 같은 걸 전면에 내세우며 이 인물을 부각시키는 게 과연 시대정신에 부합하는지는 의문이 들었다. 조금은 뒤틀린 사고라 할 수도 있겠으나, 도미부인의 정절을 칭송하기에 앞서 미천한 성 감수성을 지닌 당대 지배계층을 재평가하는 게 옳다는 생각을 이야기를 듣는 내내 했던 거 같다.

▲ 광진교 남단 끝 도미부인상 건너편에 있는 서거정의 ‘광진촌서만조’ 시비.

광진교를 반 즈음 건너다가 되돌아왔다. 둘러보려던 ‘광진교 8번가’의 문 여는 시각이 12시라는 걸 깜빡해서 그랬다. 한강 다리 아래 좁은 공간에 일종의 쉼터와 공연장을 만들었다. 규모가 크진 않지만 다리 위에서와는 또 다른 한강의 모습을 내려다 볼 수 있는데다가 문화까지 덤으로 즐길 수 있으니 그 매력이 상당하지 싶었다. 운영 시간이었어도 공연장은 당분간 문이 닫힌 상태일 듯하다. 코로나19가 가져다 준 변화는 우리의 생각 이상으로 컸다.

뒤돌아 시작 지점으로 되돌아왔다. 정확히는 도미부인상 건너편으로. 다리 끝에는 한자가 가득 새겨진 게 읽기 싫게 생긴 시비가 하나 서 있었다. 서거정이 해질 무렵 강동지역 한강변에서 한강과 광나루를 바라보며 아름다운 풍경을 노래한 ‘광진촌서만조’ 시비다. 조선 시대 양반들은 풍류에 능했는데 서거정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세종에서부터 성종에 이르기까지 무려 6명의 왕을 모셨다. 사림파가 본격적으로 득세하기 전이긴 하였으나 그토록 오랜 시간동안 위정자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 건 그가 처세술에 능했다는 방증이 아닐지, 조심스러운 짐작이 가능했다.

비록 보려던 곳을 보진 못하였으나 가을을 연상시키는 푸른 하늘에 감탄하느라 아쉬움이 밀고 들어올 틈이 마음에 없었다. 촘촘히 아파트가 들어찬 구리시에서부터 마치 하늘을 떠받치고 선 듯 한 우직함을 선봬는 제2 롯데월드에 이르기까지, 크게 노력치 않았음에도 한 눈에 감상할 수 있다는 건 진정 복이었다.

골목길을 한창 따라 걸었다. 사전 답사를 진행해도 스마트폰 지도 어플을 꺼내 수시로 위치를 확인해야 할 정도로 뭔가가 부산했다. 정갈하진 않았으나 정겨웠다. 벌써 여러 해 전, 어마어마한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 등장한 배경과도 닮았지 싶었다. 아이들의 뛰노는 모습이, 노닥이는 어머니들의 목소리가 더해진다면 지금보다 더 좋았을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곡교(曲橋)'라는 이름이 붙은 어린이집을 끼고 돌았다. 우리말로 풀어 쓰면 '굽은다리' 혹은 '곱은다리'에 해당하겠거니, 생각이 이리 미치자 인근 '굽은다리역'과 '고분다리전통시장'에 왜 그와 같은 명칭이 붙었는지 이해가 갔다.

시설 규모보다 훨씬 큰 의미를 가진 ‘한국점자도서관’

▲ 한국점자도서관은 시각장애인들을 위하여 설립한 특수도서관이다.

한참을 걸은 끝에 한국점자도서관에 도착했다. 4층 정도 되는 건물로 아주 크다 할 수는 없으나 일반 공공도서관에서는 만나기 힘든 점자 도서를 다량 보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무척이나 의미 있게 느껴졌다. 아니, '점자도서관'이라는 명칭 자체가 그랬다. 한 편으로는 얼마나 이곳이 어렵게 운영될지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고정관념일 수도 있겠으나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의 삶은 척박하며, 장애인들을 위한 서비스 또한 정부 등이 마련한 공식적인 제도보다는 개개인의 선의에 의존하는 정도가 크다.

이런 나의 생각을 연혁이 뒷받침하는 듯했다. 한국점자도서관은 1969년 종로 5가 쪽에서 시작했는데, 중구 북창동, 관악구 사당동(당시에는 사당동이 관악구였다고 한다.), 강동구 성내동을 거쳐 1994년에 지금의 위치에 자리잡게 되었다. 한 곳에 우직하게 뿌리내리지 못한 게 왠지 2-3년에 한 번씩 떠도는 세입자의 삶과 닮은꼴을 하고 있었다.

지역 건강지킴이 자부심 큰 ‘노옥당약업사’

▲ 노옥당약업사는 1975년경 개업하여 2대째 가업을 이어오고 있는 한약재 판매점이다.

길을 잃지 않으려 두 눈을 부릅떴으나 타고난 길치인 나는 이내 방향감각을 상실하고야 말았다. 앞서 걷는 이들의 뒤를 부지런히 따른 끝에 노옥당약업사라는 간판이 걸린 건물 앞에 도착했다. 창업이라고 말하긴 어색한데, 처음 이를 시작한 분은 작고하셨고, 지금은 아들 내외가 이를 이어 받아 약초를 판매 중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마치 노점에 매대를 내놓고 약재를 한 가득 판매했을 테지만, 한방보단 양약을 선호하는 분위기에 밀려 장사가 예전만은 못하지 싶었다.

실제로 예전에는 건물 1층 전체가 약업사였으나 지금은 충남상회에 가게의 일부를 내어준 형국이었다. 서울미래유산 현판 또한 충남상회 위에 달려 있어 찾는데 시간이 한참 걸렸다. 그래도 관련 분야 공부를 하고 있다는 자녀분이 계시다 하니, 훗날 가업이 끊기는 일만은 막을 수 있지 않을까 막연히 기대를 품을 수 있었다. 참고로 노옥당은 약초를 재배했던 전라도 보성군 노동면 옥마리의 앞글자인 '노'와 '옥'을 딴 거라고.

다음 장소인 동명 대장간으로 향하던 중 고분다리 전통시장을 지나쳤다. 아침을 굶은 것에 비하면 아직까지 크게 배고픔을 느끼진 않았으나 시장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코끝을 파고드는 참기름 냄새 등의 유혹이 상당했다. 아직은 이른 시각이라 그런지 시장은 전반적으로 한산했다. 꽈배기 같은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는 간식류가 있었더라면 기꺼이 지갑을 열었을지도 모르겠다.

3대를 이어 땀으로 철을 벼리는 ‘동명대장간’

▲ 동구 천호동 로데오거리 인근에 있는 동명대장간은 1930년대 말에 개업하여 약 80년 동안 3대에 걸쳐 이어져 오고 있는 전통 대장간이다.

이곳에서 겨우 떨쳐낸 유혹에 다들 굴복한 건 의외로 대장간에서였다. 미국 아마존 등에서 불티나게 팔린다는 국산 호미가 눈앞에 떡하니 놓여 있는데, 게다가 대장간 내부에서 끊임없이 쿵쾅이는 철 벼리는 소리가 들려오기까지 하니 다들 호미로 손을 뻗었다.

대장간의 모습을 처음으로 직접 본 건 화개장터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 땐 사실 쌍계사까지 뻗은 길을 따라 올라가며 벚꽃 향연을 즐기는 게 주였는지라 상대적으로 초라해 보이는 대장간에는 눈길을 주지 않았다. 거대한 모텔 앞에 있어 상대적으로 앙증맞은(?) 모양새를 뽐내는 대장간 안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이 쉼 없이 불을 다루고 있었다. 한껏 서늘해진 날씨에도 불구하고 내부 온도는 상당히 높을 것으로 짐작됐다.

서울, 아니 우리나라 안에 이와 같은 대장간이 과연 몇 개나 남아 있을까. 힘든 일은 마다한다는 요즘 사람들 중 대장장이가 되어 철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에 매력을 품을 이는 그다지 많지 않으리라는 게 분명했다. 문득 예전에 들은 이야기가 하나 떠올랐다. 점점 더 기계가 인간을 대체하게 됨에 따라 현존하는 직업의 상당수가 미래엔 사라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살아남을 직종이 몇 소개됐는데, 그 중 하나가 '목수'였다. 예전부터 어른들이 입버릇 마냥 말하던 "사람은 기술을 가져야 한다"는 말의 오늘따라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거리의 풍경이 조금은 삭막한 분위기로 돌변했다. 도처가 공사장이었다. 뒷골목에는 '철거'라는 글씨가 벌겋게 새겨진 건물들이 즐비했다. 서울 둘레길을 걸을 적엔 강동구의 신축 아파트에 놀라기 바빴는데, 내가 아는 모습이 되기까지의 과정은 결코 아름답지가 않았다. 한 때 이곳에 살았을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그들이 다시 이곳에 되돌아와 거주하게 될 확률은 몇이나 될까. 도시 사람들은 언제고 떠날 준비가 돼 있다고 하지만, 서울이 고향인 나로서는 그 말에 수긍하지 않는다. 마음 주고 정 붙여 살았다면 그 곳이 곧 고향인데, 이토록 쉽게 떠나야만 한다니 마음이 아팠다.

파월 전상자를 위한 국가유공자촌 ‘십자성마을’

▲ 십자성 마을은 베트남전쟁에 파병되었다가 부상을 당한 전상자(戰傷者)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위해 강동구 천호동에 조성된 국가유공자촌이다.

약간은 요동치는 감정을 부여잡은 채 한동안 걷다가 도착한 장소는 십자성마을이었다. 국가유공자용사촌. 에너지 자립마을. 조금은 아니 어울리는 수식어들이 이 마을의 정체성을 말해주고 있었다. 주로 베트남 전쟁 당시 부상을 입거나 사망한 이들을 위해 만들어진 마을이라고 하였다. 남의 나라에서 목숨 걸고 싸우는 일은 군인이라면 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전쟁 자체가 품은 파괴력은 우리의 상상 이상으로 어마어마하다. 몸의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아물고, 흉측한 흉터로 남을 지라도 고통 또한 희미해지곤 한다. 그러나 마음은 신체와 다소 다르게 반응한다. 오랜 세월이 흘러도 마치 어제 일 마냥 생생한 기억이 우리로 하여금 현재를 살지 못하게끔 방해한다. 눈 앞에서 사람이 죽어나간다.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죽여야만 한다. 이런 걸 생각하면 전쟁은 결코 일어나서는 아니 된다.

'지속 가능'이라는 가치는 비교적 최근 부각됐다. 화석 연료에 더는 의존 말자며 태양광 도입 운동이 전개됐고, 비용 대비 효과 측면에서 많은 의문을 품게 만들고는 있으나 적어도 그 취지에는 동감하지 싶다. 환경을 지키겠다는 거창하고도 원대한 의지까지 나아가지 않더라도, 에너지 자립을 시도하는 건 얼마든 가능하다. 정부가 이곳에 집을 마련해 주었으므로, 서울시가 에너지 자립을 정책적으로 부르짖었기에 이 곳 사람들이 십자성마을에 살게 됐고 조금은 남들과 다른 시도를 행할 수 있게 됐을 수도 있겠다. 허나 우리 자신에게 미래를 상상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에너지 자립은 전쟁 아닌 평화를 꿈꾸는 것과 같은 맥락일 수도 있다.

토욜일에는 문이 굳게 닫힌다. 꼭 관계자의 설명을 들을 필요까진 없어도 현판만은 찾고 싶었다. 건물 어디에 '서울미래유산'임을 알리는 시설물이 부착돼 있는지 알 길이 없어 다소 아쉬웠다.

강북 명문고 강남 이전의 상징 ‘배재고 아펜젤러기념관’

▲ 배재고등학교 아펜젤러기념관은 근현대 유산을 보존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 정부 주도의 강남 개발로 강북의 명문학교가 강남으로 이전 추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건물 중 하나이다.

온통 '명성'이라는 글씨로 도배된 공간을 관통한 끝에 마지막 장소인 배재 고등학교에 도착했다. 사실 일전에 어마어마한 크기의 서초구 사랑의 교회를 본 기억이 있어 얼핏 본 명성교회의 규모에 처음에는 놀라지 않았다. 그런데 이게 뒤쪽으로 방향을 틀자 이야기가 달라졌다. 뾰족한 첨탑이 하늘에 구멍을 내고도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분명 도로표지판에는 '명일여고 앞'이라고 씌었는데, 건너편에 주차된 명성교회 차량이 어찌나 많았는지 표지판 글자가 잘못된 거 같다는 착각이 살짝 일기도 하였다.

배재학당은 1885년 선교사 아펜젤러가 세운 근대식 중등 교육기관이다. 배재학당이 세워지던 시절은 다수의 선교사들이 들어온 시기와도 맞물린다. 그보다 살짝 앞서 들어온 인물로 이화학당을 세운 스크렌턴 여사가 있고, 연세대학교 하면 떠오르는 인물 언더우드 또한 같은 해인 1885년 입국하였다. 최초의 위치는 여기가 아닌 서울 중구 정동이었으나, 다수의 명문고가 강남으로 이전하던 무렵 배재 고등학교 또한 강동구로 옮겨왔다. 학교 홈페이지는 이를 1984년의 일로 기록하고 있다. 지금도 정동에 가면 배재학당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 건물들이 몇 채 남아 있다.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학창 시절 운동장 조회 등을 서면 부르곤 했던 교가에는 도봉산, 백운대 등 인근의 지명이 등장하고는 했다. 아마 다른 학교의 사정도 이와 비슷한 것이, 아무래도 배산임수를 사랑하는 민족이라 그런 게 아니겠느냐며 우리끼리 우스갯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배재 고등학교의 교가는 남달랐다. 무척이나 단순한 '우리 노래합시다'라는 가사가 반복된다.

모두의 궁금증을 자아내는 '라라라라 씨스뿜바'는 대체 무언지. 글자로 접해도 독특한데, 실제 이를 들어보니 학교 교가라고는 믿기지 않는 복음성가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전통 있는 명문고로서의 위치를 지금도 유지하고 있는 배재고다. 어쩌면 남다른 교가에 대한 졸업생들의 애정 또한 짙을 듯.

오전 9시부터 부지런히 움직였건만, 긴 이동거리 때문에 시간은 1시를 훌쩍 넘겼다, 배고픔보다 좀 더 강렬한 강도의 발바닥 통증을 느꼈다. 뭐라도 먹으면서 휴식을 취하면 금방 괜찮아질 것임을 잘 알아서, 마치 모터라도 단 것 마냥 고덕역 방향으로 부리나케 이동했다. 12시에 문을 연다는 광진교 8번가를 잽싸게 홀로 구경하는 것으로 나는 오늘의 답사를 정리했다. 아까보다 더 하늘은 푸르러졌으며, 시원스레 불어오는 바람에 잘 어울리는 모양새를 띤 구름이 오늘따라 더더욱 아리따웠다.(전수정 문화지평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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