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자신의 조국 아일랜드가 처한 정치적 위기를 소재로 인간의 변하지 않는 본성을 얘기한 걸작 ‘크라잉 게임’(1992), 그런 본성에 의한 운명론과 동성애에 대한 은연중의 응원을 표시한 뱀파이어 소재의 명작 ‘뱀파이어와의 인터뷰’(1994)의 닐 조던 감독의 ‘브레이브 원’(2007))은 비교적 상업적이다.

공영 라디오 방송국 진행자 에리카(조디 포스터)는 동거 중인 연인 데이빗과의 결혼 준비로 한창 들떠 있다. 평소처럼 퇴근 후 애완견 커티스를 데리고 공원을 산책하던 두 사람은 한 무리의 불량배를 만난다. 3주간의 의식 불명에서 깨어난 에리카는 데이빗이 사망했다는 말을 듣고 모든 게 무너진다.

수사 진행 상황을 알기 위해 경찰서를 찾은 에리카는 지극히 상투적이고 형식적인 경찰의 태도에 실망해 총포상으로 간다. 그러나 신청 후 심사를 거쳐 자격증을 얻어야 구매할 수 있다는 말에 실망해 나온다. 그런 그녀에게 불법 무기상이 붙는다. 9mm 권총을 1000달러에 구매해 휴대하고 다닌다.

한밤 편의점에 들른 에리카는 이혼한 전 남편이 편의점 주인인 전 아내를 총살하고 것을 목도하고 얼떨결에 그를 쏴 죽인다. 또 다른 늦은 밤 지하철 안에서 소년과 노인에게 횡포를 부리는 흑인 불량배 2명이 칼을 꺼내자 사살한다. 형사 머서(테렌스 하워드)는 자경단의 소행으로 보고 수사를 펼친다.

머서는 지난 3년간 한 명을 추격해 왔다. 겉으로는 착한 척하지만 인신매매 등의 불법으로 축재해 온 머로우가 장본인. 에리카의 팬이었던 머서는 그녀와 급격하게 가까워져 약혼자 살해범 검거에 열의를 불태운다. 어느 날 머서는 에리카와 얘기하던 중 TV에 머로우가 나타나자 그에 대한 적대감을 표시한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머로우가 살해되고, 그 시각 에리카가 자신에게 전화를 걸었던 게 수상해 그녀의 당시 위치를 추적하는데. 전술한 두 작품 및 비교적 쉬운 최근작인 ‘마담 싸이코’(2019)보다 훨씬 상업적이다. 내용은 간단하다. 법은 에리카의 고통을 모른다. 그래서 직접 제 손으로 원수를 갚는다.

에리카는 슈퍼히어로가 아니다. 초능력을 지녔기에 호승심을 가진 것도, 불쌍한 사람을 돕겠다는 정의감에 불타는 것도 아니다. 편의점과 지하철에서 악당들을 처치한 이유는 제가 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머로우는 달랐다. 그의 죄를 증언하려던 아내를 살해했고, 의붓딸의 양육권을 가지려 하기에 죽였다.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지만 정의 구현을 위해 실행한 것이다. 총을 쏘면서 그녀는 “내 안에 낯선 이가 있다.”, “예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다. 이 낯선 이가 이젠 나이다.”라고 말하며 변화한다. 처음에는 세 발 중에 한 발만 명중시킨다. 하지만 그 후엔 손을 떨지 않고 정확하게 몸을 관통시킨다.

감독은 법치주의와 질서와 도덕이 이 사회를 구성하고, 그 체제가 인간을 지배하는 현실을 에리카, 머서, 방송이라는 세 가지 구도를 통해 통렬하게 비판한다. 영국의 ‘법의 지배의 원리’로부터 시작된 법치주의는 마그나카르타, 권리청원, 권리장전 등을 거쳐 발전했지만 히틀러의 형식주의의 폐단도 거쳤다.

물론 현대의 법치주의는 ‘모든 국가 권력은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보호할 의무를 지게 되고, 모든 법률은 이 헌법의 최고 법 가치를 실현할 때에만 법률로서의 효력을 가질 수 있다.’라는 현실적 법치주의로 완성되었다. 그런데 법의 판결은 제3자의 불만을 야기할 정도로 비현실적이라는 게 현실이다.

머서는 바로 그 법치주의이고, 행정이며, 전 국민이 약속한 질서의 표본이다. 그는 “친구일지라도 범법자라면 잡을 수 있다.”라며 자신의 정의를 웅변한다. 불의를 보면 절대 참을 수 없는 정석이다. 에리카는 공무원(입법, 사법, 행정)이 얼마나 타성에 젖어 있는지 제가 불행에 닥치고서야 깨닫는 소시민이다.

그전까지 그는 언론인으로서 그런 사회적 문제점의 근원적 문제부터 해결하는 데 얼마나 소홀했는지 몰랐었다. 그게 오랜 세월 굳어진 탓에 하루아침에 깨뜨릴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제 머리는 제가 깎기 위해 총기를 구입하고, 착한 약자들을 괴롭히지만 법을 피해 다니는 범법자들을 처단하러 다닌다.

에리카는 방송을 통해 자신의 고통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는가 하면 자경단 문제에 대한 청취자들의 양극의 논란을 방송함으로써 그걸 청취율 상승이라는 상업에 활용한다. 언론은 정론과 팩트의 보도와 그걸 통한 올바르고 건전한 여론 형성이라는 본래의 취지에서 벗어나 자본주의에 충실한 게 현실이다.

그런데 말미에 감독은 꽤 귀여운 재치를 발휘해 관객들에게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선물한다. 드디어 머서는 에리카가 연쇄 살인 사건의 진범임을 확신하고 그녀의 뒤를 쫓는다. 에리카는 데이빗 살인범의 정체를 알아내 그를 찾아가지만 오히려 죽을 위기에 처한다. 여기서 머서가 의외의 선택을 하는 것.

그건 기성도덕, 특히 기독교적으로 성립되는 근본적 원리를 부정하고 전혀 새로운 도덕의 원리에 의한 새로운 윤리를 확립하여야 한다고 주장한 니체의 무도덕주의적 입장이다. 무조건 기존 도덕에 반하자는 게 아니라 ‘가치전도’, ‘권력에의 의지’, ‘선악의 피안’의 기준에 의한 새로운 가치 정립이다.

3800년 전의 함무라비 법전, 혹은 그보다 오래된 우르-남무 법전 이후 계속 증보된 법은 아직도 수정, 보완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 그만큼 인간의 환경과 상황은 변하고, 법은 영원히 미완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종교에 반발해 함무라비의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외친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저작권자 © 미디어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