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페어웰’(룰루 왕 감독, 2021)은 외형상으로 미국과 중국의 서로 다른 문화 때문에 발생하는 인식론적 차이를 큰 줄기로 한 블랙 코미디이다. 빌리(아콰피나)는 6살 때 부모를 따라 뉴욕으로 이민 온 30살의 작가 지망생이다. 중국 창천에는 남편을 떠나보내고 리 할아버지와 사는 할머니가 있다.

여동생의 보살핌을 받는 할머니가 폐암 말기라 3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지만 이모할머니를 비롯한 가족들은 이를 숨긴다. 일본에서 사는 큰삼촌 하오빈이 아들 하오의 일본 여자 아이코와의 결혼식을 창춘에서 열기로 하자 가족들이 오랜만에 모인다. 빌리는 부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홀로 온다.

빌리의 아버지는 자신은 미국인이라며 미국에서는 시한부를 숨기는 게 불법이라고 주장하고, 일본 국적의 빈은 그래도 중국인이라며 여기서는 그렇게 하는 게 불문율이라고 맞선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결혼식을 무사히 마치고, 빌리는 진단서가 할머니 손에 들어가는 걸 막으려 필사적으로 내달리는데.

소재는 아주 흔하고, 스토리는 매우 잔잔하게 충분히 짐작할 만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사를 받은 건 일상 속에서 발견한 가족끼리의 문화적, 인식론적 차이가 풀어 나가는 플롯이 남의 일 같지 않다는 것과 골든 글로브에서 동양계 최초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아콰피나의 연기력 덕분이다.

마지막 시퀀스에서 빌리는 뉴욕의 뒷골목을 걷는다. 화이트 컬러와 블루 컬러의 백인들, 동양계 빌리, 흑인 등 다양한 인종과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뒤섞여 있다. 그게 미국이다. 그럼에도 빌리는 비주류이다. 예술계 지원금 신청은 반려되었고, 집세는 밀려 쫓겨날 지경이지만 부모의 도움을 거부한다.

감독의 자전적 스토리라고 했지만 동시에 아콰피나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녀는 중국계 미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미국인으로 태어났다. 외조부모가 중국인에 대한 편견으로 반대한 결혼인 데다 부모가 생계로 바빠 할아버지 손에서 자랐기에 완벽한 미국인도, 중국인도, 한국인도 아니었다.

미국에서 제대로 미국인 대접을 못 받고, 한자를 모르기에 중국에도 속할 수 없었던 빌리이다. 그녀는 어린 시절 중국에서의 추억을 그리워하면서도 정서적으로 미국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뉴욕 그녀의 방에도, 중국에서 묵는 호텔방에도 새 한 마리가 날아든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하고 부유하는 그녀이다.

호텔 벨보이는 그녀가 미국에서 왔다니까 속사정도 모른 채 끈덕지게 질문을 던진다. “미국과 중국 중 어디가 더 좋냐?”라고. 그녀의 어머니는 단호하게 미국이 좋다고 선언하고, 할머니는 그런 그녀가 못마땅하다. 할머니는 결혼식장에 피로연 주요리로 가재를 주문했는데 주방장은 게를 내놓는다.

이 작품이 정체성에 대해 꽤 진지한 질문을 던진다는 걸 암시하는 시퀀스이다. 우리 속담에 ‘가재는 게 편.’이라는 게 있다. 중국의 정서 역시 별로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가재와 게는 다른 점이 있지만 함께 갑각류에 속한다. 백인이든, 황인이든, 미국인이든, 중국인이든 사람인 건 매한가지라는 은유.

감독은 경험론과 합리론의 화합 혹은 통합을 꾀한 칸트처럼 미국식 실용주의와 중국식 형식주의(혹은 유교적 관념론)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할머니도 할아버지가 암 선고를 받았을 때 그걸 숨겼다. 이모할머니는 그것과 “죽게 하는 건 암이 아니라 공포.”라는 중국 속담을 들며 거짓말을 합리화한다.

매우 보편적으로, 그리고 실증주의에 입각할 때 할머니에게 3개월 시한부를 알려야 한다. 그래야 그녀는 지난 제 삶을 정리하고, 못다 한 것은 매조져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극히 당연한 듯한 논리이지만 거짓말이 선의적일 때는 예외적으로 용납될 수도 있다는 반대급부의 테제가 슬며시 끼어든다.

“중국은 곡하라고 사람을 고용한다.”라는 이모할머니의 대사이다. 가족들을 데리고 할아버지 묘소를 찾은 할머니는 가져온 과일과 포장 음식의 껍데기를 일일이 까서 차려 놓아야 할아버지가 와서 잘 먹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그게 망자에 대한 도리이자 자기만족이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할머니는 온 가족의 이름을 일일이 열거하며 할아버지에게 그들을 잘 부탁한다고 기도한다. ‘중국파’들은 미국인이 진실을 말하려는 것은 책임을 지고 싶지 않아서라고 해석한다. “동양에서 한 사람의 삶은 여러 사람의 것이고, 할머니 대신 그 짐을 지는 게 우리 책임이다.”라고 주장한다.

결혼식을 끝내고 미국으로 돌아가려는 빌리에게 할머니는 “중요한 건 무슨 일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느냐이다.”라고 충고하며 용돈 봉투를 건넨다. 아버지의 도움 제안도 거절한 서른 살의 빌리에게 할머니의 용돈은 의미가 다르다. 그건 가족으로서의 정이고, 할머니와 손녀는 영원하다는 뜻.

미국 시민권자라고 완벽한 미국인이 아니듯, 중국 피가 흐른다고 미국인이 중국인이 될 수는 없다. 만물은 유전(流轉)한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논리와 정확하게 부합한다. 그가 ‘우리는 한 번 들어간 강물에 다시 발을 담글 수 없다.’라고 주장한 것처럼 우리는 한 번 보낸 인생을 되찾을 수는 없다.

과거를, 미래를 위한 동인과 동력으로 삼아 씩씩하게 현재를 살아가고 또 살아 내야 한다는 할머니의 조언이다. 줄곧 흐르는 허밍 BGM이 황량한 느낌을 주다가도 갑작스레 웃음을 유발하는 블랙 코미디가 매력 만점인 정물화 같은 작품. 만나면 헤어지기 마련(회자정리)이다. 어떻게 헤어지느냐가 중요하다는 게 제목의 숨은 뜻. 마지막 의외의 반전 시퀀스는 감독의 자기 정체성의 선언이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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