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1500억 원의 제작비와 SF적 스케일을 자랑한 영화 ‘인피니트’(안톤 후쿠아 감독, 2021)는 그러나 유사한 제목의 ‘어벤져스: 인피니트 워’와는 비교도 안 될, 시간이 남아돌 때에나 볼 만한 실패작이다. 전생을 기억하는 윤회자인 인피니트가 500여 명이 있는데 니힐리스트와 빌리버 두 파로 나뉜다.

1985년. 니힐리스트를 지휘하는 배서스트(치웨텔 에지오포)는 지겨운 윤회를 막기 위해 전 인류를 멸절할 에그를 발명한다. 그러나 빌리버를 지휘하는 트레드웨이는 멸망을 막기 위해 에그를 탈취하고, 그 과정에서 죽는다. 현재. 조현병을 앓는 에번(마크 월버그)은 매일 밤 마치 현실 같은 꿈에 시달린다.

정기적으로 약을 먹어야 하지만 직업이 없는 그는 돈을 마련하기 위해 도검류 제작 솜씨를 발휘해 마피아에게 명검을 팔려다 다투고 경찰에게 잡힌다. 갑자기 나타난 배서스트가 그를 취조하는데 “너는 트레드웨이.”라면서 에그의 행방을 물으며 압박한다. 그때 빌리버 노라가 벽을 부수고 그를 구해준다.

노라는 에번을 빌리버의 본부로 데려간다. 그곳에서 전생이 트레드웨이였음을 깨닫게 된 에번은 그러나 다른 것은 다 기억해도 에그의 행방만은 기억해 내지 못한다. 갖은 방법을 동원해 결국 그는 트레드웨이로서 죽을 때 그의 배 안에 감춘 것을 기억해 내지만 감시하던 배서스트가 한발 앞선다.

배서스트는 전 병력을 빌리버의 본부에 투입해 방부 처리된 트레드웨이의 사체를 탈취, 드디어 에그를 손에 쥐고 그것을 작동시키는데. D. 에릭 메이크란츠의 소설 ‘The Reincarnationist Papers’를 원작으로 했는데 아무래도 불교의 사상과 철학을 서양인이 이해하고 소화하기에는 버거운 듯하다.

물론 윤회 사상은 서양에도 있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가 윤회설을 주장했고, 그보다 앞서 피타고라스가 “모든 동물은 혈연관계이다.”라며 설파했다. 피타고라스의 출생이 BC 580년으로, 석가모니의 그것이 BC 563년으로 각각 추정되니 피타고라스가 다소 앞서지만 별 의미는 없다.

당시에 그리스와 인도의 교류가 사상을 주고받을 만큼 활발했다고 보기 힘들고, 두 사람이 만났을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그런데 부처는 다른 생물의 존엄성을 가르쳤고, 피타고라스는 동물을 모아 놓고 설교를 했다. 그만큼 생명체는 종에 상관없이 모두 소중하다는 의미이다. 윤회설의 또다른 핵심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그런 철학을 눈을 씻고 찾아봐도 발견할 수 없다. 그저 윤회(영생)와 인류의 생존에 대한 상반된 인식론을 가진 두 슈퍼맨 집단이-다수의 인류는 알지도 못한 채-인류의 존망을 걸고 피 튀기게 싸운다는 상업적 액션만 난무할 따름이다. 게다가 배서스트는 어설프게 타노스를 흉내낸다.

그런데 논리는 유사하되 맥락이 다르다. 식량난으로 전멸의 위기에 빠진 전 우주의 생명체를 존속시키기 위해 절반을 없애겠다는 거시적인 타노스와 달리 배서스트는 단지 인피니트의 괴로운 환생을 끝내고자 인류를 멸종시키려 한다. 그렇게 되면 인피니트의 영혼에게는 더 이상 윤회할 개체가 없다.

물론 그들이 니힐리스트(허무주의자)이기 때문에 그런 개념을 가질 수 있다. 어차피 세상은 본래 ‘無(니힐)’에서 시작되었으니 그것으로 돌아가는 게 별로 이상할 게 없다는 논리도 가능하다. 그런데 배서스트에게는 그게 다일 뿐 ‘수동적 니힐리즘’이라며 기독교와 불교를 비난, 배척한 니체는 없다.

니체는 권력에의 의지를 내세운 가치전도로써 능동적 니힐리즘을 주창했다. 결국 그건 실존주의와도 맞닿는다. 아나키즘과도 궤를 함께한다. 결국 인간을 비롯한 모든 동물이 추구하는 건 자유와 그걸 통한 행복이 아닐까? 빌런의 논제가 취약하니 빌리버의 세상을 구할 것이라는 믿음도 근거가 허약하다.

결국 빌리버와 니힐리스트의 대결은 겉으로는 인류 존재자의 희망을 향한 믿음과 절망과의, 내부적으로는 구조주의와 해체주의와의 전쟁이다. 구조주의는 ‘사물의 참된 의미가 그 자체의 속성과 기능에서 결정되는 게 아니라 사물들 간의 관계에 따라 결정된다는 인식을 전제로 한다.’(두산백과)라는 사상이다.

빌리버는 멀리 소쉬르나 바르트까지 나아갈 것도 없다. 자신들을 특별하고 소외된 존재자로 보는 니힐리스트와 달리 “환생하며 배운 모든 것을 인류를 위해 사용함으로써 세상을 구할 것이라 믿는다.”라는 대사를 통해 자신들을 지구라는 구조 안의 존재자로 보는 현대적 세계관을 형성하는 방법론을 지녔다.

이에 비교해 니힐리스트는 예술을 거세한 해체주의에 경도되어 있다. 자신들의 환생이라는 초능력이 지겨워 중단시킬 방법을 찾다 보니 결국 인류를 파괴하는 방법론에 도달한 것이다. 후쿠아 감독이 그런 거창한 사상을 바탕으로 찍었을지는 의심이 들지만 어쨌든 그림이 그토록 깊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그저 니힐리스트는 “진정한 고문은 인류의 어리석음이니 존재자의 구조 자체를 해체하겠다. 영혼 불멸은 자기 위안일 뿐이고, 인류는 걸어 다니는 부고 기사일 따름이다.”라며 고집스럽게 창조주 노릇을 하려 들고, 빌리버는 “인생은 백지에서 시작한다.”라며 자신들의 윤회를 합리화하려 애쓴다.

영상은 화려한데 뇌리에 남는 게 없다. 대사는 청산유수인데 깨달음을 느낄 수 없다. 동양의 검이 비교적 중요한 소품으로 등장하는데 주제와는 사뭇 다른 사무라이 검이다. 일본이 중국으로부터 불교 등 여러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은 엄연한 사실임에도 핫토리 한조만 치켜세우는 건 무례하게 보일 수 있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저작권자 © 미디어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