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판의 미로-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 2006)는 국내 개봉 때 배급사가 ‘해리 포터’나 ‘반지의 제왕’ 같은 판타지 영화라고 홍보하는 바람에 관객들에게 외면당하고 혹평까지 받았지만 굉장한 걸작으로 평가가 바뀌었다. 1936~39년 발생한 스페인 내전을 알아야 이해할 수 있다.

1944년 스페인. 내전으로 공화파를 물리친 파시스트 군부가 정권을 잡았지만 자유주의자 등으로 구성된 반군들이 군부에 대항하던 시절. 내전으로 남편을 잃은 카르멘은 비달 대위와 결혼해 임신하자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10살 딸 오필리아를 데리고 비달이 근무 중인 산 중턱의 기지로 온다.

“아들은 아버지 앞에서 출생해야 한다."라는 비달 때문이다. 밤에 벌레의 형상을 한 요정이 오필리아의 방에 나타나 미로의 동굴로 안내한다. 그곳에서 괴이하게 생긴 판을 만난다. 판은 오필리아가 요정 왕국의 모아나 공주인데 인간 세상에 나갔고, 자신은 공주의 신하라며 ‘열쇠의 책’을 건네준다.

그 책에 적힌 대로 3가지 임무를 완수해 3개의 열쇠를 얻으면 왕국으로 되돌아가 백성들을 다스리며 영생을 누릴 수 있다는 것. 기지에는 비달의 허드렛일을 담당하는 메르세데스와 카르멘을 돌보는 주치의 페레로 박사가 있는데 이들은 몰래 반군을 돕고 있다. 메르세데스는 오필리아에게 잘해 준다.

오필리아는 메르세데스의 정체를 간파하지만 그녀를 좋아하기에 비밀을 지켜 준다. 갑자기 카르멘의 상태가 안 좋아지자 판은 오필리아에게 허브 뿌리를 주고, 우유에 담근 뒤 매일 피 두 방울씩 주라고 한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건강을 회복한다. 그러나 비달이 그걸 발견하자 카르멘이 불에 태운다.

카르멘은 출산 중 사망하고 아들이 태어난다. 메르세데스의 연인 페드로가 지휘하는 반군이 기지를 습격해 창고를 털어 가자 비달은 추격해 잡아온 한 명을 통해 페레로의 정체를 알아내 죽인다. 또 메르세데스를 불러 시험해 보고 강력하게 의심한다. 메르세데스는 오필리아와 탈출하다 잡히는데.

멕시코인 델 토로는 어릴 때 스페인의 역사를 공부하고 오랫동안 이 작품을 구상했다. 내전 때 멕시코는 소련과 함께 공화주의자들을 도왔다. 비달은 전형적인 파시스트이다. 시간 강박증, 결벽증 등이 있으며 매우 권위적이고 이기적이다. “산모는 죽더라도 아이는 꼭 살려.”라고 명령할 정도이다.

카르멘은 애매모호한 캐릭터이다. 분명히 착한 인물이고 오필리아를 사랑하지만 비달과 재혼했다. 그녀는 바람직하지 않은 줄 알면서도 생존 혹은 신분 상승을 위해 불의의 권력에 빌붙는, 적지 않은 민초를 의미한다. 오필리아에게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강요하고,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라며 윽박지른다.

“아저씨랑 꼭 결혼해야 했어요?”라는 오필리아의 질문에 카르멘은 “혼자 지내기 외로워서.”라고 답한다. 다시 “내가 있잖아요.”라고 말하자 “너도 크면 알게 되어.”라고 응수한다. 그 행간에는 “먹고살기 위해서.”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적지 않은 선한 사람들이 그런 비겁한 선택을 한다는 은유이다.

그에 반해 페드로, 메르세데스, 페레로는 명예롭다. 비달이 “왜 배신했나?”라고 묻자 페레로는 “생각 없이 복종하는 건 너 같은 족속이지 아는 아니다.”라고 의연하게 답한다. 페레로는 페드로에게 이렇게 싸워도 남는 게 없다며 메르세데스와 함께 타국으로 망명할 것은 권하지만 둘은 듣지 않는다.

이름을 묻는 오필리아에게 판은 “예전에는 산, 숲, 흙 등으로 불리었다.”라고 답한다. 그리스 신화의 목양신인 판은 자연의 권위를 뜻한다. 또한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줘 Panic의 어원이 되기도 했고, All이라는 뜻도 있다. 카르멘이 오필리아에게 녹색 드레스를 만들어 준 건 그녀가 자연친화적이라는 것.

판은 “처음 이 숲이 생겼을 때에는 인간과 동물이 사이좋게 살았다. 미움도 전쟁도 없던 시절이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인간이 욕심을 부려 전쟁을 일으킴으로써 동식물을 살상하고 자연을 파괴하면서 그런 평화는 깨졌다는 뜻이다. 오필리아는 판에 의해 자신의 어깨에서 초승달 점을 발견한다.

오필리아는 동화책을 좋아하고 그 내용들을 믿지만 메르세데스는 “어른이 되면 그런 걸 안 믿게 된다.”라고 말한다. 카르멘은 “세상에 마법은 없어. 현실은 동화와 달라.”라고 가르친다. 극도의 현실주의자. 심지어 비달은 오필리아를 미친년으로 취급한다. 즉, 판은 동화와 마법이 살아있는 자연이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요정과 판은 안 보인다. 그렇다면 오필리아의 환상적 경험은 그녀의 환각일까? 감독은 열린 결말을 남긴다. 모아나는 과거에 동경심에 지하 요정의 왕국을 떠나 인간 세계로 나아갔지만 그 살벌한 세상에서 육체를 상실하고 영혼이 오필리아의 육체로 들어가 10년간 살아왔던 것.

오필리아가 두 번째 열쇠를 찾아 괴물의 집에 갔을 때 수많은 아이 신발이 쌓여 있는 것을 본다. 벽에는 괴물이 아이를 잡아먹는 그림이 걸려 있다. 이 영화가 가장 앞세우는 주제이다. 양차 대전 등의 전쟁은 수많은 아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어른들의 욕심으로 내일의 주인공들이 희생된다는 항의이다.

대부분 그러했듯 감독은 현실주의와 신비주의에서 신비주의의 손을 들어 주고 있다. 그러나 그 신비주의는 허황된 혹세무민을 말하는 게 아니라 자연의 신비와 그 속에 담긴 낭만주의를 뜻하는 것이다. 내내 울려 퍼지는 메르세데스의 자장가 허밍은 매우 처연하다. 결말은 슬프면서도 아름답고 따뜻하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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