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플레이그라운드’(로라 완델 감독)는 국내 관객들이 접하기 쉽지 않은 벨기에 영화인데 프랑스 영화 애호가라면 열렬히 환호할 만한 메시지와 예술성을 보장한다. 7살 노라(마야 반데베크)는 이제 막 입학한 소녀이다. 함께 등교하는 오빠 아벨(군터 뒤레)에게 학교가 두렵다고 토로하지만 아벨도 마찬가지.

이미 아벨은 상급생 앙투완의 무리에게 집단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처지이다. 친구를 사귀는 게 두려운 노라는 쉬는 시간에 운동장에서 아벨에게 다가서지만 아벨은 앙투완 무리에게 노라마저도 폭행당할 것을 우려해 그녀를 자꾸 밀쳐낸다. 남매는 실업자 홀아버지(카림 르클로)와 함께 살고 있다.

아벨은 상처를 아버지에게 축구하다가 다쳤다고 둘러대지만 결국 노라가 진실을 귀띔해 준다. 아버지는 정식으로 학교에 항의해 사태를 수습해 준다. 노라는 그나마 제 말을 들어 주던 담임선생이 떠나가자 새 담임에게 반항하는 등 여전히 학교생활을 힘들어한다. 그런데 아벨이 완전히 달라진다.

‘왕따’를 당해 운동장 한구석에 움츠려만 있던 그는 어느덧 친구들과 어울려 노라의 급우인 흑인 이스마엘을 상습적으로 괴롭히는데. 부모, 교사, 아이 가릴 것 없이 모두가 관람해야 할 필독서 같은 영화이다. 이건 비단 벨기에만의 이야기가 아니고, 대한민국, 더 나아가 세계적인 학교 폭력의 문제이다.

벨기에에 대한 역사적 상식을 더하면 이 작품은 더욱 재미있다. 프랑스와 독일은 843년 베르됭 조약을 계기로 영원히 갈라졌다. 두 강국 사이에는 벨기에와 네덜란드가 있다. 따라서 두 나라는 두 열강은 물론 스페인의 지배까지 받았다. 그 후 벨기에는 한때 네덜란드였다가 결국 1831년 독립했다.

벨기에는 북부와 남부로 갈라져 네덜란드어와 프랑스어를 6 대 4 정도로 사용한다. 독일어는 극히 적다. 성향도 주도권을 쥔 북쪽이 보수적이고, 남쪽은 진보적이다. 따라서 인종 차별이 매우 심하다. 감독은 축구, 신발끈, 평균대, 수영장(바다) 등의 키워드로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는 영리함을 보인다.

아이들은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에 운동장으로 뛰어나와 놀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 운동장에서는 힘 있는 아이들의 영역이 엄격하게 구분되는데 특히 축구를 하는 아이들이 메인 스트림을 차지한다. 물론 그 구역은 다른 학생들에게는 신성불가침 지역이다. 침범하면 폭력이 가해지는데 선생도 못 말린다.

소녀들은 “축구하는 아이들은 인종차별주의자.”라고 수군댄다. 축구(하는 아이)는 기득권을 의미한다. 자연스레 그들은 축구를 못 하는 아이들을 업신여기는 걸 당연하게 인식한다. 신발끈은 그러한 세상에서의 첫 발걸음, 관계의 첫 매듭이다. 그건 복종이 아니라 시스템의 이해이므로 개진의 여지가 있다.

평균대도 유비적 의미. 그런 혼돈의 세상에서 적당한 균형을 유지하며 적응하고 부합해 나가는 기량의 향상이다. 그래서 수영장은 조금만 긴장을 느슨하게 풀면 수장당하고 마는 이 세상을 의미한다. 남들은 보지 못하지만 물속에서 바지런히 자맥질을 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험한 정글 같은 세계이다.

감독은 아이의 눈높이 카메라와 오프 스크린으로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현사실성을 극대화했는데 두 아역 배우의 연기력이 이를 크게 거든다. 각 신은 화자(주인공)를 제외하곤 모두 포커스 아웃되면서 안 보이는 인물의 소리만 들린다. 카메라는 철저하게 노라의 시선에서 이 험난한 세상을 바라본다.

국가의 복지 시스템이 완벽하지 않은 이상, 혹은 형편이 아주 부유하지 않는 한 부모가 모두 직업을 갖기 쉽지 않은 게 자본주의의 구조이다. 남매의 엄마는 없고 아버지는 실업자이다. 노라의 친구들은 그녀의 아버지를 흉본다. 노라는 실업의 이유를 묻고 아버지는 “너희 돌보는 게 내 일.”이라 답한다.

부모에게, 어른들에게 내일의 주인공인 어린아이를 돌보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있을까? 하지만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돈 버는 게 최우선일 수밖에 없다. 남의 아이도 아닌, 제 아이를 보살피는, 숭고한 일이 놀림거리가 되는 이 악순환의 고리는 아벨이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변하는 악순환이 병치한다.

인트로와 아웃트로는 꼭 껴안은 남매의 클로즈업의 수미상관이지만 그 의미는 많이 다르다. 시작은 이 세상에 피투된(던져진) 노라의 두려움이다. 그래서 오빠와 떨어지고 나서 아버지와 포옹한 뒤 다시 한 번 더 끌어안는 것이다. 끝의 ‘백 허그’는 이제 세상에 기투한(스스로 나선) 노라의 자립을 말한다.

더불어 이제는 오빠를 포용하려는 소녀의 원대한 독립성을 뜻한다. 학교 운동장이라는 미시적 공간을 통해 이 세계라는 거시적 사회를 그려 낸 감독의 연출 솜씨는 장편 데뷔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장대하다. 아이는 스스로 악해지지 않는다. 어른이 거울이 되었거나 방관했기 때문이다. 25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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