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모어’(이일하 감독)는 정말 독특하고 주목할 만한 가치가 충분한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모어(毛魚)라는 예명으로서 이태원 클럽 트랜스에서 공연을 하는 가운데 패션모델, 에세이스트, 뮤지컬 배우, 안무가 등의 다양한 예술 활동을 펼쳐 온 성 소수자 모지민(44)의 이야기를 통해 고착된 이원론(이항대립)의 편견에 저항한다.

모어는 1978년 전라남도 무안에서 태어나 일찍이 춤에 천부적인 소질을 보였다. 하지만 자신을 남자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정체성 때문에 따돌림과 폭력에 시달렸다. 발레리노가 아닌 발레리나를 꿈꾼 그는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에서 발레를 전공했지만 현실에 굴복, 트랜스에서의 드래그 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다.

드래그 쇼란 이분법적 성별의 정의에서 벗어나 자신을 표현하는 전위 예술을 가리킨다. 그는 영화 ‘헤드윅’(2001)의 감독 겸 배우인 존 캐머런 미첼과도 각별한 친분을 쌓는 등 활발한 예술 활동을 수놓아 나간다. 1998년 12월 서울의 한 바에서 만나 연인이 된 러시아인 제냐와의 아름다운 사랑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이 작품은 휴먼 다큐멘터리와 뮤지컬의 두 가지 장르를 뒤섞은 형태로 펼쳐지며 유니크한 다큐멘터리의 새 장을 연다. 휴먼 다큐 형식에서는 모어의 인생과 그에 대한 내레이션, 그리고 지난 수년간의 촬영 기간 동안 카메라에 담아 온 모어 및 주변 사람들에 대한 일상과 활동 등이 정석적 다큐의 형식으로 스토리텔링을 한다.

과거와 현재, 절망과 희망이라는 이원론이 공존하는 것. 그 속에서 모어가 그동안 얼마나 사회적 차별, 냉대, 무시, 폭력에 시달렸는지 드러난다. 군에 입대한 그는 ‘호모 나와.’라는 장교의 말에 선뜻 나섰다가 정신 병원에 입원 ‘당해야’ 했다. 서울 시청 앞에서 열린 퀴어 축제 시퀀스는 이 사회의 성 소수자에 대한 분노를 보여 준다.

반대 시위에 나선, 주로 노인층과 종교계 사람들은 성 소수자를 정신병자 혹은 이단으로 매도하며 마치 철천지원수 혹은 국가를 전복하려는 범죄자인 양 몰아세워 성토한다. 성 소수자가 그런 보수적인 사람들에게 어떤 피해를 끼쳤는가? 그 보수파 또래인, 그 누구보다 충격과 상처가 컸을 모어의 부모가 먼저 인정하는데 왜?

모어를 바라보는 단 하나의 부정적이고 암울한 시퀀스이지만 그 메시지와 울림만큼은 매우 강렬하다. 작품의 주제 중 하나로서 고정 관념이 된 이원론의 편견이 낳은 폭력에 대한 공포이다. 세상에 널린, 가장 흔한 이항대립은 유물론과 관념론이다. 그리고 그에 못지않게 사상적, 철학적으로 대립하는 게 일원론, 이원론, 다원론이다.

현대에까지 일원론으로 대표되는 것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정도이고, 그 외에 세상만사를 하나의 통일로 보는 시각은 이제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다만 플라톤 이래 데카르트를 거쳐 오늘날까지 이원론은 엄청난 사상적 권력을 차지하고 있다. 성선설과 성악설부터 남과 여, 부와 가난, 정신과 육체, 나쁜 놈과 좋은 놈 등.

그러나 선거 때의 흔한 정치 구호처럼 이제는 양대의 시대가 아니라 다양성의 시대이다. 밥 아니면 빵으로 끼니를 해결하는 시대가 아니다. 채소만 먹는 사람도, 고기만 먹는 사람도 있다. 하루 세 끼가 아니라 한 끼 혹은 여러 끼를 먹는 사람도 꽤 있다. 양복 아니면 한복이 아니라 개성대로 크로스오버를 하는 게 자연스럽다.

늙은 보수층은 ‘옛날에는 안 그랬는데 요즘 애들은.’이라는 입에 말을 달고 산다. 천만의 말씀! 우리 역사에도 동성애는 존재했다. 더 거슬러 올라가 고대 그리스나 로마에서는 아예 공공연했다. 가장 원초적인 동물은 종족 보존을 위해 교미를 하지만 인간에 가깝다는 보노보 원숭이는 동성애를 해 왔다. 최소한 수십만 년 동안.

전 세계적으로-선진국일수록-동성 결혼을 합법화하는 추세이다. 유럽은 중세에만 하더라도 동성애를 중범죄로 취급했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동성애를 권장하고 미화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다만 행복 추구라는, 모든 인간 개체의 공통된 희망과 목표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차원에서 성 소수자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는 의도이다.

아직도 유럽 사람들 대다수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아리스토텔레스를 좋아하는 영국 제외-플라톤을 손꼽는다. 주지하다시피 그는 영혼 불멸이라며 육체보다 우월함을 주장했다. 심지어 유물론 내에서도 일방적으로 육체 우월론을 명토 박지 않는 이도 있다. 모어는 어릴 때부터 자신이 남자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성 소수자를 싫어하는 감정 역시 존중받아야 마땅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성 소수자에게 돌을 던질 자격은 없다. 작품 속 액자식 구성은 판타지식 뮤지컬이다. 휴먼 다큐 사이에 삽입한 모어의 뮤지컬은 담대한 연출의 개입과 모어의 예사스럽지 않은 연기력이 애니메이션 등 화려한 색감과 잘 어우러져 아름다운 동화를 만든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는 ‘헤드윅’과 더불어 타셈 싱 감독의 걸작 ‘더 폴: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2006)의 냄새까지 풍긴다. 휴먼 다큐가 스토리텔링이라면 이 시퀀스는 이미지 텔링이다. 제냐도 꽤 중요한 한 축을 형성한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게이인지, 스트레이트인지 모른다.”라고 표현한다. 그럴 수 있다. 다양성의 시대이니까.

그 역시 모어처럼 메인 스트림에 들지 못한 주변인이다. 모어는 여자가 되고 싶지만 수술이 무서워서 시도하지 못했음에도 지금의 여장을 한 외모의 자아를 아름답다고 자부한다. 제냐는 외형만 보면 터프가이이다. 그러나 그는 서툰 한국어 때문에 한국에서 적응 못하고 직장까지 잃어 러시아로 쫓겨난, 나약한 존재자이다.

출국 전 그는 퇴직금을 모어에게 주며 제 장례식에 써 달라고 부탁한다. 정체성이 모호한, 러시아에서도 한국에서도 정주할 수 없는 그는 모어와 다름없다. 건국 이래 보수주의와 진보주의가 극렬하게 다퉈 온, 다양성이 발붙일 수 없는 우리 사회의 이항대립의 이면이다. 재미 보장! 음악 감독 이랑의 선택은 신의 한 수! 23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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