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화가 만난 스포츠 人 : 작은 거인 전병관]
넓은 가슴이 더 넓어 보이는 영원한 ‘작은 거인’ 전병관

▲ 92바르셀로나올림픽 역도 금메달(전병관)

‘작은 거인’ 전병관. 그는 새삼 소개할 필요도 없는 우리나라 역도 영웅이다. 그에게는 언제나 처음이란 말이 따라 다닌다. 1988년 서울올림픽 은메달,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금메달은 모두 그가 우리나라 역도 역사상 처음으로 따낸 은메달과 금메달이었다. 우리나라 역도 선수로는 처음으로 올림픽, 아시안게임, 세계선수권을 석권해 그랜드슬램을 이루었다. 말 그대로 역도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스포츠의 레전드’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런 그가 지난해 연말 느닷없이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주변에도 거의 알리지를 않았다. 역도인들만 알고 있을 뿐이다. 미국에서 유학중인 아들과 딸의 뒷바라지를 위해라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다. 하지만 그를 잘 아는 지인의 말을 빌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아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는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기 전까지 대한역도연맹 이사이자 대한체육회 역도 전임코치였다. 이사는 무보수 명예직이고 전임코치는 매년 계약을 해야 하는 임시직이다. 소위 언제 그만 둬야 할지 모르는 자리다. 우리나라 역도 역사상 큰 족적을 남겼으면서도 제대로 된 일자리조차 갖지 못한 셈이다.

그가 왜 대한민국을 떠나 미국에서 새로운 시작을 해야 했는지에 대해서는 조금 더 시간이 지난 뒤에 이야기 할 기회가 있으리라 믿는다.

필자는 사실 그의 현역시절에는 취재할 기회가 없었다. 체육기자를 20년 가까이 하면서도 역도를 담당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지난 2012년 10월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그가 미국 이민을 결심한 것이 2년 정도 되었다고 하니 필자가 인터뷰 할 그 시점인 셈이다.

그의 이민 소식을 듣고 훌륭한 지도자를 잃었다는 생각에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를 홀대하는 우리나라 체육계의 풍토를 아쉬워하며 당시 그와 인터뷰한 내용들을 되돌아봤다.(직업, 나이는 2012년 기준으로 남겨 놓았다)

역도는 자신감, 성취감, 용기의 결정판

정중하면서도 당당한 말투와 행동에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라는 자부심은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지만 그 어디에도 거드름은 없었다. 문득 “갓 중년을 넘어서서도 이렇게 중후한 멋을 풍길 수 있는 스포츠맨이 과연 얼마나 될까?”라는 생각이 얼핏 머리를 스친다.

우리나라 역도 역사를 쓴 ‘작은 거인’ 전병관 감독(43·대한체육회 전임코치 겸 대한역도연맹 국가대표 후보선수 감독)을 만난 첫 인상이다.

그에게서 근래 보기 드문 인간의 향내를 맡았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은사나 선배 이야기를 할 때면 자연스럽게 경건한 모습을 보였고 후배들 이야기 때는 자랑스러운 얼굴에 밝은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나이가 한참이나 어린 그를 보면서 줄곧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단어는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풍기는 ‘약간은 건방진 스포츠맨’이라기보다 ‘넓은 가슴이 더 넓어 보이는 신사’라는 것이었다.

전 감독과의 인터뷰는 “역도가 왜 좋으세요?”라는 가장 간단한 것 같으면서도 대답하기 쉽지 않은, 그리고 질문 같지 않은 질문으로 시작됐다.

“역도는 관중의 눈으로 보면 어쩌면 싱거울지 모릅니다. 단 1초에 승부가 결정나니까요. 하지만 역도인에게는 그게 바로 역도만이 갖는 최고의 매력입니다. 역도는 넓은 무대에 혼자 들어가 인상과 용상을 합쳐 단 6번의 기회만 있을 뿐입니다. 머리 위로 무거운 무게를 들어올리기 전에 할 수 있다는 자신감, 그리고 들어 올렸을 때 어려운 도전을 성공했다는 성취감, 그리고 기록을 늘이기 위한 용기가 합쳐진 스포츠가 바로 역도입니다. 역도는 한번 경기에 참가하고 나면 그 매력에 도저히 바(bar)를 놓을 수 없습니다.”

사실 역도 경기는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 때 TV에서 중계방송을 본 적은 있지만 실제로 경기장에서 취재를 한 적이 없다. 따라서 인상, 용상을 합친 합계로 메달을 가린다는 정도의 기초 지식밖에 없는 필자로서는 전 감독의 대답이 상당히 심오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필자가 아는 얄팍한 지식과 주변 체육인들을 통해 들은 전 감독에 대한 자료들을 종합해 가장 평범한 질문부터 본격적인 인터뷰를 시작했다.

▲ 역도를 시작한 계기는?
= 1982년 5월 전북 진안 마령중학교 1학년 때였습니다. 1981년 9월 30일 독일의 바덴바덴 IOC 총회에서 1988년 올림픽 개최지로 서울이 확정된 뒤 1982년부터 1교 1기(한 학교에서 한 개 체육부) 운동이 벌어졌습니다. 이 덕분에 우리 학교도 운동부를 가지게 되었는데 정인영 체육선생님이 역도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역도인도 아니셨던 선생님께서는 친구의 도움을 받아 역도 책을 구해 함께 책을 보면서 같이 연구하시는 등 열성적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아마도 당시 소년체전에서 역도는 인상, 용상과 합계에서 메달이 3개나 되고 체급경기여서 다른 종목보다 유리하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착각이었을까? 첫 스승에 대한 회고를 하는 전 감독의 눈빛은 아련한 추억 속으로 빠져 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전 감독을 역도로 이끈 정인영 교사는 2009년 우리나라 최초의 역도 영화 ‘킹콩을 들다’의 실제 주인공으로 이미 작고했다.

▲ 아니 그럼 중학교 1학년 때 선생님과 같이 책을 보면서 역도를 시작했다는 말입니까?
= 네. 선생님도 역도를 잘 모르셨습니다. 선생님과 같이 책을 보면서 자세를 배우고 훈련을 했지요. 선생님은 기초 체력을 중시하셨는데 정말 중학교 1학년으로는 견디기 힘든 스파르타식이었습니다. 인터벌 트레이닝, 서키트 트레이닝 등 지금 생각해도 당시 어떻게 견뎌냈는지…훈련을 마치고 소금기가 섞인 얼굴을 씻지도 못한 채… 참기 힘든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3개월 동안 체력훈련과 올바른 자세 잡는데 치중한 것이 좋은 기초가 돼 중량운동을 시작하며 기록발전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 어린 학생이 이렇게 힘든 운동을 하면 부모님의 반대도 심했을 텐데?
= 사실 초등학교 때 꽤 공부를 잘 했습니다. 더구나 어머니께서 많이 편찮으셔서 빨리 공부해서 의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반대를 많이 하셨죠. 그러나 선생님께서 운동선수들도 공부를 시키겠다고 부모님을 설득하셨고 실제로 여름방학과 겨울방학 때는 선생님이 직접 보충수업을 해 주시기도 했습니다.

중학교 3학년부터 대학 1학년까지 52Kg급 유지

▲ 그럼 첫 대회는 언제 출전했습니까?
= 역도에 입문한 지 7개월쯤 지난 1982년 12월 서상천배전국중고역도대회였습니다. 이때만 해도 운동을 계속해야 되는가, 아니면 공부를 해야 되는가로 갈등을 하던 때였습니다. 인상 마지막 시기에서 55㎏을 들면 중학교 신기록을 세우게 되는데 성공하면 유명선수가 돼 계속 역도를 해야 된다는 생각과 일부러 실패해야 된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결국 인상에서 성공하고 용상에서 72.5㎏을 들어 합계 127.5㎏으로 우승을 했습니다. 이 덕분에 중학교 2학년 때 상비군으로 발탁돼 서울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전 감독은 고향을 떠나 서울 생활을 시작하면서 평생 역도인으로 살아야 하는 숙명을 느꼈다고 회고한다. 겨우 중학교 2학년 때다. 아마도 어린 나이에 부모의 곁을 떠나 객지생활을 시작한데다 기라성 같은 선배들과 함께 동고동락을 한 탓에 ‘예의’와 ‘겸손’이 일찍부터 몸에 배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함께 해보았다.

▲ 서울에서 열린 1986년 아시안게임에서는 금메달 후보였으나 실격을 당했는데?
= 경험부족과 체중조절의 실패 탓이었습니다. 중학교 3학년 때 52㎏급에 출전한 뒤 대학교 1학년 때까지 똑같이 52㎏급을 유지했습니다. 이 바람에 매번 대회 때마다 체중을 많이 뺏습니다. 보통 다른 종목의 체급 선수들을 보면 사우나에서 땀을 빼 체중을 조절하고 하지만 역도는 사우나에서 땀을 빼면 근육이 경직돼 다시 이것을 정상으로 돌리기 위해서는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그래서 주로 굶는 방법을 택하는 데 보통 6~7끼 동안 아예 아무 것도 먹지를 않고 심지도 물도 안 먹을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계체를 통과하고 나면 경기까지 2시간의 여유가 있습니다. 목도 마르고 배도 고프니 많이 먹게 되지요. 그러면 잠이 오고 피로가 몰려옵니다. 결국 이게 패인이 됐지요.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 후보 2명이 실격을 당했다. 바로 전병관과 이형근이었다. 이형근은 대표팀 막내인 전병관의 바로 위 선배로 5살이나 많았지만 같은 방을 쓰고 있었다. 아시안게임 우승후보에서 실격을 당한 뒤 전병관은 아시아선수촌 아파트에 돌아온 뒤 숙소인 8층에서 뛰어 내리고 싶었다고 한다.

전병관은 이형근과 함께 선수촌을 벗어나 주변 식당에서 김치찌개를 먹으며 “2년 뒤 똑같은 장소에서 올림픽이 열린다. 이때만큼은 오늘의 실패를 벗어나자”며 다짐을 했다. 아마도 1988년 올림픽이 서울에서 열리지 않았다면 역도 인생은 큰 변화를 맞았을 것이라고 회고한다.

▲ 이 쓰라린 경험이 서울올림픽 은메달이라는 쾌거를 이루어 낸 셈이군요.
= 꼭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서울올림픽이 열리기 한해 전인 1987년 제61회 세계역도선수권대회(체코·오스트라비)에 출전했으나 또다시 체중조절 실패에다 자세 미스까지 겹쳐 인상 6위, 용상 3위로 합계 4위에 그쳤습니다. 세계대회에서 메달 획득에 실패한 뒤 세계에서 메달을 따는 것은 어렵다는 생각에 거의 자포자기를 했습니다.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연맹에서 배려를 해 주시 않았다면 메달은 생각지도 못했을 겁니다. 마사지 전문가를 영입해 뭉친 근육을 항상 풀어 주었고 외국대회에서 시차적응에 실패한 아픔을 되풀이 하지 않게 하기 위해 양무신 감독님이 아예 평상시와 똑같이 생활을 하도록 해 주셨습니다. 여기에다 연맹에서 산삼을 구해 주는 등 정말 많은 선배 역도인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사실 올림픽에 출전하기 전에는 동메달이 목표였습니다. 용상 마지막 시기에서 147.5㎏을 들면 은메달, 실패하면 4위가 되는데 훈련 때는 이 무게를 든 적이 있었지만 정작 경기에서는 한 번도 없었습니다. 실제 자신도 없었습니다. 탄산마그네슘 가루를 손에 바르면서 나도 모르게 신에게 기도했습니다. 순간적으로 바를 머리 위로 들어 오렸는데 어떻게 들어 올렸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순간적으로 부모님과 많은 역도 선배님들께 실망을 끼쳐 드리지 않았다는 생각만 들더군요.

서울올림픽에서 은메달은 우리나라 역도사에 큰 획을 그은 쾌거였다. 1948년 런던올림픽에 김성집이 대한민국 사상 첫 동메달을 역도에서 따낸 데 이어 1952년 헬싱키올림픽에서도 동메달을 획득했고 1956년 멜버른올림픽에서 김창희가 역시 동메달을 따냈다. 그 뒤 전병관이 서울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딸 때까지 무려 32년 동안 노메달이었다.

▲ 중학교 2학년부터 대학 1학년까지 같은 55kg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정말 엄청난 고통이 뒤따랐을 텐데?
= 아마 그 고통은 느껴본 사람만이 알 수 있습니다. 보통 대회 한 달 전부터 체중조절을 시작하는 데 어느 때는 사흘 동안 아예 물 한 모금 먹지 않고 버틴 적도 있습니다. 역도 선수들은 근육량이 많아 사우나로도 체중이 잘 빠지지 않고 자칫하면 근육에 경련이 와서 오히려 경기를 망칠 경우도 있습니다. 어쩔 수없이 굶어서 체중을 줄이는 방법밖에 없지요. 서울올림픽이 열리기 바로 전날 아버지와 외삼촌을 만났는데 완전히 바짝 마른 나를 보더니 “올림픽 메달도 필요 없다. 그냥 고향으로 내려가자”고 하시면서 우시더군요. 그때 제가 서울올림픽에서 메달을 못 따면 운동을 그만두겠다고 아버지와 약속했습니다.

전 감독은 효심이 지극한 선수로 소문나 있다. 처음 역도를 시작한 뒤 학교 앞 방앗간을 하던 삼촌이 꼭 점심때가 되면 따뜻한 밥을 해 학교까지 가져왔다고 한다. 고교 2학년 때 헝가리 대회에 참가한 뒤에는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숙모를 위해 보청기를 사기 위해 헝가리 시내를 돌아다니기도 했다. 전 감독은 운동을 시작한 뒤부터 부모님을 실망시킬 수 없다며 아무리 어려워도 내색을 하지 않았다. 전 감독의 부친은 2000년 사고로 타계하셨다.

금메달을 딴 뒤 역도화 개발에 나서

▲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금메달은 그런 고통을 참아낸 땀과 눈물의 결정체군요.
= 바르셀로나올림픽 금메달은 의외로 쉽게 땄습니다. 올림픽을 앞두고 최성용, 이춘식 선생님과 러시아 한국계 3세인 블라데미르 리가 코치를 맡았는데 과학적 훈련 덕분에 큰 고통은 없었습니다. 물을 마시면서 체중을 줄일 수 있도록 훈련량을 조절하는 스포츠 과학을 도입해 안정적으로 경기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훈련 기간에는 제 몸무게의 3배 이상도 거뜬히 들어 올릴 정도로 기록도 좋았습니다. 바르셀로나에서는 금메달 라이벌이던 중국의 류수빈이 허리가 안 좋아 고생하고 있다는 소식까지 들어 실수만 하지 않으면 금메달을 딸 수 있다고 자신했고 평소 류수빈에 뒤졌던 인상에서도 2.5kg나 앞서 쉽게 금메달을 땄습니다.

▲ 93상해 역도 금에달(전병관)

전 감독은 올림픽 2회 연속으로 은메달에 이어 금메달을 딸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으로 24살의 나이로 선수로서는 최고 전성기라는 이점도 있었겠지만 대한역도연맹의 따뜻한 보살핌과 지도자들의 열성이 한데 어울린 덕분이라고 말했다.

▲ 올림픽 금메달 이후 달라진 점이 있었다면?
= 정말 모든 사람들로부터 환대를 받았습니다. 마치 온 세상이 제 것처럼 보일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내심으론 뭔가 빠져 나가는 듯한 느낌도 있었습니다. 바로 목표의식이었습니다. 올림픽 금메달을 따고 나니 제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느슨해지는 것 같더군요.

전 감독은 이때부터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 훈련 때 성공한 적은 있지만 경기 때 한번도 해보지 못한 몸무게 3배를 들어보자는 것. 역도가 중심운동이라 몸무게 3배를 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세가 완벽해야 한다는 데 생각이 미친 전 감독은 스스로 역도 신발 개발에 나서기 시작했다.

▲ 생뚱맞게 웬 역도화 개발입니까?
= 역도 신발은 모두 손으로 만듭니다. 무엇보다 기록 향상을 위해서는 역도화가 필수적입니다. 특히 뒷굽이 중요합니다. 아무리 정교하게 만든다고 해도 뒷굽에 가죽을 붙이는 위치나 각도에 따라 미세하지만 차이가 나게 됩니다. 보통 사람들은 못 느끼지만 우리 선수들은 그런 미세한 차이라도 아주 예민하게 느끼지요. 훈련을 하고 쉴 때 당시 화승의 조행수씨와 함께 역도화 개발에 매달렸습니다. 청계천에서 컴퓨터로 굽을 깎아 오기도 하고 밤을 새기도 했지요.

▲ 역도화 개발에 성과가 있었습니까?
= 이 이야기를 하자면 깁니다.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을 3개월 앞두고 제주도 전지훈련을 떠났는데도 개발을 마치지 못했습니다. 쉬는 날에는 만사를 제쳐놓고 서울로 와서 개발에 매달렸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역도화를 개발하더라도 최소한 적응하는데 2개월 이상이 걸린다는 데 있습니다. 제대로 적응을 하지 못하면 오히려 신발을 바꾼 역효과가 나기 마련이지요. 결국 올림픽 20일을 남겨 놓고 개발은 마쳤지만 적응기간이 너무 짧았습니다. 인상에서 2위를 한 뒤 용상을 남겨 놓았는데 평소 165kg는 거뜬하게 들었고 이것만 들면 은메달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1차 시기에 실패하고 무게를 줄였으나 모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역도를 시작한 뒤 전공이나 다름없는 용상에서 실패해 실격 당한 것은 이때가 처음입니다.

올림픽 3연속 메달에 도전했다가 자신의 주 종목에서 실격이라는 아픔을 겪은 전 감독은 그러나 지금도 역도화 개발이 결코 무모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눈치였다. 전 감독은 역도화를 개발하면서 역도의 노하우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고 선수들이 어디에 주안점을 두어야 되는지를 깨닫게 되었다고 털어 놓았다.

전 감독은 이후 1998년 제주도 전국체전을 끝으로 선수생활 18년, 국가대표 12년의 현역선수에서 은퇴하고 2001년부터 국가대표 상비군 후보선수 감독을 시작으로 지도자 생활로 들어선다.

“장미란을 첫 제자로 맞은 건 나의 역도 인생에서 큰 행운”

▲ 지도자로 들어서 첫 제자가 장미란 선수라면서요?
= 2001년 지도자가 돼 여자선수 3명을 첫 제자로 맞았습니다. 장미란, 임정아, 김미경이 바로 제가 지도자가 돼 처음으로 만난 선수들이었습니다. 장미란은 체격조건이나 자질이 워낙 좋았으니까 처음 지도자를 시작한 제가 그런 선수를 만났다는 것 자체가 행운입니다. 최종적으로 성공을 하지는 못했지만 몇 년 동안 갖은 고생을 하며 역도화를 개발하면서 체득한 것들이 선수지도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 지난 런던올림픽에서 북한이 역도에 강세를 보이고 우리는 노메달에 머물렀는데?
= 북한의 강세는 한때 동구권에서 역도가 강세를 보였던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이제부터는 얼마나 체계적인 훈련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나라에도 잠재적인 올림픽 메달리스트들이 많이 있습니다. 고교생으로 여자 48kg급의 이슬기(서울체고)는 국가대표급의 기록을 내고 있고 세계주니어역도선수권대회 은메달리스트 전대운, 그리고 69kg급 원정식, 박다희 등 남녀 선수들이 모두 세계 수준에 오를 수 있는 능력을 충분히 갖추고 있습니다.

앞으로 이들에게 지속적이고 계획적인 투자를 통해 국제경기 경험을 쌓게 하고 양질의 훈련을 제공한다면 우리나라 역도의 장래는 밝다고 생각합니다.

인터뷰를 마무리 할 시간이 됐다. 끝으로 전 감독의 작은 키에 빗대 속설로 전해오는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어떤 대답이 나올지 궁금했다.

▲ 역도를 하면 키가 크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전 감독도 역도 때문에 키가 작으신 건 아닌가요?
= 역도선수들이 무거운 중량을 많이 들기 때문에 그런 소리가 나오는 것 같습니다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키가 크는 시기에 체중조절을 하기 위해 며칠씩 굶는 등 고생을 한 탓으로 제대로 자라지 못한 탓입니다. 오히려 역도를 하면 근육뿐만 아니라 순발력이 다른 종목보다 더 좋아지고 성장에도 도움이 된다는 과학적인 자료도 있습니다.

거의 2시간 이상 인터뷰를 하는 동안 전 감독은 한치의 자세 흐트러짐이 없었다. 때로는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다운 자부심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줄곧 이제 갓 운동을 시작한 새내기 같은 순수함이 말투 곳곳에 배여 있었다. 어쩌면 스포츠계의 대인(大人)을 만난 것인지도 모르겠다.

▲ 93상해 역도 금메달(전병관)

전병관 약력
▲ 1969년 11월 4일 출생 ▲ 신체조건 : 157cm, 몸무게 75kg ▲ 부인 서경미씨 사이에 1남 2녀(결혼 1996년 11월) ▲ 학력 : 전북 진안 마령초 - 마령 중학교- 전주고등학교 - 고려대학교 체육교육과 - 고려대 교육대학원(석사) - 한국체육대학교 (2009년 박사 학위 취득)
▲ 경력 : 1988년 서울올림픽 역도 52kg급 은메달,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역도 56kg급 금메달
▲ 상훈 : 체육훈장 청룡장(1992년), 맹호장(1988년) 등 기린장과 체육포장 등 다수

 

저작권자 © 미디어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