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아 칼럼] 영어스터디

김경아 칼럼l승인2015.06.27l수정2016.02.17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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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아의 ‘특별한 당신’] 그녀들이 이상해졌다. 아침마다 라디오를 켜고, 또각또각 도마질 소리에 맞춰 콧노래를 부르더니 이젠, 엉덩이까지 흔들어댄다. 펄펄 끓는 국을 휘휘 저으며 중얼중얼, 빨갛게 잘 익은 김치를 쓱쓱 썰며 중얼중얼. 냉장고, 싱크대, 정수기, 밥통, 여기저기 암호처럼 쓴 노란 메모지가 덕지덕지 붙어있고, 아침상을 차리는 내내 분주한 손놀림에 맞춰 중얼거리느라 쉴 새 없이 입술이 달싹거린다. 지수네, 민재네, 예은네, 훈이네. 언제부턴가 한결같이 이상해진 엄마들의 아침풍경. 그녀들, 정말 심상치 않다.

“Good morning, dear. What a find day!” 빨간 김치와 된장찌개를 보아하니 한국인데, 아침 내내 분주했던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영어로 인사를 한다. 제법 발음도 그럴싸한 것이 아침부터 참 열심히도 중얼거린다 싶더니, 혀가 제대로 꼬부라졌다.

“하루하루가 달라졌어요. 매일 하나씩 새로운 걸 알아가는 게 얼마나 즐거운지 아세요? 정말, 신이 납니다.”(38. 김지영) 서른여덟 지영씨, 하루해가 언제 지나는지도 모르게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다보니 어느새 초등학생 학부모가 되었다. 요즘 들어 자주 학교숙제를 도와달라며 영어책을 꺼내는 지수덕에, 이 모임을 시작했다는 지영씨는 이젠 아이 앞에서 얼굴 빨개질 일이 없어졌다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열심히 공부해서, 가족들과 자유 해외여행을 가는 게 꿈 이예요. 말이 통하면 여행이 얼마나 즐거울까요. 어서 그날이 왔으면 좋겠어요!”(33. 이수영) 두 살, 네 살 아이 손을 잡고 모임에 참석하는 수영씨는 오늘도 해외여행 가서 하고 싶은 일들을 이야기하며 수다삼매경에 빠졌다. 수다쟁이 그녀는 해외여행에 가서 자유롭게 영어수다를 떨 생각에 벌써부터 입술이 간질거린다.

“언제부턴가 속절없이 흘러가는 하루가 야속했어요. 나만을 위한 뭔가를 하고 싶었는데, 이 모임 소식이 단비같이 반가웠죠.”(40. 김수현) 수현씨가 영어책을 읽고 있는 어느 날, 옆에서 그림을 그리던 민재가 갑자기 물었다. “엄마도 공부해?”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이 짧은 한 마디가 수현씨의 가슴을 울렸다. “엄마는 옆에서 도와주는 사람, 밥해주는 사람으로 알고 있었는데, 공부하는 사람으로 인지했다는 게 얼마나 감사 하던 지요. 열심히 공부해서 나 자신에게도, 민재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김수현이 될 거예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육아와 살림에 지쳐 자존감이 낮아진 수현씨의 삶에, 이 모임이 단비를 내렸다.

“영어책을 끼고 캠퍼스를 누비던 대학시절로 돌아간 것 같아요. 공부 했던 시간을 되찾은 것 같아 정말 행복해요.”(35. 박시연) 시연씨는 요즘 훈이와 함께하는 영어놀이 시간에 흠뻑 빠졌다. 토익 고득점 경력이 있는 시연씨지만 아이에게 영어를 어떻게 가르쳐줘야 할지 몰라 막막했던 그녀에게 이 모임이 해답을 주었다.

갖가지 이유로 만난 그녀들, 그녀들이 입을 모아 행복해졌다고 칭찬하는 이 모임은 과연 무엇일까? 바로, ‘영어스터디’. 그 이름 전혀 새로울 것도, 신기할 것도 없는 평범한 이 모임이 뭐길래 그녀들의 삶이 이토록 변한 걸까. 일주일 한 번, 매주 금요일 오전 10시면 그녀들이 만난다. 한 번씩 번갈아가면서 스터디 장소를 제공하고, 수시로 밴드를 통해 진도와 과제를 체크한다. 교재는 학창시절 한 번 쯤은 들어봤던 ‘굿모닝 팝스’와 ‘엄마표 유아영어’. 아침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팝송을 들으며 갈래머리 교복 입은 옛 추억을 떠올리기도 하고, 영화 속 한 장면을 들으며 싱숭생숭한 소녀감성에 빠져보기도 한다. “생각보다 더 재미있어요. 팝송도 배우고, 영화도 보고, 또 아이와 함께 써볼 수 있는 유아영어를 공부하니 아이도 신기해 하며 좋아해요.” 아직 아이가 어려 아이와 하루 종일 한 몸일 수밖에 없는 이들은 모임에 유모차를 대동한다. 모두가 엄마이다 보니, 아이를 데리고 와도 눈살을 찌푸리는 일이 없다. 우는 아이에게 간식을 쥐어주고, 집에 있는 장난감을 서슴없이 내놓는다.

셋 아이 엄마로 제법 육아에 여유가 있는 시연씨는 모임이 있는 날에는 아예 벽면에 하얀 전지를 붙여놓고 아이들 손에 색연필을 쥐어준다. 엄마들은 공부하고 아이들은 그림 그리고. 놀다 서로 친구가 되어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 엄마들은 팝송을 부르다 우는 아이를 안고 뽀로로를 부를지언정, 아이 때문에 공부를 못하겠다는 소리는 아직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서로 처지가 비슷해요. 영어실력은 차이가 있지만, 실력이야 뭐. 어디 대회 나갈 것도 아니고, 또 라디오를 통해 수업을 들으니 큰 문제가 되지 않아요. 서로 마음이 통하고 공통의 관심사를 나눌 수 있다는 거 자체가 큰 기쁨이니까요.” 어린 아이 키우는 엄마가 다 그렇듯, 한 시간 라디오를 한 번도 끝까지 집중해서 들어본 적이 없는 그녀들이지만 그날 못 들은 건 다시듣기를 통해 수시로 듣고 서로 나눔으로 보충할 수 있으니 각자 시간을 쪼개고 짬을 내서 과제도 진도도 맞춰간다. “공부의 끈을 놓지 않는다는 데 의의가 있어요. 혼자라면 절대 못할거예요. 같이 끌어주기도 하고 밀어주기도 하며 격려하고 칭찬하면서 공부하다보니 벌써 1년이 되어가네요.” 공부 이상의 의미가 있는 ‘영어스터디’ 모임. 이 모임을 통해 그녀들은 일상의 시름도 나누고 주부로써 엄마로써 겪는 고충도 나눈다. 자신의 이름을 잊고 누구엄마로 살아오다보니 점차 자신의 자리를 잃어가고, 나를 위한 시간을 갖지 못해 자꾸만 움츠러들었다던 그녀들. 작지만 큰 노력, ‘영어스터디’ 모임은 그녀들에게 삶의 활력소이자 인생의 제2막을 선물해 준 귀한 나눔의 시간이 되었다. “나를 위한 시간을 갖다보니, 점점 더 나를 사랑하게 되는 거 같아요. 내가 행복해지니 아이들에게도 행복이 전해지는 건 물론이고요.” 행복해진 그녀들에게서 기분 좋은 에너지가 흘러가니 아이들도 남편도 웃을 날이 많아진다. 조금 더 일찍 일어나야 하고, 조금 더 늦게 자야 되지만 졸린 눈을 비벼가며 오늘도 라디오를 켜는 그녀들. 오늘 배운 표현을 중얼거리며 걸레질을 하고 있자니, 밴드에서 알람이 울린다. “오늘 숙제 끝! 내일 만나서 또 신나게 공부하자!” 숙제를 먼저 마친 수현씨의 글이 환하게 웃는 엉덩이를 씰룩거리는 이모티콘과 함께 춤을 추고 있다. 매일 매일이 신나진 그녀들처럼!

김경아 칼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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