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우부장

[백남우의 근현대문화유산이야기 : 천도교 중앙대교당] 1945년, 광복과 함께 상해 임시정부에서 귀국한 김구 선생이 가장 먼저 들른 곳은 천도교 중앙대교당이었다.
독립선언서를 인쇄해 전국으로 배포했던 이종일, 그리고 천도교의 3대 교주 손병희. 두 사람 외에도 민족대표 33인 중엔 열다섯 명의 천도교인이 있었다. 3.1운동의 중심이자 이후 독립운동의 지원군이었던 천도교. 그 중심에 있던 천도교 중앙대교당은 종교집회 장을 떠나 민족운동의 진앙지였던 것이다.

이 교당이 없으면 3.1운동이 없고
3.1운동이 없으면 상해 임시정부가 없고
상해 임정이 없으면
대한민국의 독립이 없었을 것이다
           / 백범 김구의 임정 귀국 연설 中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6호. 이곳은 천도교의 종교의식과 일반 행사를 하는 집이다. 천도교 중앙대교당은 이름이 시사하듯 천도교의 총본산 교당이다. 천도교는 1860년 최제우가 보국안민(輔國安民), 포덕천하(布德天下), 광제창생(廣濟蒼生)을 선포하며 창시한 동학에서 비롯되었으며, 1905년 3대 교주였던 손병희에 의해 천도교로 개칭되었다. 천도교 중앙대교당 또한 손병희에 의해 건립이 추진되었으며, 천도교 부구(部區) 총회의 결의에 따라  3백만 교도가 한 가구당 10원씩을 목표로 성금을 모아 당시 화폐 27만 원을 들여지었다. 설계는 일본인 나카무라 요시헤이(中村與資平), 시공은 중국인 장시영(張時英)이 맡았다. 나카무라는 1920년 숙명여고와 조선상공회의소 건물을 설계한 인물이다.(참고자료: 네이버 지식백과)

천도교 중앙대교당 건물은 1918년 12월에 공사를 시작해 1919년 3·1만세운동으로 지체되다가 1921년 2월에야 준공되었다.  총 건축비는 22만 원(사무실까지 27만 원)이 소요되었고 성금으로 모인 나머지는 3ㆍ1운동 당시에 사용되다 한다. 이 건물을 지을 때 교주 손병희는 4백 평 규모의 장대한 대교당을 지을 계획이었다.

1918년 7월에 조선총독부는 교당이 지나치게 거창하다는 것과 중앙에 기둥이 없어 위험하다는 구실을 붙여 불허하였다. 그래서 절반으로 줄여 겨우 허가를 받아 1919년 봄에 착공하였다.

규모는 대지 1,824평, 건평 212평이며, 기초는 화강석으로, 벽은 붉은 벽돌로 지었다. 천도교 중앙대교당은 지상 2층 중앙 탑 부 4층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데, 단층 구조로 중간에 기둥이 없이 천정을 철근 앵글로 엮고 지붕을 덮었다. 교당의 수용인원은 1천 명 이내이고, 석재는 창신동 돌산에서 채석하여 썼다고 한다. 건물 곳곳에 박달나무 꽃과 무궁화를 장식해 민족의 요람을 상징했다.

이곳은 우리나라에서 태동한 천도교의 가르침을 전파하는 일 외에도 일제강점기에는 항일운동의 거점이기도 하였으며, 또 소파 방정환이 중심이 된 어린이 운동의 출발점이기도 했던 의미 있는 곳이다. 이 건물은 명동성당, 조선총독부 청사와 함께 서울의 3대 건물로 꼽히던 곳이었다.

사람을 하늘처럼 존중한 천도교의 인내천 사상, 그리고 민족의 해방을 위해 순수한 열정을 다했던 이곳. 이곳엔 우리가 최초로 세운 또 하나의 가치가 있다.

 <천도교 중앙대교당 편> 프로그램 다시보기 : http://tvcast.naver.com/v/82991

tbs TV에서는 서울 일대에 남았거나 변형된 근현대문화유산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제작을 통해 서울의 역사․문화적 의미와 가치를 고화질 HD영상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프로그램은 네이버 TV캐스트(http://tvcast.naver.com/seoultime) 또는 tbs 홈페이지(www.tbs.seoul.kr)에서 다시 볼 수 있다.

[수상 약력] 2013 미디어어워드 유료방송콘텐츠 다큐멘터리 부문 우수상 수상,
2014 케이블TV협회 방송대상 PP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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