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화의 스포츠 엿보기] 7월 13일. 조선체육회의 정신을 이어받은 대한체육회가 창립된 지 95주년이 되는 뜻 깊은 날이다. 95년의 성상(星霜)을 지내는 동안 대한체육회는 국민들과 희노애락(喜怒哀樂)을 함께 하며 암울한 시기에는 한 줄기 빛으로, 나라가 어려울 때는 희망의 메시아로, 그리고 대한민국을 세계의 반석위로 올려놓는 견인차 역할을 해왔다. 이제 100주년을 눈앞에 둔 대한체육회가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국민들과 함께 하게 될지 사뭇 기대된다.

기다림으로 지샌 56년의 세월
대한체육회는 일제 강점기 암울한 시절인 1920년 ‘대한 국민의 통일적 체육 기관’을 표방하며 창립한 조선체육회가 모태(母馱)다. 건민(健民)과 애민(愛民)을 이념으로 한 조선체육회는 민족혼을 일깨우는 향도(嚮導)였고 한민족의 구심점이자 지주였다. 당연히 조선체육회는 일제의 끊임없는 해산 압력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1938년 7월 4일 어용단체인 조선체육협회와 합작이 결정되자 자폭하다시피 해산함으로써 ‘차라리 꺾일지언정 굴복하지는 않는다’는 저항(抵抗) 정신을 몸으로 실천했다.

7년의 공백에도 불구하고 광복이 된지 불과 3개월 만에 부활하고 극한적인 좌우 이념대립의 와중에서 정치적 중립으로 정쟁(政爭)을 초월한 대한체육회의 탁월한 선택은 바로 지금의 체육인들이 본받아야 할 규범으로 남아 있다.

1948년 생모리츠 동계올림픽과 런던올림픽에 참가해 신생독립국 ‘KOREA’의 탄생을 세계에 알리고 한국전쟁의 와중에도 전국체전을 개최함으로써 체육으로 국민들의 마음을 한곳으로 뭉치게 만든 것도 대한체육회였다.

하지만 아시아의 신생독립국인 대한민국이 세계 스포츠 무대에서 인정을 받기까지에는 많은 시간들이 필요했다. 일본 강점기 때는 조국의 광복을 기다리며 태극기를 가슴에 달고 마음껏 뛰기를 기다렸고 광복이 된 뒤에는 올림픽 금맥이 터지기를 기다렸다. 이처럼 기다림으로 지샌 인고의 세월은 조선체육회가 창립된 뒤부터 무려 56년으로 반세기를 훌쩍 넘겨버렸다.

물론 그동안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손기정이 마라톤 우승을 일궈냈고 아직 채 정부도 수립되기 전에 출전한 런던올림픽에서는 동메달을 2개나 따내는 수확도 올렸다.

그러나 이에 결코 만족할 수는 없었다. 쉽게 열어 주리라고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두드리기를 멈출 수는 없었다.

1956년 멜버른올림픽 송순천(복싱), 1964년 도쿄올림픽 장창선(레슬링)과 정신조(복싱), 1968년 멕시코올림픽 지용주(복싱), 1972년 뮌헨올림픽 오승립(유도)은 금메달 일보직전에서 무너졌다. 광복 후 7번의 올림픽에서 은메달 5개, 동메달 7개가 전부였다. 올림픽 금메달은 우리에게 말 그대로 ‘하늘의 별따기’나 다름없었다.

마침내 기다리던 금맥은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에서 터졌다. 부산 용두산 공원 비탈길의 작은 체육관에서 꿈을 키우던 레슬러 양정모가 장맛비가 내리던 8월 1일 새벽 그토록 기다리던 금메달 소식을 전했다.

기다림이 긴 만큼 기쁨도 컸다. 광복 후 첫 금메달은 우리 국민들에게 장마와 무더위를 한꺼번에 씻어준 청량제였고 서서히 세계 속으로 도약을 준비하는 대한민국의 모습이었으며 이는 곧 대한체육회의 자화상이기도 했다.

스포츠 변방에서 세계 스포츠 강국으로
대한체육회의 역사는 올림픽의 역사와 맞물린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 엘리트 스포츠의 목표가 올림픽 금메달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40년 올림픽 출전 사에서 거둔 값진 금메달의 이면에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조선체육회에서 자연스럽게 이름을 바뀐 대한체육회의 자기 개발과 혁신, 그리고 미래를 바라보는 안목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세계 역사에 유례가 없는 전쟁 중에도 올림픽(1952년 헬싱키)에 참가하고 1964년 도쿄올림픽의 참패를 거울삼아 국가대표 선수들의 산실이 될 태릉선수촌과 체육회관을 건립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대한체육회, 대한올림픽위원회(KOC), 학교체육위원회 등으로 흩어져 있던 3대 체육 기구를 과감히 통폐합, 대한체육회로 일원화하면서 체육인들의 힘을 한 군데로 모았다. 체육인들의 결집된 힘이 모이면서 비로소 대한체육회는 우리나라 스포츠를 총괄하는 명실상부한 본산으로 소임을 다 할 수 있었고 그 덕분에 올림픽 금메달이라는 결실을 맺은 것이다.

이러한 대한체육회의 끊임없는 노력은 정부와 경제계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1981년 ‘바덴바덴의 기적’인 1988년 서울올림픽 유치로 이어졌다. 이에 모든 체육인들이 올림픽 개최국이라는 자부심과 자긍심으로 뭉쳤고 1984년 LA올림픽을 거치면서 단숨에 세계 스포츠 열강에 진입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여전히 전쟁의 포화가 멈추지 않은 분단국가인 대한민국에서 서울올림픽 성공 개최는 무엇보다 체육인들의 위상 제고와 함께 우리나라를 중진국 대열로 오르게 하는 촉매제가 돼 스포츠의 위력을 한껏 실감케 해 주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의심의 눈초리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올림픽 금메달 한 개에 목매달던 8년 전과 달리 LA올림픽에서 금메달 6개를 따자 러시아(당시는 소련)를 비롯한 동구권이 불참한 ‘반쪽 올림픽’으로, 그리고 서울올림픽에서 금메달 12개를 따내자 ‘홈 텃세’로 비아냥을 받았다. 우리 쪽보다 오히려 해외 쪽에서 대한민국 스포츠를 인정하기 꺼려했다. 그토록 짧은 시간에 상식적으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성과를 냈기 때문이었다.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서울올림픽과 똑 같은 금메달 12개를 따내며 당당히 세계 7위를 차지하자 ‘반쪽 올림픽’ ‘홈 텃세’라는 소리는 어느새 사라져 버렸고 세계 스포츠계는 대한민국의 저력에 경의를 보냈다. 이는 세계 스포츠 열강들이 대한민국 엘리트 체육의 총본산인 대한체육회를 동등한 파트너로 인정했다는 뜻이다.

그 뒤 우리나라는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 잠시 10위권 밖으로 밀려나기는 했으나 2004년 아테네올림픽 금메달 9개로 9위, 2008년 베이징올림픽 금메달 13개로 7위, 2012년 런던올림픽 금메달 13개로 5위에 올라 세계 스포츠 강국으로 자리를 굳혔다. 양정모의 첫 금메달에 온 국민들이 환호하던 스포츠 변방국에서 세계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스포츠 강국으로 올라서기까지 불과 10년을 갓 넘겼을 뿐이다.

굳이 실례를 들지 않더라도 스포츠가 국민들이 힘들어 하고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꿈과 희망’을 주는 활력소가 된 것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이는 뼈를 깎는 고통 속에서도 묵묵히 목표를 향해 전진하는 국가대표 선수들과 지도자들, 그리고 이들을 뒷받침하는 대한체육회와 가맹경기단체, 지방체육회들이 혼연일체가 돼 흔들림 없이 꿋꿋하게 버텨 주었기에 이루어 낸 ‘세계 스포츠계의 기적’이었다.

조선체육회 창립 초심으로 돌아가 다가올 100년 설계해야
대한체육회는 창립 100년까지 불과 5년만을 남겨두고 있다. 일제 압제-광복-전쟁-근대화-민주화의 거센 소용돌이 역사 속에서 어떤 유혹이나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본연의 정체성을 지키며 한 세기를 굳건히 버텨온 것은 우리나라에서 대한체육회가 유일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

말 그대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대한체육회다. 광복 70년의 역사 속의 대한체육회는 국민들의 관심과 사랑을 과분하게 받았다. 때로 불협화음이나 잡음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체육인들 스스로 슬기롭게 극복했다.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유례없는 최단시간 스포츠 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국민들의 지극한 관심과 사랑, 그리고 엘리트 체육인들의 헌신과 희생이 한데 어우러진 결과였다. 이 덕분에 대한체육회도 우리나라 스포츠를 총괄하는 단체로, 그리고 국제적으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유일한 체육단체로 위상을 지켜올 수 있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대한체육회는 2년 전부터 전진보다는 오히려 퇴보하고 있다는 인상이 짙게 주고 있다. 시작 연유야 어떻든 체육인들은 폭력과 성추행(희롱)을 일삼는 파렴치범으로 전락했고 경기단체들은 심판 부정, 입시 비리의 진원지인 ‘비리의 온상’으로 낙인찍혔다. 이 틈을 탄 대한체육회와 국민생활체육회의 통합 문제는 대한체육회를 더욱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체육이라는 큰 줄기는 같을지 모르지만 목적이나 추구하는 목표가 전혀 다른 두 단체의 통합을 두고 각자의 이해에 따라 이합집산(離合集散)하며 갈등의 골을 키우는 체육인들의 편 가르기는 과거 혼란스럽던 대한체육회와 판박이처럼 닮아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 한 개 못 따더라도 우리 국민들은 관계치 않는다.” “올림픽에 태극기를 들고 가지 못해도 문제가 없다”는 한때 체육계를 쥐락펴락하던 인사들의 인식은 ‘뜨거운 사랑의 눈길’에서 어느새 ‘싸늘한 경멸의 비웃음’으로 바뀐 국민들의 시선을 대변하는 듯하다.

대한체육회는 이러한 국민들의 폭넓은 불신을 불식시키고 100년의 역사를 넘어 다가올 한 세기의 역사를 설계하고 준비해야 할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다. 또한 대한체육회는 체육이 광복 이후 국민들에게 큰 꿈과 희망을 준 가장 발전된 분야로 거듭 인정받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이를 위해 대한체육회는 1920년 7월 13일 조선체육회를 창립한 선배 체육인들의 초심(初心)을 헤아려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군림이 아닌 헌신과 스스로를 버리는 희생, 그리고 체육인들의 가슴에 면면(綿綿)히 이어 온 불굴의 정신, 애민정신을 계승하는 길만이 국민들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첩경이다. 대한체육회 95년의 역사가 곳곳에서 이를 실증하고 있다.

세계 스포츠 열강의 일원으로 위치를 공고히 하느냐, 아니면 국내에 안주해 정저지와(井底之蛙)가 될 것인가의 선택은 정치인이나 그 어떤 세력도 아닌 체육인들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사실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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