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모의 테마토크] 추석연휴 극장가에 ‘사도’(이준익 감독, 쇼박스 배급) 열풍이 거세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메이즈 러너: 스코치 트라이얼’을 비롯해 한국영화 ‘서부전선’ ‘탐정’ 등이 있지만 스코어 차이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사도’가 독주하고 있다.

비교적 역사에 충실했다는 시나리오가 갖고 있는 가족 간의 비극적인 사연과 더불어 모든 관계자들이 총력을 쏟아 부은 영화 자체의 힘이 이준익 감독이란 드라마의 강자의 브랜드파워를 등에 업고 관객들의 입소문을 강하게 부채질하고 있다.

여기에 조연배우 한 명 한 명마저도 가볍게 스칠 수 없을 만큼 불타는 연기력을 발휘하는 전 출연진을 이끄는 송강호와 유아인의 명연기가 화제의 중심에 서있다.

첨병은 유아인이다. ‘완득이’를 통해 브라운관을 벗어나 영화배우로서의 가능성을 충분히 알렸지만 ‘깡철이’에서 쓴맛을 한 번 본 그는 ‘베테랑’을 통해 또래 배우 중 단연 발군의 연기력을 갖췄음을 알리더니 ‘사도’에서 재확인시키려는 기세로 관객을 향해 ‘나 영화배우 유아인입니다’라고 크게 외치는 듯하 절정의 연기력을 보여준다.

▲ 사진=영화 '사도' 스틸

그리고 매조지는 연기 베테랑 송강호다. 그가 뛰어난 연기파이자 티켓파워까지 동시에 갖춘 배우라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이번엔 다시 한 번 놀라운 ‘신의 경지’의 연기를 펼친다. ‘사도’에서 그는 40대에서 80대까지의 영조를 연기한다. 얼굴 표정과 안면근육은 두터운 특수분장에 가려질 수밖에 없는 상황. 그런데 그는 눈빛과 목소리 톤의 변화로 웬만한 배우는 흉내도 낼 수 없는 다양한 심리를 변주해낸다.

이준익 감독은 인터뷰에서 “내가 송강호를 캐스팅한 게 아니라 송강호가 영조를 선택한 것”이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송강호는 살기 위해 왕이 됐고, ‘무수리의 아들이자 이복형인 선왕을 독살했다는 의심’이라는 콤플렉스와 평생을 씨름하며 살았으며, 그 한을 적자인 사도에게서 풀고자 했으나 실망만 안은 채 정치와 천륜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뇌하는 영조를 맞춤옷처럼 표현해냈다.

물론 그에 못지않은 연기파로 손꼽히는 최민식 김윤석 설경구 황정민 등도 그 자리에 대입해봄직하다. 하지만 느낌이 많이 다르다. 아웃풋역시 그랬을 게 명약환화하다.

이 감독은 ‘사도’를 ‘정(영조) 반(사도) 합(정조)’의 영화라고 했다. 선왕의 무덤을 성지로 여기는 영조는 종묘사직을 지키고자 안간힘을 썼다. 사도를 정통 왕위 계승자로 만들고자 하는 것 역시 그 연장선상의 자신의 당연한 의무로 여겼다. 정권을 쥔 노론의 눈치를 보는 것 역시 이 씨의 왕권을 지키고, 나라를 평안하게 위함이었다. 그게 영조가 금과옥조로 여기는 ‘정도’였다.

하지만 사도는 그와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학문을 갈고 닦으라면 개 그림이나 그렸고, 말 타고 활이나 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보편타당한 것이나 자신의 의견과 다른 것에 대해 ‘틀리다’는 잘못된 표현을 하곤 한다. 그건 마음 속 깊은 곳에 자신과 다른 것을 다르다고 인정하지 않고 잘못됐다는 편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는 영조와 다른 왕이 될 인물이었지만 영조는 그걸 용납하지 못하고 ‘틀리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사도는 ‘반’이다. 하지만 그는 사실 프론티어였고 프로테스탄트였다. 미국과 유럽의 역사에서 프론티어나 프로테스탄트가 ‘틀린’ 사람들이었을까?

이렇게 ‘달라서 틀린’ 영조와 사도를 화합(혹은 화해)시키고 매듭을 지은 사람이 바로 정조다. 하지만 영조가 사도를 뒤주에 가둬 죽이지 않았다면 과연 정조가 왕이 될 수 있었을까? 과연 이씨 왕조는 평탄하게 이어질 수 있었을까? 사도가 역사적으로 재조명될 수 있었을까? 그렇게 심오한 정치력을 발휘한 영조의 복잡한 심리변화와 내면의 아픔을 송강호만큼 표현해낼 수 있는 배우가 과연 몇이나 될까? 이럴 때 명불허전이란 단어밖에 없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다.

송강호는 1967년 1월 17일 경남 진해에서 태어나 부산 경상대학 방송연예과를 졸업한 뒤 1991년 극단 연우무대를 통해 연극 ‘동승’으로 데뷔한다. 연우무대가 배출한 영화배우는 문성근을 비롯해 김명곤 안석환 김뢰하 강신일 그리고 김윤석 등이 있다. 연극 ‘비언소’에 송강호를 캐스팅한 연출가 이상우는 앞서 안석환이 시도한 더듬는 말투를 주문했고, 다시 송능한 감독이 ‘넘버3’에서 주문함으로써 비로소 송강호가 유명 영화배우로 올라서게 된다.

하지만 그 전의 그의 삶은 다수의 연극배우처럼 혹독한 가난과 고난이었다고 한다. 아내 황장숙 씨와는 7년간의 별 재미없는 연애 끝에 1997년 결혼했고 슬하에 1남1녀를 두고 있다.

1996년 홍상수 감독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로 영화계에 데뷔한 송강호는 ‘초록물고기’를 거쳐 ‘배 배 배 배신이야’란 유행어를 낳은 ‘넘버3’를 만나게 된다.

그후 그의 배우로서의 삶은 탄탄대로, 승승장구였다. ‘조용한 가족’ ‘쉬리’ 등으로 시동을 건 그는 ‘반칙왕’으로 주연배우를 꿰찬 이후 ‘공동경비구역 JSA’ ‘복수는 나의 것’ ‘YMCA야구단’ ‘살인의 추억’ ‘효자동 이발사’ ‘남극일기’ ‘친절한 금자 씨’ ‘괴물’ ‘우아한 세계’ ‘밀양’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박쥐’ ‘작은 연못’ ‘의형제’ ‘푸른 소금’ ‘하울링’ ‘설국열차’ ‘관상’ ‘변호인’ ‘사도’에까지 이른다.

그도 중간에 위기가 있긴 했다. 탄탄대로를 달리던 그는 ‘남극일기’로 한 번 흔들린 뒤 다시 ‘푸른 소금’의 흥행실패로 건달 역으로 올라서 건달 역으로 간간이 재미를 본 자신의 유통기한이 다된 것이 아닌지 의문부호에 휩싸인다.

하지만 그는 송강호였다. 흥행과 완성도에서 모두 실패확률이 적은 선택을 해온 그의 배우로서의 판단능력과 더불어 작품을 살리는 데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연기력과 친화력이라는 그의 능력은 전체 필모그래피의 화려한 면면이 입증한다.

그가 훌륭한 배우인 증거는 중간에 박찬욱 감독에게 직접 ‘올드 보이’ 출연 의사를 강력하게 피력했고, ‘작은 연못’ 같은 의미 있는 작은 영화에의 출연을 마다하지 않았다는 철두철미한 ‘배우정신’에 있다. 특히 ‘변호인’ 출연은 그의 필모그래피 안에서 영원히 잊지 못할 소중한 선물이자 추억일 것이다.

▲ 사진=영화 '변호인' 스틸

그는 ‘변호인’ 시나리오를 받고 처음엔 거절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삶을 일개 배우인 내가 제대로 잘해낼 수 있을까”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하지만 박찬욱과 봉준호 감독이 ‘훌륭한 시나리오’라고 극찬한 데다 아내(황장숙)가 “당신이 신인도 아니고 뭐가 두렵냐”고 권유해 출연을 결심했다. 그는 “이 영화처럼 치밀하게 연기한 건 처음이고 인물의 진심을 그토록 간절히 떠올리고 쏟아내 본 것도 처음”이라고 소회를 표현했다.

그러나 이듬해 그는 웬일인지 단 한 편의 작품도 출연섭외를 받지 못 했다. 그리고 그는 김혜수 문소리 박찬욱 김기덕 박범신 등 문화예술인 594명과 함께 세월호 특별법에 따라 출범해야 할 특별조사위를 정부가 시행령으로 무력화하려는 데 반대하는 시행령 폐지 지지 선언에 동참한다. 당시 송강호는 “정치적인 입장이 아니라 박근혜 정부에게 애초의 약속을 지키라고 말하는 촉구일 뿐”이라고 분명하게 선을 그은 바 있다. 그의 표현대로 그는 ‘일개 배우’일 따름이니까.

자, 이런 배우가 또 있을까? 영화 외엔 단 한 번도 한눈을 판 적 없고, 사생활로 구설수에 오른 바 없으며, 출연하는 영화마다 관객들이 일방적인 신뢰를 보낸다. 스타랍시고 튀는 행동이나 말을 한 적도 없다. 짜증날 만큼 광고나들이가 잦은 것도 아니다. 그리고 하나의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할 말은 한다. 연예스타라고 부와 평탄의 길만 가는 게 아니다.

허세와 몰상식과 부도덕을 감추기 위해 억지와 기만과 허위라는 그럴 듯한 포장으로 대중을 바보 취급하는 연예스타가 잊을 만하면 물의를 일으키지만 송강호는 그냥 영화만 한다.

‘사도’에서 영조(송강호)는 사도(유아인)에게 “잘하자, 잘해야 애비가 산다”고 말한다. 일방적 명령형의 ‘잘하라’가 아니라 권유형의 ‘잘하자’다. 마치 후배 영화인들에게 그렇게 격려하고 유도하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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