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동일의 ‘롤링인더딥’] 사람들은 사랑할 때 상대방에게 우월감을 갖는 것이 위험한 태도라고 말한다. 하지만 사랑에서 열등감을 갖는 것 역시 위험하다는 사실을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젊은이들에게 꿈을 쫓으라고 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때로는 그 말이 돈만을 쫓으라고 말하는 것 보다 위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지금의 청춘들은 어릴 적부터 ‘꿈을 쫓는 삶’을 권유받았다. 그리고 그 때마다 돈키호테의 이름을 들었다. 동화에서부터 시작해 TV속 만화와 토크쇼, 베스트셀러,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어른들의 열띤 강연까지 꿈과 돈키호테가 등장하지 않는 곳은 없었다. 청춘들은 꿈을 쫓는 삶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배워왔다. 하지만 모든 청춘들이 꿈을 쫓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많은 청춘들은 꿈을 쫓지 않는 자신들의 삶을 어딘지 부끄럽게 느끼기 시작했다.

매체에서 꿈을 강조할 때마다 흔히 돈키호테가 등장한다. 돈키호테는 시대의 역경을 뚫고 꿈을 쫓는 상징이자 신이 되었다. 그리고 모든 신의 탄생이 그렇듯이 신의 광명 아래에 빛나는 자들이 생겨났고, 그 이면에는 광명의 그림자에 가려 어둠속에 갇히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런데 돈키호테의 깃발을 휘두르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다. 당신들 중에 돈키호테를 끝까지 읽은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는지.

‘당신들의 돈키호테’와 달리, 작가 세르반테스는 소설 ‘돈키호테’에서 주인공 돈키호테를 조금도 긍정적으로 그리지 않는다. 소설이 진행되는 내내 돈키호테는 기사도에 헛바람이 든 어리석은 인물로 등장하고 작가는 그 때마다 그를 조롱한다. 돈키호테 신봉자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심지어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는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모든 과거를 후회하며 눈물을 흘린다. 돈키호테는 자신의 재산을 모두 조카에게 유산으로 주되, 혹시라도 그녀가 돈키호테 자신의 꿈을 키우게 만든 ‘기사도 소설’을 읽는 남자와 만난다면 상속을 취소하라고 유언한다. 작가는 이 장면에서 돈키호테에게 연민을 보내며 처음으로 돈키호테에게 부정적이지 않은 평가를 내린다. 이처럼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를 자신의 목소리를 대변할 반증적 인물로서 사랑했다. 청춘들의 현실에 광명의 그림자를 드리운 ‘당신들의 돈키호테’는 세르반테스 책의 어느 곳에서도 등장하지 않는다.

지금처럼 돈키호테가 꿈을 상징하기 시작한 것은 이후에 출간된 각색본들에 의해서다. 최초의 각색자는 현실에 두 발을 붙인 원작 속에서 ‘꿈을 쫓는 삶의 아름다움’을 찾아내 원작보다 인간적이고 아름다운 소설을 써냈다. 새롭게 쓰인 ‘돈키호테’는 원작이 가진 고전의 위압감을 뒤엎을 정도로 강력했다. 특히 각색본의 강력한 힘은 원작에서 보이는 작가 개입이나 독특한 이야기 구성과 같은 ‘기술과 능숙함’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독자들이 가슴 속에 품고 있는 ‘꿈의 수호자’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인간적인 공감’에서 나왔다. 그렇게 각색된 돈키호테를 읽고 자란 독자들은 현실에서 꿈을 이루며 다른 이들에게 ‘살아있는 돈키호테’가 되었다. 이 과정들을 통해 각색된 돈키호테는 ‘살아있는 문학’으로서 원작보다 더 아름답고, 더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는 문학으로 재탄생했다.

하지만 신의 목소리가 광신도들에게 왜곡되듯, 각색된 돈키호테의 맹신자들은 현실에 눈을 감으며 원작뿐만 아니라 각색본의 교훈까지 뒤틀어버렸다. 원작이 담은 ‘무작정 꿈을 쫓는 삶의 위험성과 무책임성’은 부정되었고, 각색본이 전달하던 ‘희망’은 현실에 발을 붙여야만 하는 사람들에게 ‘절망’으로 다가갔다. 그렇게 생겨난 ‘당신들의 돈키호테’와 그의 추종자들은 이청준이 쓴 ‘당신들의 천국’ 속 ‘조원장’처럼 신념의 강요를 통해 사람들을 불행 속으로 몰아넣기 시작했다.

단 하루도 긍정적으로 평가받지 못하는 현실과, 그 현실로부터 눈을 감은 사람들의 목소리 사이에서 순진한 20대들은 현실과 꿈을 분리시켜버렸다. 현실 속에서 꿈을 채워가는 방법을 모르는 청춘들은 꿈을 저버리거나 반대로 꿈을 위해 모든 것을 저버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유럽여행이라고 불리는 유럽관광이 자신을 채워준다고 착각하거나, 꿈은 피를 먹고 자란다고 생각하며 세상으로부터 멀어져간다. 현실과 꿈을 분리시키며 자신과 행복을 단절시킨 청춘들에게, 여전히 외쳐지는 ‘꿈을 쫓아라.’는 과연 어떤 의미로 들릴까.

청춘들에게 꿈은 마치 삶의 정답인 것처럼 강요되어 왔다. 하지만 이제 그들에게 인생의 정답은 ‘꿈과 현실 사이의 객관식’이 아니라 ‘행복이라는 단답식’이라는 말을 해줘야 한다.1) 청춘들이 꿈을 포기해야만 하는 우리 사회의 현실은 절대 바람직하지 않다. 그 속에서 청춘들에게 꿈을 쫓으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핏대 세워 꿈을 쫓으라는 목소리 때문에 청춘들이 자신들의 삶을 사랑할 수 없다면, 그 목소리는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 없다. 당신이 삶에서 평생 동안 지켜왔던 ‘이상’이어서건, 단 한 번도 붙잡지 못한 ‘미련’이어서건 ‘꿈을 쫓아라.’는 타인의 삶에 당연하다는 듯이 강요될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 리케이온는 인간에게 행복이 최고의 목적이자 가치라고 말했다.

상대방의 행복을 저버리고 극단과 맹목 끝에 선 가치는 아무리 긍정적인 가치일지라도 위험성을 지니게 된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임에도 사람들에게 쉽게 잊혀진다. 쫓으라고 배워왔지만 쫓을 수 없어 꿈을 내던진 몇몇 청춘들에게 우리는 이제 새로운 말을 해줘야 하지 않을까.

-------------------------------------------------------------------------------------------------
1) 꿈은 왜 반드시 직업의 형태로만 규정되는 지도 생각해봐야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릴 적부터 꿈과 장래회망에 직업을 적도록 교육받아왔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 사람들은 [꿈=직업=생계/평생직장]으로 생각한다. 어떤 아이의 꿈은 ‘북극점에 도달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아마도 어른들은 아이에게 ‘탐험가’로 꿈을 바꿔 적으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그 아이가 북극점을 향하는 배에 타기 위해서는 요리, 사진, 의학, 목공 등 수많은 종류의 직업을 가질 수 있다. 그 중에서 그 아이가 가장 잘 하는 것을 선택하면 된다. 우리는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꿈=직업=생계/평생직장] 형태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저작권자 © 미디어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