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화가 만난 스포츠 人] “많이 달라졌네요. 선수들 신장이 커진 덕분인지 오픈 공격이 많아 복잡하지 않고 시원시원합니다.”

10월 15일 오후 2015~2016시즌 NH농협 V리그 현대건설-GS칼텍스의 서울 개막전이 열린 장충체육관. 7~80년대 ‘우승 청부사’로 명성을 떨친 전호관 전 국가대표 감독(74)이 20년 만에 경기를 보고 난 뒤 던진 첫 마디다.

전 전 감독은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에서 여자배구 국가대표 코치를 맡아 우리나라 구기 종목 사상 첫 올림픽 동메달을 일궈낸 명장. 1995년 현대건설 총감독을 끝으로 배구계를 떠난 전 전 감독을 만났다.

▲ 전호관 감독

- 어떻게 지내고 계십니까?
▲ 서울올림픽이 끝난 1989년에 호주 멜버른으로 이민을 가서 가족들과 잘 지내고 있지. 한때 호주 빅토리아주 대표팀 지도를 한 적도 있고 1992년부터 3년 동안은 현대건설에서 총감독도 했었지. 그 뒤로는 2년 꼴로 한번 씩 서울을 다녀가지만 배구인들도 잘 만나지 않고 배구장에도 안가요. 괜히 나타나면 이상한 소문만 나돌거든….

- 오랜만에 여자 경기를 보셨는데?
▲ 그렇게 되네. 1995년 이후로는 배구장에 나오지 않았으니까 경기장에서 직접 보는 경기로는 처음 같은데…. 말 그대로 20년이나 됐네. 그래도 이런 저런 경로로 우리나라 배구 소식은 잘 듣고 있지.

- 소감이?
▲ 내가 있을 때 하고는 많이 달라졌어. 그때는 프로도 없었고 경기방식도 사이드아웃제여서 지금의 랠리시스템하고는 다르고. 무엇보다 선수들 키가 많이 커졌네. 그 덕분인지 꼼수가 거의 없고 복잡하지 않아. 오픈공격이 많아서 관중들이 시원시원하겠어.

- 꼼수라니?
▲ 아 ~ . 속공 말이야. A퀵, B퀵 하는 속공 말이야. 지금은 속공이 거의 없어지고 그냥 위에서 때리는 오픈공격이 많아졌다는 말이지. 사실 속공은 상대방을 속이는 기술이거든.

- 여자배구에서는 시간차 공격이나 속공이 필요하지 않나요?
▲ 훈련량이 많고 서로 호흡이 잘 맞아야지. 오픈공격이 시원하다면 시간차나 속공은 아기자기하지. 그런데 외국인 선수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심한 거 같아. 우리 선수 활용도가 낮아. 이건 생각해 볼 문제야.

-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 이야기 좀 해주시죠?
▲ 이보다 먼저 1972년 뮌헨올림픽에 출전했었어. 그때 북한에 0-3으로 패해 상당히 심적 부담이 컸었어. 그래도 대표팀 코치를 계속 맡겨 줘서 설욕할 기회가 생겼지. 바로 2년 뒤인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 준결승전에서 북한에 3-0으로 승리했어. 결승전에서는 일본에 져 은메달을 땄고. 이게 몬트리올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딸 수 있는 자신감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을 거 같아. 뮌헨올림픽에 출전했던 선수들에다 조혜정, 변경자, 백명숙, 이순복 등이 합류해 호흡이 잘 맞았어.

- 당시 장기영 IOC 위원과의 일화도 있던데?
▲ 그 분은 배구를 안하신거 같던데 배구에 굉장한 지식을 가지고 계셨어. 공격수들이 상대 블로킹을 피해 강타를 날리기 위해서는 오른손과 왼손, 양손을 모두 사용해서 스파이크를 때릴 수 있어야 한다고 설명하시더라고. 실제로 나보다 10년 정도 선배로 부산세관에서 활약한 박동팔 선수는 두 팔을 모두 사용해서 스파이크를 날렸어. 그리고 장 위원은 대표팀에 무려 3천만 원을 격려금으로 주시더라고. 당시로는 정말 어마어마한 금액이었지.

- H퀵을 첫 시도하고 더블세터로 팀을 운영하셨는데?
▲ H퀵은 내 이름을 따서 일본 기자들이 붙인거야. 마치 A퀵이나 B퀵을 할 것처럼 양쪽에서 점프를 하면 상대방 블로킹이 그쪽으로 몰리게 되는 틈을 타 그 중간에서 속공을 하는 방식이었어. 많은 효과를 봤지. 또 우리는 유정혜와 유경화를 더블세터로 활용해 상대방들을 혼란시켰어. 그래도 몬트리올올림픽에서는 예선 1차전에서 소련(현재 러시아)에 1-3으로 패한 뒤 쿠바와 동독(현 독일)을 3-2로 간신히 이겨 힘들게 준결승전에 올라갔어. 준결승전에서 일본에 0-3으로 져 3~4위전으로 밀려난 뒤 헝가리에 3-1로 이기고 동메달을 땄어. 정말 그 감격을 어떻게 말로 표현해. 지금도 가슴이 뭉클한데.

- 국내에서도 우승 청부사로 명성을 날렸는데?
▲ 1964년 중앙여고 코치를 맡아 2년 뒤인 1966년 종별선수권대회에서 당시 여고 최강이던 숭의여고를 누르고 우승을 했어. 그 뒤 1970년에는 인창고 감독으로 부임해 1971년 광주종별대회에서 연승행진을 하던 대신고를 예선서 이겼으나 결승전에서 다시 맞붙어 졌어. 그리고 몬트리올올림픽이 끝난 뒤 현대건설 창단감독으로 당시 실업 최강이던 대농(뒤에 미도파로 개칭)과 일진일퇴를 거듭하다 1989년까지 대통령배 5연패했어.

- 기억에 남는 선수가 있다면?
▲ 어느 특정 선수를 말하기는 어렵고 다 기억에 남아. 모두 착하고 열심히 운동했어. 이들보다 정말 평생 잊지 못할 분은 연병해 체육부장이셔. 내가 몬트리올올림픽이 끝나고 당시 김택수 대한체육회장이 한일합섬 감독으로 오라고 하더라고. 한일합섬은 박진관 선배가 맡고 있었어. 그래서 선배를 밀어내고 갈수가 없다고 거절을 했지. 그래서 놀고 있는데 연병해 부장께서 매일 서울신문사로 출근하라고 하셨어. 내가 기자도 아니고 할 일이 있나. 올림픽 동메달로 연금 30만원이 나왔는데 이건 부산에 있는 부모님에게 아예 통장채로 드려서 돈이 있나. 아침 10시쯤 서울신문사 옆에 있는 다방에 가서 커피 먹고 놀다고 점심에다 그리고 저녁에는 술까지 사주셨지. 거기다 집에 갈때면 집 사람하고 같이 먹으라고 케이크도 사주고 가끔 용돈도 주셨어. 그러던 어느 날 연 부장이 곧 현대건설 정주영 회장이 여자배구팀을 창단한다고 하니 거기로 가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현대건설 창단감독이 된 거야.

- 가장 화려할 때 현역에서 떠나셨는데?
▲ 좋을 때 떠나야지 그렇지 않으면 이상해 보여. 때마침 가족들도 호주로 떠나고 해서 갔지. 더 이상 묻지 마.

- 지금 지도자나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 프로배구가 남자 7개, 여자 6개 팀이 있는데 중고등학교 팀이 너무 적어. 제대로 배구가 발전하려면 중고등학교에 팀이 많아야 돼. 학교팀 육성에 모두가 힘을 쏟아야 돼.

- 끝으로 복귀하고 싶은 마음은 없으신가요?
▲ 배구판이 그립기는 하지. 고등학교 팀을 맡고 싶은 욕심은 있어. 단 무보수로.

◇ 인터뷰 후기

전호관 전 감독과의 인터뷰는 한시간만에 끝나고 곧바로 식당으로 옮겨 막걸리를 곁들여 저녁을 함께 했다. 전 전 감독이 오랜만에 한국에 왔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김동준 더 스파이크 편집주간, 김대호 MK 스포츠 편집국장, 문복주 J&J미디어 대표가 자리를 같이 해 주었다. 식사 자리는 화기애애한 가운데 거의 두 시간 가까이 이어지면서 7~80년대 배구 취재 기자와 선수, 그리고 배구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인천에 있는 딸 집에서 부인과 함께 머물고 있다는 전 전 감독은 항상 우리나라 배구 발전을 기원한다며 많은 사람들이 배구를 사랑해 주기를 기원하면서 지하철로 발걸음을 옮겼다.

▲ 정태화 한국체육언론인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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