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화가 만난 스포츠 人 : 대한배구협회 연병해 고문 인터뷰] 대한배구협회 연병해 고문(81·한국배구연맹 자문위원)은 ‘배구인이 아니면서도 가장 배구인 다운 배구인’이다. 즉 배구인 이상으로 배구를 사랑한다는 뜻이다. 연 고문에게 배구와 인연을 맺게 된 연유를 묻는 인터뷰를 요청하자 연신 손사래를 치면서도 정작 말문을 트이자 청산유수다. 또 기억력은 얼마나 좋은지 까마득한 옛 시절 배구인들 이름도 거침이 없다. 연 고문과의 인터뷰는 11월 20일 늦은 시간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자택에서 이루어졌다. 연 고문 특유의 반말투 어법이 오히려 더 정감이 넘친다.

- 늦게 시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 난 배구에서 한 게 없어. 나한테 들을게 있을지 몰라. 그래 뭘 물어 볼 건데.

- 처음 배구협회와 인연을 맺은 연유는?

▲ 서울신문 체육부장 때인 1975년 일거야. 대한배구협회 전무이사인 대신고 김한수 교장이 언론사 후배들인 유홍락(전 서울신문) 이근양 이태영(이상 전 중앙일보)과 수시로 만났는데 협회에 들어와 이사를 맡아 줄 사람을 추천해 달라고 하자 이구동성으로 날 추천한거야. 난 당연히 싫다고 했지. 그러자 이낙선 협회장이 두 번이나 사무실 근처로 찾아와서 요청을 해도 난 안한다고 했지. 이번에는 장기영 IOC 위원(한국일보 회장)이 부르더니 배구협회에 가서 1년만 도와주라는 거야. 거절할 수가 없어서 기획이사로 들어갔지.

- 굳이 연 고문을 원한 이유가 있었나요?

▲ 글쎄, 아마 내가 체육기자를 하면서 배구를 좋아했고 그때 비배구인과 배구인들의 사이가 굉장히 안 좋았어. 그걸 제대로 중재할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라고 생각한 거 같아.

- 비배구인과 배구인의 알력이라면?

▲ 전무이사인 김한수 대신고 교장이 비배구인이야. 그렇지만 김 전무는 배구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어. 배구인들 이상이었어. 그러니까 전무를 맡았지. 대신고가 백 몇 연승을 할 때 였어 그러니까 김 전무쪽에 일부 배구인들이 줄을 선거지. 소위 서대문파라고 했어. 그 반대쪽에는 실업연맹 박진관 전무가 있었지. 당연히 알력이 생겼지. 그걸 내가 중재한거야.

- 어떻게 중재를 하셨는지?

▲ 이제 곧 몬트리올 올림픽이 시작된다. 이왕 김 전무가 여자대표팀 감독을 맡았으니 임기를 존중해 주자. 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내야 배구가 인기도 좋아지고 여러분도 나아질 게 아니냐? 주로 이런 내용이었지. 모두가 수긍하더군.

- 몬트리올올림픽 준비는?

▲ 1972년 뮌헨올림픽에 출전해 메달을 따지는 못했지만 여자는 4위를 했고 남자는 7위를 해 남자보다는 여자가 가능성이 높았어. 제대로 훈련을 하기위해서는 전지훈련도 가야 되는데 돈이 없어. 그래서 이낙선 회장에게 돈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지. 이 회장은 국세청장, 상공부장관을 거쳐 국립공원관리공단 이사장을 하고 있을 때여서 힘이 많이 떨어졌었어.

- 자금은 마련하셨나요?

▲ 이낙선 회장에게 최소 1,500만원이 필요하다고 보고했어. 그때 여자실업팀 선수들 월급이 7만원이니까 엄청난 금액이지. 구할 방법이 있나? 그래서 내가 장기영 회장을 찾아가서 이야기하고 도움을 받자고 아이디어를 냈어. 그래서 이 회장하고 장 회장을 찾아가 몬트리올올림픽에 여자팀이 메달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훈련비가 모자란다고 하니까 장 회장이 얼마가 필요하냐가 묻더라고. 그래서 3천만원이라고 했지. 1,500만원을 더 부풀린 거야. 그러면서 또 장 회장에게도 자금을 마련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줬지. 장 회장이 배구에 관심이 많았거든. 알았다고 하더군. 그리고 방을 나오니까 이 회장이 펄쩍 뛰더라고. 1,500만원도 구하기 어려운 판에 3,000만원이라고 하면 어떻게 하냐구. 내가 그랬지. 어차피 밑져야 본전 아니야, 장 회장을 믿고 기다려 보자. 지금 생각하면 무슨 배짱인지 몰라.

- 아이디어라면?

▲ 그때 여자배구는 인기가 좋아 11개 실업팀이 있고 남자는 5개 정도였어. 장 회장에게 이들 실업배구팀의 오너를 불러서 점심을 사면서 협조를 구하면 된다고 했지. 장 회장이 내 말대로 했어. 나는 사전에 당시 대한체육회 회장인 한일합섬 김택수 회장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협조를 구하고 양면작전을 펼쳤어. 장 회장이 조선호텔에 남녀 실업팀 구단주들을 초청해 직접 좋은 와인도 가져와 권하면서 돈 이야기를 했지. 그러자 김택수 회장이 먼저 우리 한일합섬에서 3백만원을 내겠다고 한거야. 계획대로 된 거지. 그러나 다른 실업팀들이 다른 말 할 수 있나. 얼른 내가 나서지 또 쐐기를 박았지. 아무래도 한국전력이나 종합화학 보안사 등 국영기업들은 그만한 돈을 마련하기 어려우니 2백만원으로 하지고. 그때 장 회장이 IOC 위원이기도 했지만 부총리를 그만두고 다시 한국일보 회장으로 돌아왔을 때니까 가능했어.

- 쉽게 훈련비를 마련하셨군요?

▲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그렇게 쉽게 돈을 주나? 돈 받으러 다닌다고 문전박대도 당하고 고생 많이 했지. 그런데 역시 큰 사람은 틀려. 그때 종합화학은 백선엽 사장이었는데 며칠 뒤 비서실에서 연락이 온 거야. 갔더니 2백만 원을 현찰로 주더라고. 그런데 선경은 배구협회서 왔다고 하면 아예 사장 면담도 시켜주지 않는 거야. 그럴 때는 신문사를 팔았지. 내가 신문사 부장인데 나도 바쁜 사람이다 이런 식으로 말하면 금방 면회를 시켜줬어. 사실 그때 선경이 우리 배구협회에 제일 협조적이었어. 선경에 기금 7천만원 정도를 맡겨놓고 매달 3백만원씩을 이자로 받았으니까 협회가 고리대금업을 한거나 마찬가지지.

- 어느 정도 모금이 됐습니까?

▲ 당초 목표보다 많은 3,400만원이 모였어. 정말 대단한 금액이었지. 이 돈으로 뮌헨올림픽에서 일본을 금메달로 이끈 다이마쓰를 초청하기도 하고 선수들에게 수당도 줬지. 선수들은 그때 월급이 7만원이었는데 대한체육회에서 나오는 훈련보조비 2만원에 협회에서 5만원을 더 보태 7만원을 준거야. 그러니 선수들은 매월 100% 보너스를 받은 셈이지.

- 여자 선수들에게만 지급했습니까?

▲ 처음에는 남자는 메달 가능성이 없으니까 아예 올림픽에 출전도 시키지 않을려는 거야. 그래서 내가 남자 감독을 찾아가 선수들이 삭발이라도 해서 반드시 출전해야 한다고 떼를 쓰라고 했지. 그래서 남녀 모두 출전하고 수당도 함께 지급했어.

- 다이마쓰의 훈련이 너무 힘들어 이탈자로 생겼다는데?

▲ 다이마쓰가 롤링리시브라고 해서 엄청나게 훈련을 시켰어. 남자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거던. 결국 훈련을 견디다 못한 박인실이 토요일에 외박을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았지. 그때 박인실은 대학교에 다녔는데 고교만 졸업하고 실업팀에 간 선수들과 마찰도 있었어.

- 몬트리올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따는 현장을 보셨겠네요?

▲ 나는 올림픽에 안 갔어.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그때 메달을 따고 난 뒤 심판 매수 문제가 터져 시끄러웠어. 사실 내가 몬트리올에 갔으면 그 짓을 할 수도 있었거든. 그런데다 당시는 외국에 나가는 게 큰 특권이었어. 비배구인인 내가 외국에 나가면 또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았겠지. 난 8년 동안 배구협회에 있으면서도 협회 일로는 딱 2번만 외국에 갔어.

- 현대건설 여자배구팀 창단에도 관여하셨는데?

▲ 몬트리올올림픽 여자대표팀 코치로 전호관을 임명했는데 전호관은 뮌헨올림픽 때도 코치를 해 국제 감각이 있는데다 그때 4위를 했잖아. 감독은 김한수로 비배구인이여서 코치가 다 해야 하는데 전호관만한 코치가 없었어. 그런데 전호관이 감독으로 있는 태광산업에서 이임생 회장이 절대로 안 된다는 거야. 월급을 협회에서 준다고 해도 전호관을 대표팀에 못 보낸다는 거지. 할 수 없이 전호관이 사표를 내고 대표팀 코치를 했어. 전호관이 올림픽에 다녀오면 직장이 없다고 걱정을 해. 내가 어떻게 하든 구해 줄테니까 걱정하지 마라고 큰 소리쳤지. 사실 복안이 있었거든. 산업은행이 남자농구, 여자배구를 육성했는데 팀을 해체하기로 되어 있어 이들 선수들은 팀이 해체되면 갈 데가 없잖아. 그래서 이들로 새롭게 팀을 창단하기로 하고 현대건설과 사전준비를 해 놓았어. 당시 현대건설 이명박 사장은 팀 창단에 미지근했어. 그래서 내가 이런저런 경로로 알고 있던 정주영 회장에게 바로 찾아가 팀 창단 허락을 맡았지. 몬트리올올림픽 동메달이 큰 효과를 본거지. 그래서 전호관을 현대건설 창단감독으로 보냈지. 물론 이때 정장현, 정덕화 등이 뒤에서 많이 도와줬어.

- 몬트리올올림픽까지만 협회일을 도와주기로 하셨는데?

▲ 그랬지. 올림픽이 끝나고 이낙선 회장이 배구협회장을 그만두게 됐어. 대한체육회장에 박종규 회장이 선출됐거든. 잘 알지. 피스톨 박. 그 피스톨 박하고 이 회장은 다 같이 5‧16 동지였거든. 그런데 박종규가 대한체육회 회장이 되고 나니 이 회장이 배구협회장을 안 하겠다고 한거지. 자존심이 상한거야. 잘 됐다고 나도 같이 그만 뒀지. 그런데 후임으로 내무부장관을 지낸 박경원이 협회장으로 취임했는데 이 사람을 박종규가 추천을 한거야. 내가 그만 두니까 박경원이 박종규에게 이야기를 한 모양이야. 박종규가 서울신문 김종규 사장에게 전화를 해 내 이야기를 한거지. 회사 사장이 업무에 지장이 없는 범위에서 도와주라고 하는데 내가 고집을 부릴 수가 없잖아. 그대로 협회에 붙잡히고 말았어.

- 그래서 결국 8년이나 협회에 관여하셨군요?

▲ 1984년에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을 연임시키고 그만뒀지. 서울신문에서 두 번째 공무국장을 맡을 때였는데 납 활자를 모두 없애고 컴퓨터를 막 들여놓을 때였거든. 여기에다 스포츠전문지인 스포츠서울 창간을 준비하면서 전면 가로쓰기에 올컬러 제작을 계획하고 있어서 도저히 협회에 관여할 형편도 못됐어. 조 회장이 연임이 되고 어느 날 이야기를 들으니 효성그룹에서 배구협회 모든 장부를 싹 걷어갔다는 거야. 괜히 기분이 나쁘더군. 며칠이 지나 조 회장이 선배님 단 둘이 식사나 하자고 전화를 했더라고. 조 회장이 경기고등학교 후배거든. 난 다시 협회에 들어오라는 이야기면 안 하겠다고 했지. 그러니까 조 회장이 꼭 만나야 한다는 거야. 할 수 없이 단 둘이 만났어. 그랬더니 조 회장이 협회 장부를 보니까 선배님이 그동안 개인적으로 돈을 너무 많이 썼다면서 봉투를 주더라고. 나중에 열어보니 300만원이 들어 있더라고. 당시로는 큰 돈이었지.

- 그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 내가 있는 동안 3명의 회장과 함께 했는데 누가 뭐라고 해도 이낙선 회장이 최고였던 거 같아. 그리고 비배구인이지만 김한수 교장도 우리나라 배구의 큰 공로자라고 생각해. 그리고 나와함께 오랫동안 국제이사를 하면서 자비로 외국에 나가 우리나라 배구를 알린 임형빈 추계학원 이사장도 그 공로를 인정해 줘야 돼.

- KOVO 출범에도 상당한 관여를 하셨다는데?

▲ 아, 그거 크게 관여는 안했어. 2004년에 김광호 엄한주와 함께 프로배구 출범을 논의했지. 그때 한국전력 자회사 사장으로 있던 김혁규씨를 소개했는데 마침 김광호와 부산동성고 동창이라는 거야. 그래서 의외로 쉽게 KOVO가 출범을 했지. 그게 전부야.

- 한국배구 100년사 편찬도 맡으셨습니다.

▲ 내년 5월 제천에서 열릴 예정인 종별선수권대회에서 100주년 잔치를 벌이기로 하고 기념사업단을 발족시켰어. 그 가운데 하나가 100년사 편찬인데. 내가 기자 출신이라서 맡았는데 원고료나 발간비가 아직까지 전혀 마련이 되지 않아 답보상태야. 다음 달에 배구인들을 상대로 공개적인 모금운동을 벌여볼까 생각중이야.

- 지금도 배구장을 자주 다니시는데?

▲ 지방은 자주 못가고 장충체육관에서 열리는 경기는 거의 빠짐없이 보고 있지. 정말 선수들이 많이 달라졌어. 몸도 엄청 커지고 스피드도 좋아지고. 그냥 난 비배구인이니까 그 정도밖에 몰라.

- 배구인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씀이 계시면?

▲ 프로가 생기면서 서로가 감독을 하겠다고 싸움하는 모습은 너무 보기가 안 좋아. 그리고 프로구단들은 자기들만 생각하지 배구판 전체의 발전에는 아예 눈을 감고 있는 거 같아. 내가 배구에 관계했을 때는 세계랭킹이 5~10위권이었지만 지금은 20위권이야. 배구인들이 많이 반성해야 돼.

- 원로 체육기자로서 후진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은?

▲ 난 요즘 후배 기자들 존경해. 실력이 너무 좋아. 경기를 보는 안목뿐만 아니라 글을 쓰는 솜씨도 대단해. 그렇지만 기자들이 자신들의 담당종목 행정에까지 관여하는 것은 좋지 않아. 그런 건 전문 경기인에게 맡겨 놓는 게 좋아.

- 오랜 시간 여러 가지 말씀 감사합니다.

▲ 미안해. 도움이 됐는지 모르겠네.

◇인터뷰 후기
연병해 고문은 글쓴이의 언론계 직계 대선배다. 연 고문은 “배구에서 한일이 없다”며 몇 차례나 인터뷰를 사양하시다가 후배의 강권(?)으로 간신히 이루어졌다. 연 고문은 배구뿐만 아니라 스포츠 전 종목에 걸쳐 우리나라 초창기 체육 발전에 큰 공헌을 해 우리 체육기자들 사이에서는 전설로 통한다. 특히 우리나라 체육 근대화에 토대를 마련한 대한체육회 민관식 회장을 비롯해 각 종목 회장들과의 깊은 유대관계를 바탕으로 선수들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또 체육기사에서도 승리하는 쪽에 초점을 맞추더라도 패한 쪽을 항상 배려하고 좋은 일은 크게 보도해 체육인들의 사기를 높여주고 행정기사보다는 선수들 중심 기사를 많이 실어라고 강조한다. 두 차례의 큰 수술을 받고도 지금도 후배들이 주는 술잔을 마다하지 않으시는 연 고문이 웃음은 마치 해맑은 어린아이의 미소를 보는 듯한 착각마저 들게 한다. 전호관 전 여자국가대표팀 감독은 연 고문을 ‘대인’ ‘큰 어른’이라 부르기를 서슴치 않는다.

현재 퇴직한 체육기자들의 모임인 한국체육언론인회 좌장(座長)으로 고문을 맡고 계신 연 고문에게 이 기회를 빌려 ‘존경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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