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화가 만난 스포츠 人] 진준택은 ‘원만하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그를 아는 선배나 후배들은 “자신이 정한 기준에 벗어나면 타협을 하지는 않지만 생각이나 행동이 보기 드물게 건전하고 합리적이어서 대부분 배구인들이 그를 좋아한다.”라고 입을 모은다. 또 한편으로는 기본에 충실한 ‘원칙주의자’ ‘합리주의자’라고도 말한다. ‘원칙주의’ ‘합리주의’라는 말은 좋은 뜻이기도 하지만 이를 뒤집으면 ‘고집이 세다’ ‘융통성이 부족하다’라는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아마 이런 그의 고집(?)이 삼척고등학교 1학년 때 다른 학교 코치의 말만 믿고 전화번호만 하나 달랑 들고 친척은커녕 친구조차 없는 서울에 무작정 상경해 무려 52년을 배구인으로 살게 한 동기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진준택은 여느 다른 스타 출신 배구인들과 마찬가지로 선수와 지도자로 화려한 경력을 두루 갖추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청소년 대표로 발탁된 것을 시작으로 1966년에는 신인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실업배구에 연착륙했고 8년의 국가대표 선수를 거치면서 3차례 아시안게임과 1972년 뮌헨 올림픽에 출전했으며 또 2차례는 국가대표 감독으로 아시안게임에 나갔다. 국내배구에서 한때 유행병처럼 번졌던 아랍권(카타르) 국가대표 감독을 지냈으며 ‘백구의 대제전’ ‘슈퍼리그’로 명명된 실업배구에서 고려증권 지휘봉을 잡아 13년 동안 정상권에 군림, 명감독으로 명성도 날렸다.

IMF의 여파로 고려증권이 부도로 팀을 해체하자 고향 강원도로 내려가 대학(한중대학교)에서 여자대학배구팀을 육성에 전념, 배구와 인연을 이어갔고 2004년 프로화를 추진할 때는 추진위원으로 적극 참여해 프로배구 출범에 산파역이 됐다. 프로배구가 출범한 뒤 대한항공의 제3대 감독을 역임하기도 했으나 큰 성적을 내지 못한 채 1년 7개월의 단명 감독을 마지막으로 지도자 생활을 마쳤다. 그 뒤 그는 2013년 한국배구연맹(KOVO) 경기위원장을 맡아 2년 임기동안 프로배구가 같은 겨울 종목인 프로농구 인기를 뛰어 넘는데 일익을 담당하는 등 그야말로 배구는 그의 생활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처럼 그가 국가대표 선수로, 그리고 실업팀 코치, 감독을 거쳐 국가대표 감독으로, 그리고 프로배구에서 경기위원장으로 꾸준하게 현장에서 버틸 수 있었던 데는 바로 기본과 원칙을 지키는 생활신조가 큰 힘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의 배구에 대한 철학은 간단하다.

“배구요. 장윤창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시도한 돌고래 서브, 요즘은 스카이 서브라고 하지요. 그리고 백어택, 오픈 공격, 모두 화려하고 보기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우승할 수는 없습니다. 이기기 위해서, 특히 우승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수비와 팀웍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바로 수비와 팀웍은 배구의 기본입니다.”

“고려증권에 수비에서 핵을 이룬 홍해천이 없었다면 결코 오랫동안 실업배구 정상에 설 수 없었다.”는 그는 “세터 이경석을 비롯해 장윤창 유중탁 정의탁과 이들이 빛을 발할 수 있도록 수비에서 묵묵히 받쳐준 홍해천이 서로 단단한 팀웍을 이루었기에 오랫동안 정상권을 지킬 수 있었다”며 수비와 팀웍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바로 기본을 중시하는 그의 배구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국가대표 선수는 자기 가슴 왼쪽에 붙어있는 태극기가 얼마나 무거운지를 알아야 합니다. 팀 이기주의, 개인 이기주의에 빠져 국가대표를 소홀히 한다면 결국은 자신에게 마이너스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가 처음으로 국가대표 지휘봉을 잡은 1989년 서울서 열린 아시아선수권대회 때의 경험이다. 당시 한국은 실업팀들과 협회가 갈등을 빚고 있는데다 선수들까지 최약체로 평가돼 모두가 감독 자리를 기피했다. 홈에서 열리는 대회에 일본 중국에 패하게 되면 팀의 감독 자리까지 내 놓아야 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실업배구 우승팀 감독이라는 이유로 억지로 떠밀려 감독을 맡은 그는 주포인 하종화가 느닷없이 깁스를 하고 나타나는 등 소속팀에서 대표팀 구성에 협조를 하지 않았다. 할 수없이 노진수 마낙길 정의탁 홍해천 이경석 신영철 등으로 대표팀을 꾸린 그는 단장도 없이 전지훈련을 통해 팀웍을 다지고 일본과 중국의 전력을 분석해 결국 우승을 일궈냈다. 원칙의 승리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이경석은 이 대회에서 최우수선수로 선정됐고 이때부터 국내 최고의 세터로, 그리고 고려증권 우승의 주역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도 아시안게임에서는 아픈 기억을 갖고 있다.

“국가대표 선수 때는 일본을 못 이겨보고 국가대표 감독 때는 중국을 못 이겨 보고 ….”

국가대표 선수와 국가대표 감독 시절, 아시안게임 금메달 일보 직전에서 일본과 중국에 패해 은메달에 머문 기억이 못내 아쉬운 듯 말끝을 잇지 못한다.

1966년 방콕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실업 1년생 막내로 대표팀에 합류한 그는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과 이해 열린 세계선수권대회까지 국가대표로 활약했다. 국가대표 선수로 8년을 보냈다. 그동안 그는 3차례 아시안게임에 주전 오른쪽 공격수로 나섰으나 마지막 고비에서 모두 일본에 패해 준우승에 그쳤다. 아시안게임 일본전 3연패다.

2년 뒤 현역에서 은퇴하고 충주비료 코치, 카타르 대표팀 감독을 거쳐 고려증권 감독 시절이던 1990년 북경 아시안게임과 8년 뒤인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에 국가대표 감독을 맡아서는 일본전 2연승으로 선수 시절 3연패를 시원하게 설욕했으나 중국의 만리장성 벽에 막혀 또다시 준우승에 머물고 말았다. 아시안게임에 선수로 3번, 감독으로 2번 등 모두 5번의 아시안게임에서 한 번도 정상에 오르지 못했다. 아쉬움이 클 수밖에 없었으리라 여겨진다.

1972년 뮌헨 올림픽도 그에게는 잊지 못할 추억거리를 남아 있다. 일본이 이미 자동출전권을 확보한 상태에서 우리나라가 올림픽에 나가기 위해서는 북한 대만과 예선전을 벌여야 했다.

예선전 직전 소위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돼 남북은 해빙무드였지만 체제 우위 경쟁은 여전했다. 따라서 북한과의 대결이 문제였다. 당시 북한의 실력도 상당해 일본은 북한의 우세를 점쳤을 정도였다. 그러자 정부에서 “북한에 질 것 같으면 아예 출전을 하지 마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스포츠에서 북한에 패하는 것 자체를 마치 정치 체제 열세를 자인하는 꼴로 인식되던 때의 해프닝이었다.

북한과의 예선전에 대비해 일본 배구의 대부인 마쓰다이라를 초청해 대표 팀 강화훈련까지 했던 배구협회는 이낙선 회장이 직접 육영수 여사를 찾아가 설득한 끝에 간신히 출전 허락을 받아냈다. 대표 팀은 일본 네델란드 전지훈련을 마친 뒤 북한과 맞붙었는데 예상을 깨고 북한에 3-1로 승리하는 등 2연승으로 뮌헨 올림픽 출전권을 거머쥐었다.

북한을 이기고 귀국했으면 열렬한 환영이라도 받았을 텐데 올림픽이 코앞에 닥치는 바람에 대표 팀은 프랑스 상티에에서 훈련을 하고 곧바로 뮌헨으로 향해야 했다. 이때 대표 팀은 감독 박진관, 코치 이규소, 선수는 강만수, 이 인, 박기원, 이춘표, 이성구, 이용관, 김충한, 최종옥, 김금봉, 정동기, 김귀환, 진준택으로 모두 14명이었다.

사건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뮌헨에서 또 터졌다. 바로 올림픽 사에 유례없는 아랍 게릴라인 검은 9월단이 이스라엘 선수단을 습격한 것이다. 이 때 사건이 터진 이스라엘 선수단 숙소 바로 뒷동이 우리 선수단 숙소로 아랍 테러단들이 사살되고 해결될 때까지 숙소에 갇혀 있어야 햇다. 식사는 헬리콥터에서 공수해 주는 빵으로 때웠다. 요즘도 상티에 멤버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옛날의 추억담을 나누게 된 것도 그때의 아찔한 기억들이 큰 몫이 됐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는 경기위원장 임기를 마친 뒤 배구장을 찾지 않고 있다. 자신의 청춘의 정열을 쏟아 붓고 생활의 터전이 된 곳이지만 쉽게 배구장으로 발걸음이 옮겨지지 않는다고 털어 놓는다.

“우리만의 독특한 배구가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신장이 크고 몸의 탄력이 뛰어난 서구 선수들과 대결하기 위해서는 우리만의 컬러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코 유럽이나 북남미 팀들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어느 팀에도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공격은 외국인 선수가 하고 우리 선수들은 모두 들러리입니다. 기본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다시 기본을 강조하는 그는 프로배구가 팬들에게 더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아마 배구 활성화가 우선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지금의 프로배구단들은 자신들의 성적에만 급급할 뿐 아마 배구 활성화에는 아예 눈을 감고 있다고 쓴 소리도 서슴지 않았다. 심지어 남미나 아프리카에 우리만의 독특한 배구를 보급하고 가능성 있는 선수들을 발굴해 귀화를 시켜는 방안도 강구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도 폈다.

모두 한번 쯤 음미해 볼만한 고언(苦言)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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