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모의 테마토크] 영화진흥위원회에 따르면 지난 한 해 우리나라 관객 1명당 영화 4.22편씩 관람했다. 경제현황은 시시각각 나빠지는데 유료관람객 수는 늘었다. 주 관람 연령층이던 20~30대는 준 대신 40~50대는 늘었다. 영화를 관람하는 이유는 킬링타임(데이트 여가 포함), 감독(배우)에 대한 선망, 지적인 만족감 혹은 허영심의 충족(대화용 포함) 등이다. 이에 근거할 때 영화를 선택하는 기준은 재미, 감동, 배우(혹은 감독), 영화적 퀄리티(지적인 관점) 등이고 그 결정의 근거는 주로 SNS 혹은 주변의 입소문이다.

예전에 매스미디어가 절대적인 여론형성의 우위를 점했을 때만 해도 각 언론매체의 보도를 기준삼았지만 국민이 계속 언론매체에 실망하는 가운데 인터넷과 SNS가 발달하자 관객들은 보편타당한 국민적 시각을 가진 앞선 관람객의 후기에 더 신뢰감을 갖고 입소문에 비중을 두게 됐다. 현재 극장가의 흥행의 흐름을 보면 관객의 영화 선택 기준이 잘 드러난다. 그 속에서 시대적 흐름과 사회적 고뇌가 읽히는데 ‘검사외전’(이일형 감독, 쇼박스 배급)과 ‘로봇, 소리’(이호재 감독, 롯데엔터테인먼트 배급)가 바로 대표적인 예다.

▲ 사진='검사외전' 스틸.

9일 영진위 영화입장권 통합전산망 집계 결과에 따르면 ‘검사외전’은 지난 8일 94만 7444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누적 관객 수 427만 486만 명을 기록했다. 오는 17일 개봉되는 ‘데드풀’이 변수이긴 하지만 내달 24일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이 개봉되기 전까진 누가 뭐래도 ‘검사외전’이 대한민국 극장 산맥의 유일한 호랑이다. 10일까지 600만 명 이상을 동원할 것이 확실하니 곧 맞는 연휴 때 올릴 스코어에 따라 ‘명량’에 필적할지 넘어설지 윤곽이 드러날 듯하다. 게다가 지난해 여름 ‘몸비시즌’ 때 ‘암살’과 ‘베테랑’은 나란히 1000만 고지를 어깨동무 하고 넘었다. ‘데드풀’이 미칠 영향이 그리 부정적이지만은 않다는 의미다. ‘로봇, 소리’는 8일 1만 8537명을 동원하며 누적 관객 수 39만 6294명을 기록했다. 박스오피스 4위로 2계단 상승하는 이변을 낳았다.

‘검사외전’은 비현실적인 내용과 엉성한 얼개에 대한 비난이 없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은 하나같이 ‘그러면 어떠랴, 재미있으면 그만이지’ ‘오랜만에 가족들과 함께 배꼽 잡고 웃어 본 한국영화’라며 반색한다. ‘로봇, 소리’는 적은 관객이지만 대부분 ‘다시 보고 싶다’는 마니아 영화의 양상을 보인다. 불꽃이 꺼져가다 이번 연휴에 기사회생하는 이유는 그런 감동적인 울림과 메시지에 대한 입소문이 퍼진 데 있다. 이렇게 호평인 두 영화지만 그 배경은 아주 많이 다르다. ‘검사외전’은 대중의 소비 심리에 대한 단편적인 욕구와 카타르시스에 대한 2차원적 열망에 대한 확실한 상업적 전략의 승리고, ‘로봇, 소리’는 정서가 메마르고 고뇌를 상실한 디지털 자본주의 시대의 삭막함에 대한 탈진과 인간성 회복에 대한 갈증의 대리만족에 대한 해갈이다.

▲ 사진='검사외전' 스틸.

‘검사외전’은 대놓고 ‘돈 좀 벌어보자’고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권선징악이란 뻔한 클리셰에 할리우드는 물론 한국영화에서도 숱하게 봐온 시퀀스를 짜깁기한 퀼팅기법으로 기승전결이 충분히 예상되는 내러티브를 설계해 플롯을 완성한 점은 새로울 게 전혀 없다. 그래서 감독은 오로지 캐스팅에 모든 걸 쏟아 부어 승부수로 띠웠다. 황정민을 먼저 캐스팅했다는 점에서 이미 기초공사는 튼튼했다. 당연히 뼈대와 인테리어 공사는 일사천리다. 그 무대 위에 강동원이라는 훌륭한 광대를 내세워 원맨쇼를 펄치게 만들었다. 강동원이 뿜어내는 매력의 홍수가 관객들의 눈을 황홀하게 만듦으로써 집단마취 효과를 가져왔다. 황정민이라는 캐비어를 올린 에피타이저가 미리 관객들에게 신뢰감을 주는 프로파간다로 작용했다면 와규와 랍스터로 잘 차려진 강동원이란 메인디쉬는 ‘검사외전’을 전 국민적 필수 아젠다로 만들었다.

여기에 달콤한 디저트와 향 좋은 고급커피로 작용한 박성웅과 이성민은 장엄한 방점이었다. ‘신세계’의 살벌한 건달 역과 달리 강동원의 사기에 걸려들어 ‘휘문고 몇 기?’ 운운하는 순수한 매력을 보인 박성웅이나 ‘손님’에서 미처 많은 관객에게 보여주지 못한 어긋난 집권욕의 악마를 연기한 이성민은 자칫 강동원의 버터 연기에 질릴 법한 남자 관객에게 만유인력으로 작용했다.

▲ 사진='로봇, 소리' 스틸.

‘로봇, 소리’는 지나치게 많은 얘기를 담으려 한 욕심이 결정적인 패착으로 작용해 ‘흥행’과는 거리가 멀어졌지만 영화를 본 관객을 모두 마니아로 만들었다는 점에선 상업적인 배급사들에게 훌륭한 레퍼런스가 될 듯하다. 4분의3쯤에서 잘라도 됐을 법한 얘기를 끝나도 될 시점에 다시 이어 붙여 이하늬를 잘못 사용한 배치도는 애초부터 설계도부터 잘못 그린 티가 역력하다. 감독의 생각과 역량이 엇박자였다. 하지만 영화가 주는 수많은 울림과 감동과 메시지 그리고 교훈은 매우 훌륭해 그런 과욕과 치기가 낳은 악수조차도 눈엣가시로 여겨지지 않는다.

영화는 대놓고 스티븐 스필버그가 동화 ‘피노키오’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떠드는 걸작 ‘A.I.’의 바통을 이어받는다. 주인공은 외동딸 유주를 잃은 중년의 아버지 해관(이성민)과 미국이 군사무기로 개발한 로봇(소리)인데 소리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내면에 인간성이 자리 잡게 된다. 해관이 소리를 위장시키기 위해 옷가게에서 옷을 고르지만 소리는 그것을 거부하고 핑크색 후디를 고른다. 또 둘이 헤어졌다 극적으로 재회하는 장소가 유주가 어렸을 때 비상시 아버지와 만나기로 약속한 아이스크림 가게라는 점은 유주와 소리의 동일시, 혹은 빙의라는 게 외양이다. 하지만 그 속뜻은 정말 심오하다. 유주는 어른들의 이기심과 과욕과 거짓과 기만에 의해 희생됐다. 소리의 유일한 목적은 미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희생된 아프가니스탄의 한 소녀를 찾는 것이었다.

영화는 첨단의 디지털 기술로써 자본주의의 극단으로 달려가는 현 사회에 대해 대놓고 아날로그에 대한 그리움을 찬양한다. 유주를 잃은 지 얼마 안 됐을 즈음 주민센터 직원이 해관의 집 대문에 새로 바뀐 도로명 주소 간판을 붙이자 신경질적으로 떼어낸 것과 해관이 우연히 소리를 발견한 뒤 친구에게 수리를 부탁하며 자신의 폴더형 휴대전화까지 고쳐달라고 할 때 친구가 새로 바꾸라고 하자 강하게 거부한 것 등은 혹시라도 유주가 집에 되돌아오거나 최소한 편지를 보내거나 전화를 걸 것에 대한 희망이 표면적 이유다. 하지만 내재된 메시지는 첨단 과학에 의해 인간성을 잃어가고 기계(디지털)에 노예가 돼가는 것도 자각하지 못한 채 이기심에 눈이 멀어 관성적으로 살아가는 현재와 가까운 미래에 대한 심한 불안과 불만이고 바꿔 말하자면 아날로그에 대해 절규하는 추억의 메아리다.

인류가 점점 사람답지 못하게 변하고 로봇이 사람처럼 행동하고 생각하며 변하는 ‘A.I.’의 교훈을 잇는다. 또한 모든 게 자본가와 노동자, 부자와 가난한 자, 우와 좌, 보수와 진보 등 가치의 이분법적 논리가 표현과 이념의 전형으로 정형화되는 데 대한 고뇌와 분노의 몸부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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